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건설 상품개발팀장 이우진. 나이 서른에 뛰어난 기획력을 인정받아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괴물. 좀처럼 감정에 휩쓸리는 법이 없는 포커페이스. 큰 키에 다부진 몸매, 도회적 이미지로 회사 여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 하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알고 있는 이우진은 전혀 다른 인간이다.

안팎으로 완벽한 이중생활을 영위하던 우진 앞에 인간 이우진의 실체를 쥐고 흔드는 여자가 나타나면서 우아하게 단장된 그의 삶에 그늘이 드리운다.

<맛보기>

우진은 다시 숨을 크게 들이키고 차근차근 따지기로 했다. 그러나 준비된 서해 앞에서 그의 노력은 헛된 몸짓, 아니 몸부림에 불과했다.

“너, 네가 나서서 너희 아버지한테 나 만나게 해 달라고 한 거지? 그치?.”

“무슨 그런 말씀을?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데, 내가 부탁한다고 이런 자릴 만드시겠어? 내가 한 일이라곤 우리 아버지 선보라는 명령에 담담히 따른 것 뿐이야. 뭐, 오늘 안 만났으면 빠른 시일 내에 너희 집 어딘지 알아내서 쳐들어갈 생각이긴 했어.”

“뭐, 뭐라고? 너희 집 어딘지 알아내서 쳐들어가?”

거침없이 너라고 하는 서해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우진의 음성은 참을성이 바닥났음을 경고하듯 딱딱 끊어졌다.

“난 말야, 아버지가 주선한 선 자리는 적당히 시간이나 때워주고 가자 주의거든. 근데 모처럼 아는 사람 나왔으니 그렇게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면 안 되겠지?”

서해는 우진에게 무심한 시선을 던지고는 메뉴판을 집어들었다.

“연애 9단 친구들 말이, 여기 스테이크가 괜찮다더라. 이 집 스테이크 먹다보면 없던 감정도 생긴다나? 돈 많이 버는 사람이라니까, 맘껏 시켜도 되겠지?”

그녀의 말은 우진의 의중을 묻는다기 보다 통보하는 쪽에 가까웠다.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메뉴판을 펼쳐든 우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웬 음식값이 이렇게 비싸? 메뉴판에 적힌 음식은 보통 한다하는 레스토랑의 두 배 가격이었다. 우진은 눈에 불을 켜고 서해에게 상체를 들이밀었다.

“연애 9단? 야, 네 친구들은 연애 9단이 아니라 바가지 9단이야, 바가지 9단! 이 가격에 한 끼 식사하다 보면 없던 감정이 생기긴 생기겠다. 저런 여자랑 살면 평생 고생이겠다! 제정신 박힌 놈이라면 열이면 열, 다 이런 생각 할거다.”

우진처럼 상체를 들이밀고 그의 열변을 지켜보던 서해가 짧게 내쏘았다.

“수다쟁이!”

“수, 수다쟁이?”

“젊은 사람이 말수가 없고 진중해? 우리 아버지 시력, 청력 다 안 좋아지셨나보네. 이우진이 말수 없고 진중하면, 강서해는 실어증 환자겠다?”

서해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우진은 열내고 화내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한 일이라곤 저희 아버지 명령에 담담히 따른 것뿐이라고? 허, 누굴 속이려고! 강서해 저 여자, 분명히 저희 아버지한테 부탁한 거야. 이우진이란 놈 만날 일이 있으니 자리 좀 주선해 달라고! 그리고, 바가지 9단 친구들한테 연락한 거지. 제일 비싼 만남의 장소가 어디냐고. 으! 우진은 서해의 복수혈전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다시 휩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