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배를 타고 그대로 돌아왔다지?“'' “그‥그렇습니다, 선부님. 송구합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사내가 바닥까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쿵하고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묘한 소리가 석실을 채웠다. 두려운 듯 그가 차마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이는 제 손으로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왜소한 체구의 촌부였다. 두 세 칸의 계단을 두어 바닥보다 높인 단 위로, 커다란 의자에 몸을 묻은 노인이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평이한 목소리로 물었다.'' “벌써 세 번째로구나. 고려 노예들을 연경의 위무르에게 넘기기로 되어있었거늘 어찌 이번에도 실패한 것이냐?”'' “왕, 왕태성 장군이 도중에 저지하는 바람에 중원에 닿기도 전에 뱃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로(海路)를 이용하려 하면 세, 세금을 내고 배를 수색해야 한다 했습니다. 어쩔 수가, 어, 어쩔 수가……!”'' 노인이 몸을 일으키며 그의 말을 대신 끝맺어 주었다.'' “어쩔 수가 없었단 말이지?”'' 사내는 고개를 쳐들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없이 온화한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몸이 병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노인은 안 되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써 잡은 노예들은 곡식만 축내고 있고, 위무르는 당장 위약금을 독촉하겠지. 십 년 동안 내 수족이 되어 헌신한 충정심을 생각하면 네 목숨 하나 살리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스와시. 이번 일의 손해 얼마나 큰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 스와시가 바닥을 기어와 말끝을 흐리는 노인의 발을 부여잡았다. 가는 꼬챙이 같은 다리에 굵은 팔을 감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선부님 제발, 제발 목숨만은…….”'' “아해야, 너도 이곳의 법도를 알지 않느냐?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스와시의 얼굴에 혈색이 가셨다. 그대로 굳어버린 그의 팔을 쉽사리 떨구며 노인은 앞에 있는 이들을 직시했다. 양옆으로 길게 도열해 있는 부하들, 자신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그들에게 노인은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누구든지 예외는 없다. 실패자는 용서치 않는다. 왕태성에게 당한 게 스와시만이 아님을 모두 알고 있겠지? 그럼 앞으로 왕태성을 만나건 하늘님을 만나건 뱃머리를 돌리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노안에 드리워진 미소는 어떤 분노나 질책보다 효과적이었다. 새파랗게 질려 가는 부하들의 얼굴 뒤로 노인은 의자에 몸을 구겨 넣으며 손사래를 쳤다.'' “피곤하구나. 모두 그만 나가보도록 해라.”'' “예, 선부님!”''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사내들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 때, 노인의 발 앞에 엎드려 있던 스와시가 헐레벌떡 일어서며 칼을 빼들었다. 그의 눈에 광기와 절망감이 번뜩이고 있었다.'' “비켜, 비켜! 난 살아야 해. 난 살아야 한단 말이야!”'' 스와시는 노인의 눈치를 살피는 이들을 밀치며 다급히 석실을 뛰쳐나갔다.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노인 앞을 어물거리던 사내들도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갔다. 사(死)하라는 명도 없는데다가 무엇보다 그를 부를 용기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수십 개의 둥근 기둥만 남기고 텅 비어 버린 석실에 노인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울렸다.'' “또 왕태성이란 말이지. 또 말이야.”'' 그는 보기와는 달리 민첩하게 노구를 일으켰다.'' “무유야.”'' 노인의 부름에 이제껏 있는 듯 없는 듯 미동도 않고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검은 무복을 걸친 냉막한 인상의 젊은 사내였다.'' “예, 선부님.”'' “숨통이 조이는구나. 왕태성, 그 놈이 우리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어. 이제 결판을 낼 때가 온 것 같구나. 하나의 바다에 두 명의 주인이 있을 수는 없는 법, 이리 가까이 오너라.”'' 노인은 무릎을 꿇고 다가앉은 사내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문에 바짝 귀를 대고 있다 해도 들리지 않을 낮은 목소리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노인의 말이 끝나도록 사내의 얼굴에는 작은 표정 하나 스치지 않았다. '' “예, 선부님. 명에 따르겠습니다.”'' 문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을 노인이 잡았다.'' “스와시를 어찌 처리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그가 관리하던 나까끼 섬도 네가 맡아 주어야겠다. 이로서 너는 명실상부 이곳의 이인자(二人者)가 된 것이다. 누구보다 너를 믿고 있음을 잊지 마라.”'' 흑의(黑衣)의 사내는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히며 거침없는 걸음으로 석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나고 혼자 남은 방안에서 노인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온화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의자 머리를 움켜쥔 주먹에 하얀 관절을 드러냈다. '' “왕태성. 