28살의 평범함 회사원 김 우민. 겉으로는 무엇 하나 튀는 것 없이 매끈매끈한 자갈 돌처럼 평범한 그녀지만 그 안에 숨겨진 실체는 패션잡지 셀러브리티에 진소류란 필명으로 관능적 연애란 소설을 연재하고 있는 나름 흥미로운 이중생활의 주인공이다.
달작지근, 야리꼬리, 맬랑꼴랑한 연애소설을 써야만 하는 그녀에게 있는 치명적 결점.
그것은 요즘 세상 천연기념물로 분류되는 수컷의 때 하나 묻지 않은 무공해 순수 숫처녀란 말씀.
유의어 동정녀. 또는 처녀.
그것이 김우민 28살 처녀의 가슴에 분노의 불을 지피우는 계기가 된다.
"아, 신이시여. 쳐녀도 죄란 말씀인가요?"

김 우민 그 평범 자체를 뭉뚱그리 그려놓은 여자의 모든 감각을 일깨우는 남자는 누가 될 것인가? 여기 두명의 후보가 있다.
도 지우: 우민의 28년 지기 소꿉친구이면서, 지지리도 긴 짝사랑의 주인공이자, 동시에 관능적 연애의 남주인공 주석의 현신.
"우민아. 넌 내게 있어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야."
한 유사: 나누림 출판사의 편집장. 우민의 성적욕심에 불을 지 피우는 장본인이자 그 질기고도 긴 우민의 짝사랑을 뻔뻔하게 인터셉트하려는 하늘이 점지하신 독설가.
모든 사건의 그의 이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제 시선에 싸구려면 다른 사람의 시선에도 싸구려입니다."


