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증의 하나인 지독한 결벽증을 앓고 있는 이인성은 장애증서에 적힌 대로 기억을 갖은 이후로 쭉 오른쪽 다리를 힘겹게 끌며 살던 박다연에게 찾아온 억지스런 인연이었다. 혼자 남겨진 세상에서 그녀의 장애를 옮는 병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며 지긋지긋한 가난과 싸웠던 그녀에게 그 제안은 고마운 것이었다.
박다연은 아픔이 많아 대인기피증과 결벽증을 앓으며 7년이나 거대한 하얀 저택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던 인성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2년간 만족할 만한 U마트 구매 대행이었던 이름 모를 그녀가 감히 영수증 뒤에 편지를 보내왔다. 그리고 그 어이없는 낙서에 7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인성의 믿음직스러운 법률대리인 김진우 변호사가 인성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미친 짓이라고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박다연을 만나기 위해 그녀의 이력서를 받아들고 휴대폰을 들어 약속을 잡고야 말았다. 친구가 7년 만에 그의 성 안으로 들여 놓고 싶다는 존재가 살아 숨쉰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감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본문 중에서*

혼자 신이 난 진우를 흘겨보고 내리는 인성을 따라 그녀도 조용히 엘리베이터를 벗어났다. 뒤에 남겨진 아가씨가 다시 닫힘 버튼을 연신 누르는 소리가 들렸고 진우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크게 웃고는 다연과 인성을 모두 지나쳐 자신의 차로 다가갔다. 인성이 진우의 뒷좌석 문을 열고 타자 다연도 조용히 진우가 열어 준 트렁크에 쇼핑한 비닐봉지를 넣고 인성의 옆 자리에 앉기 위해 문에 손을 댔다. 엘리베이터에서 정신이 없던 인성은 그녀가 앉아야 할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뒀던 O두유 두 묶음을 들고 다시 차에서 내렸다. 인성은 트렁크를 거칠게 ‘탕탕’ 쳤고 진우는 트렁크를 열었다. 여전히 싱글벙글인 진우가 이젠 다연의 눈에도 조금 얄미웠다. 다연은 뒷문을 열어 생긴 공간으로 운전석의 진우에게 조그맣게 물었다.
“진우 씨, 왜 그래요?”
“재밌어서요. 저 녀석이 절 웃기는 게 많이 기뻐요.”
“…….”
그러는 사이에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하는 인성은 거칠게 트렁크를 젖히고 O두유를 넣었다. 그녀는 황급히 그가 트렁크를 다시 닫기 전에 얼른 차에 올라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거의 동시에 그가 자신이 타야 할 문을 열었고 조금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자리에 앉자 얄미운 진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집으로 출발! 앞에 꽃장식이라도 달면 딱 인데 말이야. 신혼여행으로 마트투어도 나쁘진 않았지? 아까 다연 씨가 산 캔 커피라도 다 마셔서 차 뒤에 좀 달면 어떨까?”
“시끄러. 피곤해. 빨리 가자.”
그렇게 말하는 인성은 정말로 많이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진우는 또다시 싱글거리며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걱정스럽게 운전석을 바라보는 다연을 위해선지 그는 다행히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운전을 하는 진우로 옆 자리의 남자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듯 보였다. 겁에 질린 건 다연이었고 그녀는 애원을 했다.
“진우 씨. 제발요!”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야 어떻든 운전을 하는 진우는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며 성처럼 보이는 인성의 집으로 들어서서 현관 앞에 차를 예쁘게 주차했다. 그리곤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트렁크만 열었다. 뒷좌석의 둘이 내리자 유리창을 내렸다.
“다연 씨! 갈게요.”
“네. 조심히 가세요. 오늘 정말 이상했던 거 알아요?”
“제가요? TV를 못 봤더니 그랬나?”
“가셔서 보세요. 그럼 잘 가요.”
인성이 내려서 진우와 인사를 주고받는 그녀의 곁으로 와서 팔짱을 끼고 운전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인사를 끝낸 다연은 당연한 듯 진우의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기 위해 차 뒤로 갔다. 하지만 인성은 설마 내리지 않을 거냐는 뜻으로 계속 진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진우는 그와 눈싸움이라도 하듯 마주 보고 있다가 이제 멋지고 장난이 가득 담긴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인성이 눈을 부릅뜨자 진우는 좀 더 큰 미소로 답해 줬다. 결국 인성은 뭔가 크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소리쳤다.
“야! 김진우!”
진우는 트렁크에서 다연이가 자신의 비닐봉지를 꺼내는 걸 보고 말했다.
“다연 씨! 트렁크 좀 닫아 줘요!”
결국 고집스럽게 진우를 바라보던 인성은 빠른 걸음으로 이동을 해서 시키는 대로 트렁크를 닫기 위해 손을 뻗고 있는 다연이의 손을 잡았다.
“저자식이 시킨다고 닫고 있냐?”
“맞다! 두유!”
그녀의 손을 놓은 그는 트렁크 안으로 허리를 굽혔다. O두유 하나는 옆구리에 끼고 같은 손에 하나를 마저 들었다. 그 일을 끝낸 남은 손으로 다연의 비닐봉지를 받아 들고 걷다가 비닐봉지 손잡이를 팔목으로 보내고 손가락을 꺼내어 지문인식기에 손을 댔다. 그가 트렁크를 열어둔 채 그냥 가 버리자 그녀는 트렁크를 닫으며 그걸 깜박한 그에게 핀잔 따위를 하진 못했다. 뒤따르던 그녀의 귀에 그가 뭔가를 중얼거리는 게 들렸는데 진우를 욕하는 건지 멍청하게 두유를 꺼내지 않고 트렁크를 닫으려던 자신을 욕하는 건지 모르겠어 갸우뚱거렸다. 현관문이 열리고 본격적으로 돌아서 인성이 투덜거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진우는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빠르게 사라지는 자동차를 보며 인성이 크게 소리 질렀다.