이제 끝낼 때도 되었지.”''''''1'' 956년 일본, 신추(新秋)의 선유사.'''''' “삼가 조의를 표하네. 이 땅의 큰 별이 졌어."'' 무한은 침중한 얼굴을 마주 대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뿐,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과연 할아버지가 이 조문객을 환영하고 계실런지 알 수가 없었다. '' “혈전이라면 어디든 달려간 추선과 적국이 뱉은 침이라도 삼켰던 내가 비록 사념(思念)은 달랐으나 항시 나라를 먼저 생각했음은 다를 바가 없었지. 천년사직을 고스란히 적국의 손에 넘겼다하여 추선은 나를 다시 보지 않았으나 마지막 가는 길에 오십 년 지기의 술잔을 거절하지는 않겠지."'' 무한은 술잔을 채우는 노인의 물기 어린 눈매를 바라보다 끝내 고개를 돌렸다. 통곡소리 대신 노승의 목탁소리와 불문 읊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법당 너머로 수백 개의 연등이 절의 앞마당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차가운 흙바닥을 마다하지 않고 절을 하는 이들 중에는 고려와 일본, 중원에서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색목인도 눈에 뜨였다. 고 신라국의 대학자이자 대장군이었던 할아버지 김추선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하고자 먼길을 달려온 이들이었다. 지난 한 달간 치러진 제를 마치고 내일 있을 토장을 기다리며 사람들은 밤이 깊도록 자리를 뜨지 않았다. '' 무한은 다시 고려국에서 온 박승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극락장생을 기원하는 문구의 띠를 사면으로 두르고 부처 앞에 놓인 골호, 한 줌 먼지로 화해 골호에 담긴 친우를 바라보는 박승지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때는 할아버지와 둘도 없는 지기였지만 지난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왕래가 없었던 분이셨다. 바다 건너 먼길을 달려와도 번번이 문 앞에서 내쳐지셨던 분, 이제 그만 현실을 인정하라 하던 박승지와 부패한 조국이지만 매국노는 용서치 못한다 하던 할아버지의 설전이 아직도 생생했다. '' 신라 말, 장군이었던 할아버지 김추선과 문사였던 박승지는 쓰러져 가는 조국을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백제가 쳐들어 왔고, 치열한 전쟁터에 나가 싸우던 할아버지는 원군을 요청하게 되었다. 조정에 남아있던 박승지는 이를 위해 발벗고 뛰었지만 조정 대신들은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할아버지를 원군요청을 묵인했다. 후백제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면 커지게 될 할아버지의 세를 경계했던 것이다. '' 결국 할아버지 김추선은 두 아들도 잃고 수 백 명의 수하가 몰살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박승지는 친우의 눈물을 보면서 신라의 마지막을 예견했다. 대신들은 더 이상 조정의 대신들이 아니라 자신의 권세와 잇속만 챙기는 망국의 대신들이었다. 그 후 박승지는 고려와 손을 잡았고 김추선은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일본으로 건너와 천학제를 건립했다. '' 무한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박승지가 할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의 말처럼 할아버지도 오 십 년 지기의 마지막 술잔을 거절하지는 않으리라. 한때는 서로에게 목숨까지 맡기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 무한은 도량을 한 바퀴 돌아보며 일주문으로 향했다. 초췌한 얼굴의 어머니와 동생 제한이 산등성이를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연등 행렬을 맞으며 일주문 앞에 서있었다. '' “어머니, 큰스님께서 선방을 내주셨습니다. 들어가 좀 쉬시지요.”'' 무한은 지쳐 보이는 어머니에게 다가서며 곁을 부축했다. 장시간에 걸친 장례식이 버거운 듯 그녀의 고운 눈가에는 검은 테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수화는 고개를 저으며 연신 행렬 속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 “아니다, 무한아. 그보다 유라는 아직 안 온 게냐?”'' 그녀의 물음에 할아버지의 부음 후 한시도 편치 않았던 무한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무한은 어머니의 다른 곁을 부축하고 선 동생 제한을 돌아보았다.'' “제한아, 네가 마을로 가 보아라. 이것이 정말 끝내 안 오려는 모양이다. 가서 끌고라도 오너라.”'' 제한은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철부지 여동생의 고집을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다소곳이 말을 잘 듣다가도 고집을 세울 때면 물도 불도 가리지 않는 여동생 유라, 그런 동생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제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결국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제한이 무한의 표정을 살피며 마지못해 발을 뗐으나 수화가 고개를 저으며 제한을 잡았다.'' “아니다, 그냥 두어라. 할아버지를 쉬이 보낼 수 없는 게지…….”'' 안타까움에 말끝을 흐리는 어머니는 장례식과 더불어 어린 딸 걱정까지 하느라 몹시 고단해 보였다. 말은 그리하면서도 여전히 눈은 사람들 속을 헤매고 있는 어머니를 보며 무한은 이번에야말로 여동생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