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새삼스레 내가 이러는 이유는 네 몸도 마음도 전부 원하기 때문이야. 네 마음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준, 짝사랑하는 선배의 검도경기에 응원을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 갑자기 솟구치는 분수의 물줄기에 휩쓸려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끌려오게 된다.
아푸스 국(國)의 제1황자 반 라슈타르는 이계(異界)에서 온 준이 위기에 처한 아푸스 국을 구할 신탁의 주인공이라 믿고 그녀를 제 곁에 두기로 결심하는데…….
“완전히 내 것이 되어줘야겠어, 준.”
“난…….”
“네게 좋다, 싫다 선택을 하라는 게 아니야. 내가 너에게 듣고자 하는 답은 처음부터 하나밖에 없으니까.
※ ‘가하 에픽’은 다양한 시대, 색다른 소재, 독특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도서출판 가하의 새로운 브랜드입니다. 로맨틱한 판타지가 가득한 가하 에픽, 지금 만나보세요!
2. 작가 소개
깡다케이
반짝거리고 예쁜 로맨스가 좋아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현재 조아라(www.joara.com)에서 연재 활동 중입니다.
▣ 출간작
템페스트
야만과 이체
기린왕의 상아
티탄의 별
3. 차례
#12. 잔상
#13. 전갈의 숲
#14. 가시덤불 위에
#15. 달무리와 같이
#16. 바람이 일렁이고
#17. 빛과 그림자
#18. 안개꽃의 초상 Ⅰ
#19. 안개꽃의 초상 Ⅱ
4. 미리 보기
“준, 신탁의 내용은 기억하고 있나?”
“물론이에요.”
그러다 자리에 우뚝 멈춘 반이 준을 향해 신탁의 내용을 묻는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이제부터가 본론이겠구나 싶어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칠흑 같은 밤을 그 안에 품고 황금의 시간 속에 잠든 신들의 향연을 재연할 자, 그대 앞에 모습을 드러내리라. 이 신탁대로 여신의 모습을 한 네가 내 앞에 나타났으니 이 신탁의 주인은 너일 거다.”
자신이 그 신탁의 주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을 벌써 몇 번인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은 여전히 준을 신탁의 주인이라 말한다. 저 스스로 자신하지 못하는 것을 이처럼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다는 것은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기에 이 말이 나올 때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이 다물어지고 만다.
준의 신탁의 주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신탁의 주인으로 만들면 그만이라는 소리를 하니 더욱 그랬다. 진짜가 나타났을 때, 그 진짜의 손을 잡는 것이 반에게 훨씬 이익일 텐데도 준의 손을 잡겠다고 말한다.
혹시 그 진짜가 지금 나타난 게 아닐까? 그래서 준에게 앞으로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부러 이런 장소에 둘만 온 것도 무리 없이 설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반의 입에서 이어져 나오는 말은 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처음 내 눈앞에 나타난 사람도, 지금까지 곁에 있던 사람도, 앞으로 함께하고픈 사람도 너 하나다, 준. 이건 네가 신탁의 주인이기 때문이 아니야.”
“무슨…… 뜻이에요?”
“널 선택한 이유는 그것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그것이 너와 함께하고자 하는 전부는 아니란 소리다. 네가 네 스스로 신탁의 주인이라 자신하지 못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아. 하지만 넌 내가 가장 필요할 때,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주었어. 신을 믿지 않지만 만약 신의 인도라는 게 있고,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지금 너와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그것이겠지.”
머릿속이 멍했다. 반의 말처럼 그가 신앙심이 깊은 운명론자라거나 감성적인 로맨티스트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가 하는 말들이 유난히 더 무겁고 어지럽게 제게 다가왔다.
“해서 처음으로 신 앞에 맹세코자 여기까지 온 거다.”
그 말을 하며 반이 준의 손을 잡았다.
“주신(主神) 란 앞에 맹세하지. 당신들이 내게 보내준 여인이니, 내가 끝까지 책임지겠노라고. 이곳에 들어서면서 이미 그렇게 다짐했으니 너 역시 함부로 내게서 벗어나지 마라. 내 손 닿지 않는 곳에서 위험해지는 것도 안 돼.”
고백인데도 고백이 아닌 것처럼 담백한 그 말이 심장을 쿵쿵 때려 갑자기 제 심장이 두 개로 늘어나버린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마법까지 부렸다. 그만큼 반의 고백은 짧지만 강렬했다.
“완전히 내 것이 되어줘야겠어, 준.”
“난…….”
“네게 좋다, 싫다 선택을 하라는 게 아니야. 내가 너에게 듣고자 하는 답은 처음부터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날카로웠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뛰고, 손끝으로 아릿하게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약혼했잖아요. 이미 반의 사람인데 뭘 새삼스럽게…….”
이럴 때 뭐라고 말하더라?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고백 받는 장면을 수도 없이 많이 봤는데 이럴 때 뭐라고 대답하는지, 어떻게 반응하는지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다.
“그래, 새삼스레 내가 이러는 이유는 네 몸도 마음도 전부 원하기 때문이야. 네 마음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
“…….”
부랴부랴 제 감정을 추스르고 희석해보지만 오래전에 그 색을 들킨 듯 반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점점 더 붉어만 진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묻는데도 부정 한마디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이건 확실히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널 원해, 준. 그러니 온전히 내 것이 되어줘.”
“나만…… 당신 것이 되는 거예요?”
“불만인가?”
불만이냐고 되묻는 그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모든 신경을 올올이 깨우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불만인지 아닌지조차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채 그저 입에서 흘러나올 뿐인 말을 반이 주워 담으며 일절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네 것이 되어주지. 이제 공평한가?”
어째서 이렇게 쉽게 대답을 할 수 있는 걸까? 진짜 준의 것이 되어주겠다는 걸까? 어떻게?
“공평하지 않은 것 같아요. 내가 당신 것이 되고, 당신이 내 것이 된다고 해도 뭐가 달라지는지도 잘 모르겠고.”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아?”
그 말을 하는 반의 손이 준의 허리로 와 그녀를 끌어당겼다.
“왜, 왜……이래요?”
“뭐가 다른지 모른다고 하니, 가르쳐주려는 것뿐이야.”
“말로 해도 알아들어요.”
그래서 지금 말로 설명하고 있지 않느냐며 준의 말에 반박하는 얼굴에 여유 넘치는 미소가 가득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그럼 제 허리에 감고 있는 이 손은 뭔가.
“나는 이런 게 좀…… 어려워요.”
“내가 싫어서?”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속삭이듯 말해도 귓가를 울리기에 충분한 거리에서 아니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참 크기도 하다. 민망함에 맞춘 시선을 피하려고 해보지만 그마저도 제 의지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라 루비처럼 붉은빛 일렁이는 반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낼 뿐이었다.
“아니라니 다행이군.”
몇 번이나 이런 상황에, 준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익숙해지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또래의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지만 그런 가정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말이다.
“지금 반이 비겁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런 상황을 만들고, 준에게 그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준은 승낙한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말 한 필로 함께 왔는데 여기서 나는 당신이 싫다고 말하면 가는 길이 얼마나 찜찜하겠느냐고. 물론 싫은데 일부러 좋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망갈 구석을 남겨줘야 저도 숨을 돌릴 것 아닌가.
“동의해. 하지만 나는 이것보다 더 비겁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기억해둬.”
준의 더딘 적응도, 거리를 두는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그의 경고가 앞으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서로 사랑꾼 자처하며 열렬하기엔 처한 상황이 그리 녹록지 못한 탓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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