-본문 중에서-


나누림 출판사 편집장. 한유사.
아직 병아리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생명력을 지닌 소설가로서의 제 목숨 줄을 가볍게 비틀 수도 있는 그 존재와 우민은 첫 단추부터 단단히 잘못 끼워 나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예의를 중지하는 우민, 인간관계에 있어 배려를 덕목으로 여기는 우민. 그런 천성과 더불어 28년 동안 상냥하고 친절한 도지우라는 남자만을 바라봐온 그녀는 상대방을 들쑤시는 듯한 유사의 말투와 행동이 심하게 거슬렸다. 그의 말투와 행동은 우민과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간지러운데 긁어주는 예쁜 짓도 아니고 눈에 안 띄는 아픈 곳을 슬슬 찔러 대며 사람 염장을 지르다 못해 쑤시는 남자.
눈앞에서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막상 눈은 웃지 않는 남자의 의도를 우민은 알 수 없었다. 쓸데없이 사설이 길어질수록 우민의 악의가 쌓이고 있음을 그도 느꼈는지 드디어 본격적으로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처음 관능적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소문으로 들었을 땐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이야기 전개나 스토리의 구성이 생각 외로 흥미진진하더군요. 뭐랄까, 자연스럽게 여성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할까요? 영화화나 드라마화도 쉽게 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과분한 칭찬 감사드립니다.”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 유사는 더 이상 말을 빙빙 돌리지 않으며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우민으로 하여금 잔뜩 기대를 하게 만드는 말들의 연속이었다. 유사에게 품었던 호의가 되돌아 갈 수 없는 적의로 바뀐 후였지만 지금만큼은 우민도 유사의 말을 경청하며 집중했다.
나누림 출판사 편집장 한유사. 섹시가이란 별명이 있다는 것은 오늘 알았지만 글 쓰는 사람 중에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진흙 속의 진주를 걸러내는 데에 능통하다는, 출판에 있어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한번 없는 백전백승의 신이 내린 안목. 그런 남자가 자신의 글을 칭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민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득, 진소류 씨의 소설에서 아주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네? 이상하다니……그게 무슨.”
“여주인공의 짝사랑부분에서 시선을 끌던 반짝임이 막상 더욱 두근거려야 할 연애에 들어서자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신기한 점을요.”
유사의 말에 우민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유사는 그 모습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 이상하지요. 연애소설에서 차라리 개그부분이 더욱 재미있고 흥미롭다 느껴지니 말입니다. 거기다 이번 호에 수록된 러브신은 약속을 잡은 후 읽게 됐는데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온 글의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더군요. 왜 이럴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진소류 씨를 만나보니 바로 알겠더군요.”
지금까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추켜세울 때는 언제고 갑자기 사람을 또 바닥에 냅다 내리 꽂는지.
우민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모든 일이 끝난 후에서야 비로써 유사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유사의 달콤한 칭찬은 지금부터 계속될 그의 독설에 대한 에어백이라는 완충장치라는 것을. 물론, 그것은 너무도 강렬한 사고로 인해 사용불능이 되었지만.
“저,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절 보니 알겠다니…….”
“진소류 씨.”
“예?”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진소류 씨는 실은 연애 한번 못해본,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남자경험이 전무한 숫처녀입니까?”
“……지금 뭐……뭐라고 하셨나요?”
“진소류 씨가 숫처녀냐, 그리 물었습니다.”
처음엔 잘못들은 게 아닌가 의심했지만 제 귀는 문제없이 활동하고 있었다.
숫처녀? 저 인간, 지금 분명 지금 숫처녀라고 한 거 맞지?
숫처녀의 사전적 의미: 남자와 성적 관계가 한 번도 없는 여자. 유의어 동정녀, 처녀가 있음.
잠깐, 머릿속으로 이런 걸 떠올릴 때가 아니잖아. 지금 나 성희롱 당한 거야? 저 재수 없이 겉만 뻔지르르한 인간한테? 하지만 우민이 받은 정신적 쇼크는 전혀 배려할 생각은 없는지 유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갔다.
“요즘 세상에 스물여덟 먹은 여자가 그럴 일은 드물다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번 호의 주석과의 첫 경험에 보인 여주인공의 감정묘사와 성적묘사는 모두 다 통 채로 싸.구.려. 였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처음으로 한 섹스를 그런 식으로 아니, 소설 속의 인애의 성격으로 그런 행동과 말을 하니 그것이 문제라 할 수 있겠죠.”
진지한 표정의 유사를 보며 우민은 또 한 번 멀쩡한 제 귀를 의심했다.
“잠깐, 방금 싸…싸…싸구려라고 하신 것 같은데요.”
“예, 싸구려요. 맞습니다. 정확히 들으셨군요. 싸구려라고 했습니다. 복사해서 붙여 넣기를 한 것처럼 진부하고, 흔해빠져 시시하기 짝이 없죠. 연애 한번 못해보고, 섹스 한번 못해본 사람처럼 뜨뜻미지근한 맹물 같은 러브신. 단지 자극적이기만 했습니다. 만약, 약속을 잡기 전 그 글을 봤더라면 절대 출판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만큼 이번 회! 거기서도 특히, 이 러브신은,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이런 건 연애소설이라 할 수도 없어요!”
지금까지 냉기를 풀풀 풍기던 남자 맞나 싶을 정도로 유사는 이야기를 하며 점점 흥분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저 남자가 제가 한 말을 의식은 하고 있을까? 란 의문이 들어 우민은 화가 머리끝을 치솟아 뚫고 나가는 와중에도 그를 향해 물었다.
“저기 이, 이보세요, 한유사 편집장님. 지금 그거 성, 성희롱이라는 거 아, 알고 계시나요?”
하지만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목소리가 덜덜덜 떨려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기에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겁니다. 이런 끔찍한 글을 읽고도 당신과 계약하기로 결정한 시점부터 제가 당신에게 제의한 출판, 그건 냉혹한 비지니스니까요. 물론 성희롱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단지 당신의 반응을 즐기기 위해 그런 말을 꺼낸 게 아니라는 거죠. 이건, 그래요. 진소류 씨의 소설에 대한 제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라고 해둡시다.”
아무리 비즈니스가 냉혹해도 그렇지. 기본 예의라는 게 있는 거잖아. 비즈니스 한다 하는 인간들은 다 너같이 매너는 다 우주 밖으로 날려버리냐? 그건 아니잖아! 상대방을 생각한다면 좀 더 부드럽게, 당신은 남자랑 자 본 경험이 없습니까? 라고 미소를 머금고 물어 보아도…아, 이것도 어차피 성희롱이긴 마찬가진가? 하지만, 좀 더, 좀 더, 친절하게 굴어도 당신에게 피해가 가는 게 아니잖아. 이 재수탱이야!
머릿속으로 다다다 이어지는 말들을 막상 입 밖으로 내보냈다간, 계약도 뭣도 끝이다.
“비즈니스인건 알겠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편집장님, 그런 식으로 개인적 평가를 내리시면 안 되지 않을까요? 공적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민은 아직까지 간당간당 붙어있는 이성을 부여잡고 최대한 정중한 어투로 유사를 향해 말했지만 유사는 되레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우선 계약은 진행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진소류 씨, 계속해서 이런 식이라면 곤란합니다. 오랜만에 괜찮은 작품을 찾았다 생각한 제 안목을 최초로 썩은 생선 눈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요. 그리고 당신도 그런 싸구려 글을 계속해서 쓰고 싶진 않으실 테지요?”
저 썩을 놈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왜 계속 싸구려 타령이야!
간당간당 이어진 우민의 이성이 두두둑 소리를 내며 끊어질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제 글이 대단하신 편집장님 눈엔 싸구려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전 제 글을 싸구려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러십니까? 그것 참 안타깝군요. 하지만 지금으로선 당신의 글은 싸구려가 맞습니다. 제가 장담하죠.”
“……하, 그러세요? 싸구려라 장담한다, 라 절 그런 식으로 평가하신다면 어쩔 수 없네요. 전 단순히 편집장님에게 잘 보일 요량으로 글을 쓸 생각은 전혀 없고 절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일할 생각도 전혀 없어요! 아무래도 나누림 출판사와는 계약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출판 거부를 말하는 작가 앞에서도 편집장이란 남자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뻔뻔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우민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이런, 뭔가 심하게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전 독자의 입장에 서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당신의 글에 대해 판단하고 감상을 말한 겁니다. 고로 지금 제가 당신에게 한 싸구려 라는 말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 냉정한 판단이 서십니까?”
“글, 글쎄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며 우민은 마른 침을 삼켰다. 어쩐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잘 모르시겠다면 정확히 알려드리죠. ‘제 시선에 싸구려라면 다른 사람의 시선에도 싸구려.’ 라는 겁니다.”
맙소사…….
우민은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과 비례하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저 입만 벙긋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