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6년 고려 광종. 황제의 사촌이자 해상왕이라 불리는 나주성의 왕태성, 왜구의 우두머리 나마시카는 일본으로 건너간 고 신라인들이 세운 천학제의 여인 유라를 선물로 바친다. 해로(海路)를 노리는 나마시카의 뻔한 술수라고 생각하고 유라를 보던 태성은 점차 가슴속 에 커져만 가는 유라의 그림자에 당황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태성은 결심한다. 완전히 가지거나 완전히 버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본문 중에서>


엉덩방아를 찢는다 여긴 순간, 힘있는 팔이 그녀를 낚아챘다. 단단한 팔이 허리에 감으며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유라는 미친 듯이 몸을 비틀며 저항했다.

“가만히 있어라, 이러다가 성내 사람들 모두 달려오겠다.”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이로서 탈출은 실패한 건가? 좌절감이 밀려오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유라는 손톱으로 그의 굵은 팔을 긁으며 팔꿈치로 배를 가격했다. 그러나 사내는 낮은 웃음 지으며 허리를 감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노비가 도망하다 잡히면 어찌 되는지 아느냐? 주인이 그를 죽여도 잘못했다 하는 이가 없다. 그걸 각오하고 도망하는 게냐?”

질책보다는 재미있어 하는 말투였다. 유라는 격렬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난 노비가 아니예요!”

그녀의 반응에 사내는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를 놓아주었다.

“나의 말을 부정하는 게냐?”

유라는 뒤로 홱 돌아서 사내를 마주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늘 속에 있어서 형체를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그녀는 고집스럽게 어둠 속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는 아이구나. 네가 노비인지 아닌지는 네 주인을 깨워 이리로 데려와 보면 알겠지.”

유라는 어둠 속을 노려보며 사태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내용과는 달리 느긋한 말투가 당장 그리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주성 사람인가? 말투에 묻어나는 위엄이 일개 병사나 노비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잠시 나주성에 머무르는 손님일 수도 있었다. 손님이라면 나주성주에게 고하는 대신 그녀를 도와 줄 수도 있었다.

유라는 샘솟듯이 솟아나는 기대를 애써 누르며 높은 담 너머를 가리켰다. 사내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유라는 부탁한다는 말 대신 고개를 숙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유라는 머뭇거리며 어둠 속으로 팔을 뻗어 손끝에 닿는 그의 옷가지를 살짝 잡아 당겼다.

“밖으로 데려다 달라 하는 것이냐?”

이렇다 할 감정도 베어 나오지 않는 낮은 목소리가 밤 기운을 타고 가슴 깊이 스며들자 유라는 침을 꼴깍 삼켰다. 사내가 의식되며 자신은 그를 볼 수 없는데 사내는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이 싫었다. 유라는 이번에는 힘있게 그를 팔을 잡아 불빛 밑으로 이끌었다. 사내는 순순히 횃불 아래로 나오며 그녀와 마주섰다.

커다란 체구가 주위를 압도하며 거친 얼굴선이 불빛에 드러났다. 짙은 눈썹과 깊은 눈매, 곧은 콧날 밑으로 단호한 입매까지. 일말의 부드러움이라고는 없는 거칠고 강인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반짝이고 있는 사내의 눈을 마주 대하자 무섬증이나 두려움은 일지 않았다. 왠지 친숙하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하지만 오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몇 시진 후면 해가 뜰 것이고 그녀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 전에 최대한 멀리 나주성에서 벗어나야 했다. 미로처럼 복잡하고 커다란 집에서 아직 출구조차 찾지 못한 유라는 조급해졌다.

“내가 너의 탈출을 도우리라 생각하느냐? 도망간 노비와 함께 도망을 도운 자도 벌을 받게 된다.”

완곡한 거절에 유라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야속했지만 이해는 갔다. 나주성은 도망하기가 쉬운 곳이 아니었고 지리에 무지하고 걸음도 늦은 그녀는 실패할 확률이 컸다. 형벌을 받을 것을 감내하고 위험에 뛰어들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유라가 걸음을 옮기자 그가 뒤따라왔다. 혹 마음이 바뀐 걸까?

“그 길이 확실한 게냐?”

그녀가 뒤돌아보자 사내는 놀리듯 말했다. 그제야 그가 도울 생각이 없음을 눈치챈 유라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유라는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빠르게 걸어나갔다. 곧 다른 건물과 다소 떨어진 건물이 나타났다.

거침없는 필체로 산해소라 쓰인 현판이 보였다. 건물은 사방이 담으로 막힌,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이 들어온 길 말고는 길이 없는 곳이었다. 그녀는 앞뜰에 운치 있게 심어진 대나무를 암담한 심정으로 바라보다가 서둘러 몸을 돌렸다. 어차피 잘못 든 길이라면 한시라도 서둘러야 한다.

고개를 돌리자 중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유라는 그를 흘기며 침의를 말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도울 생각도 없으면서 자꾸만 따라 다니는 연유를 알 수 없었다. 놀리는 듯 바라보는 눈빛도 싫었다. 무시하자고 다짐하며 그의 옆을 지나치는 순간, 사내가 유라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는 저항하는 유라의 두 팔을 한 손으로 움켜쥐며 가까이 끌어당겼다.

“쉿, 누가 오고 있어.”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사람이라니. 그런데 유라가 그에게 잡힌 몸을 비트는 순간, 정말로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횃불을 든 보초병 두 명이 그들 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대로 들켜버리면 어쩌지? 사내의 말대로 왕태성은 그녀를 죽일지도 몰랐다. 죽음을 면할지라도 다시는 도망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리라.

“산해소가 내 거처다. 안으로 몸을 피하자꾸나. 알아들었느냐?”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유라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산해소가 그의 거처였구나. 불안감에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도중에도 그가 자신을 뒤쫓아 왔다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내는 담의 그늘을 이용해 그녀의 무게를 거의 떠 안으면서도 잡음하나 내지 않고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바로 곁에 다가온 보초병들의 눈을 피하며 능숙하게 산해소의 문을 열었다. 유라는 방안으로 들어서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사리 죽음을 비껴간 것만 같아 몸이 떨림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사내가 유라의 뒤를 따라 들어오며 불을 밝혔다. 서윤청보다 두 배는 됨직한 넓은 방이 불빛아래 드러났다. 별다른 가구도 없이 썰렁한 방이었다. 손님의 거처로 가끔 사용하기 때문인가? 유라는 방안의 싸늘한 공기에 몸을 감싸며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났으리라. 유라는 고마움에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고개를 드는 순간, 그 미소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사내는 창백해진 유라의 얼굴을 마주 대하며 피식 웃었다. 단호해 보이던 입매가 부드러워지며 훨씬 보기 좋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제야 날 알아보는 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