“김진우! 너!”
이제 의미 있는 웃음을 짓고 있는 진우를 실은 자동차는 거대한 대문도 지나고 있었다. 진우의 차에도 이 집으로 들어오기 위한 대문을 자동으로 여는 센서가 있었다. 그리고 이 집 집사는 주인이 들어왔다고 해서 화면으로 확인은 해도 지시 받은 사항이 없다면 절대 나오질 않았다. 진우는 그걸 잘 알고 있었고 화면으로 만약 김 집사가 방금 전 장면을 보았다면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진 않았을지 생각했다.
“제가 들 테니 봉지는 주세요!”
“됐어!”
그는 그럴 필요 없는데 굳이 다연에게서 받아들었던 비닐봉지와 애초에 그에게 속했던 두유를 주방 식탁 위에 ‘탁’소리가 나게 내려놓고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 버렸다. 들어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짐까지 들어 주고는 신경질을 부리는 그로 조금 짜증이 났다.
“진우 씨까지 이상했어. 진이 다 빠진다. 정말 힘들다. 외출 두 번 했다간 기절하겠다.”
어쨌든 인성이 탁자에 올려놓은 물건들을 정리할 요량으로 비닐봉지로 다가갔다. 그리고 눈에 들어 온 캔 커피 하나를 꺼내어 땄다. 별로 마시고픈 생각은 없었는데 강성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결혼을 거절했다면 그와 어떤 사이가 되었을지도 생각해 보았다. 이인성은 왜 그만을 위한 구매 대행을 해달라고 하지 않고 자신에게 결혼을 하자고 했을까? 이 결혼 기간이 끝나고 만약 자신이 다리를 다 고친 후 사무실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강성과 다시 만난다면 어떨까란 생각도 해봤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다리를 고치든 고치지 않든 이혼녀가 되어서 이 집을 나간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쉽지만 옆 자리를 썼던 강성과는 이 커피 캔을 마지막으로 끝이란 생각을 했다. 혼자 잠시 마음에 담았던 그를 이젠 비워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연은 무슨 의식을 하듯 그 커피를 입 안으로 보내기 위해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가 그만 내용물을 반이나 쏟아 버렸다.
“칠칠맞기는!”
그가 다가와 핀잔만 주고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은 채 식탁 위에 놓인 두유 묶음에서 유리병 하나를 떼어내어 뚜껑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그 열린 병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그의 눈은 그녀를 계속 보고 있었고 그와 이렇게 가까이 마주 보고 있는 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란 걸 그녀는 알았다. 흘린 커피를 닦아야 할 텐데 그가 쳐다보는 시선이 있어서 움직이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그 병을 비우고 어서 자리를 떠나 주길 기다렸다. 두유병을 서서히 올리면서 그 눈이 그녀가 흘린 커피를 따라 그녀의 턱을 지나 가슴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하얀 블라우스를 입어서 커피 자국이 선명할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에 창피했다. 그렇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이제는 가슴을 지나 커피가 흘러내린 자신의 복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조금 올려 여전히 그의 눈동자를 따라다니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두유병이 보였고 그가 여전히 마시고 있는 두유가 그의 입 안으로 모두 다 사라졌다. 그는 병을 내려 식탁 위에 두고 손등으로 입가의 두유를 닦았다.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당연히 냅킨을 가지러 이동을 하거나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뛰어가야 정답일 텐데 그는 그저 그렇게 입가를 닦아내고는 그녀의 눈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뱉은 말이 그녀의 귓가를 자극했다.
“고소하군. 너도 하나 마셔.”
그리곤 인성은 뒤돌아서서 주방을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다연이 웅얼거렸다.
“뭐가? 내 꼴이? 아님 두유가?”
‘고소하다’는 그의 말이 뭘 의미하나 생각하며 그녀는 반쯤 쏟은 커피 캔을 식탁 위에 두고 냅킨과 적신 타월을 가져와 바닥을 닦았다. 이 고급 카펫에 얼룩을 빼려면 약품의 도움이 필요할 거 같았다. 끈적한 자신의 가슴팍과 복부도 짜증스러웠다. 아무래도 바닥을 깨끗이 닦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김 집사에게 샤워를 하고 도움을 요청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한참 만에 다연은 식탁 위로 올라왔다.
“끙! 짜증나.”
식탁 위에 반쯤 내용물을 담고 있는 캔 커피를 잡으려다 말고 인성이 떼어냈던 번들 쪽 붙어 있는 사은품 두유를 떼어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입에 대고 마셨다. 다연이 좋아하는 그 맛 그대로 정말 고소했다. 그가 포장이 바뀌고 첨가물이 바뀌어 난처한 표정으로 늘 마시던 두유를 노려보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의 입에 그녀가 좋아하는 O두유가 맛있다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유가 고소하단 뜻이겠네.”
그리고 방금 입가를 닦던 인성의 모습이 뽀샤시하게 떠올랐다. 고개를 서너 번 저으며 그녀는 두유를 마저 마셨다. 그리고 귓가에 ‘고소하군…… 고소하군…… 고소하군…….’이란 달콤한 말이 자꾸 떠올랐다. 자신을 놀렸을지도 모를 그 말이 말 그대로 고소하게도 아니고 왜 이리 달콤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물건 정리를 시작했다. 잘 밤에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아져 조금 아깝긴 해도 캔 커피의 내용물은 그대로 싱크대에 흘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