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을 피해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던 그녀의 일상은, 그와 마주치고 나서 바뀌게 된다.
고양이의 혼을 가지고 태어난 휘랑에게 그는 치명적인 독과도 같은 사내였다.
처음엔, 원수 같은 사내였고, 사랑할 수도 없는 사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그녀에게 독이고 사랑이 되었다.
조용히 지내던 휘랑을 찾아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하는 유성. 범의 혼령을 가지고 태어나, 필연처럼 운명처럼 그녀에게 이끌려, 찾아내려 한다. 피하고 도망가려는 그녀를 발견한순간, 그는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조금씩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기회를 노린다.
전생의 여인, 그리고 현실의 연인. 그에게 그녀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사랑이다.
-본문 중에서-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유성의 모습에 휘랑은 인상을 썼다. 기념일도 아닌데, 와인 잔 두 개가 나란히 테이블 위에 있었고, 잘 익은 생선이 테이블 위에 있었다. 군침이 돌만큼 맛있어 보였지만, 그녀의 눈에 생선은 보이지 않았다. 휘랑의 눈에 보이는 건, 먹잇감을 기다리는 나른한 호랑이 한 마리뿐이었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마주하는 거.”
차분한 음성으로 휘랑이 말하자, 그가 미소 지었다.
“나도 오랜만이야, 네가 날 보고 화를 내지 않는 건. 예전의 너를 보는 것 같아.”
그의 휘랑이 웃으며 유성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서 있는 곳에 린화의 향이 약간 남아, 휘랑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무관심한 척하려 해도 신경이 쓰이는 린화로 학교에서도 편하게 지낼 수 없었다. 간신히, 경한에게 기대어 숨을 트일 정도로 생활하던 그녀는 린화의 향이 나는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이, 테라스……. 영부인님이 아끼나 봐. 향이 진한 것 같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힘들어.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 정도야.”
“그럼 이렇게 하면, 그 향이 조금 사라질까?”
휘랑이 그를 돌아보자마자 유성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테라스로 오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였다. 차분한 음성에는 지독한 분노가 가라앉아 꿈틀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엔 화를 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린화와 모든 것을 나누었다고 믿는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 씁쓸하지만 기분이 조금은 좋았다.
휘랑은 유성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밀치려 했다. 그녀와 나누었을 키스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그가 린화에게 키스했을 거란 생각이 들자, 없던 힘이 생겨나 그를 확 밀쳐 버렸다.
“싫어! 하지 마. 나는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 싫어.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내 건 내 거여야만 해. 다른 누구 것도 아니라, 내 것!”
“그럼, 날 네 것으로 만들어 보는 건 어때? 그러려고 찾아온 거 아니었어?”
“그렇게 되면 누군가의 소속이 되고, 내 자아가 사라지게 될지도 몰라. 그래서 싫어, 이곳도 당신도 모두 싫어.”
처음부터 해답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 이곳에 와서 더 명확해진 건 당신에게 향한 내 마음이,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거야, 싫다는 게 아니라, 너무나 원하는데 갈 수 없는 심정을 알아, 전처럼 당신에게 안겨서 힘들다고 외치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심정을 알아?
휘랑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미소를 지으며 유성에게 다가간 휘랑이 그의 눈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자신의 손길에 얼굴을 맡기듯 그가 눈을 감자,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마, 그러면 당신을 정말 가지고 싶어질지도 몰라…….
휘랑은 그의 눈에서 손을 떼어 내고 뒤로 돌아섰다.
“어디 가려고?”
조금 전까지 눈을 감고 있던 유성이 그녀의 손을 잡고 돌려세우며 물었다.
“어디든, 당신이라는 해를 보지 않는 곳으로.”
“내 눈을 피해 어디든 간다는 건가?”
“응. 아마도…….”
유성은 휘랑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뛰고 있는 그녀의 심장을 느꼈다. 그를 향해 뛰는 심장을 외면한 채, 어디든 간다고 하는 그녀를 보며 유성은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솔직하지 못한 그녀였다. 변한 게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후, 한번이라도 변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변한 게 없네. 여전히 예쁘고, 솔직하지 못한 아가씨야.”
그의 말에 입을 삐죽 내밀며 그에게서 떨어지려 하자, 손에 힘을 주어 떨어지지 못하게 더욱 꼭 안는 유성이었다.
“놔줘.”
“싫어, 놓으면 영영 가버리려고. 이제는 죽어도 내 뜻대로 하지 않을 거야.”
유성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후, 의자에 그녀를 앉힌 후 와인 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휘랑은 와인 잔에 따라진 와인과 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안 잡아먹어, 그냥 한잔만 할 거니까. 마셔.”
그가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휘랑은 살짝 미소 지으며 와인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부드럽게 입 안으로 감겨들어오는 와인에 긴장이 풀리는 듯 표정이 한층 편안해진 그녀는 그를 나른 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로, 어디든 보내지 않을 생각이야?”
“음. 내 눈에 띄는 곳이라면 보내겠지만, 눈에 안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보내지 않을 거야.”
“나는 들고양이인데.”
“오드아이를 가진, 귀족 고양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 속일 생각 말고.”
그의 말에 입을 삐죽 내민 휘랑이 툴툴거렸다.
“도무지, 다정하지 않은 사나운 맹수인 주제에.”
“쿡, 그런 맹수한테 잡힐 걸 알면서 도망가려는 거야?”
“그거야, 잡히고 싶지 않아서 그랬지, 잡히면 두 번 다시 헤어 나오지 못하니까. 그전에 등을 보인 거야.”
“흐음, 이미 마음은 내게 와 있었고?”
“아니, 그건 아니야. 처음부터 싫었어. 무지하게.”
끝까지 좋다는 말은 하지 않은 채 와인을 홀짝이며 눈앞에 놓인 생선을 집어먹는 휘랑의 모습에 유성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생겼다. 휘랑은 유성이 웃는 모습을 바라보다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고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미리 보기]
“괜찮아?”
집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휘랑이었다. 그가 누구인지, 머리보다 몸이 먼저 기억을 하지만, 말대꾸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오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비틀거리는 휘랑의 곁으로 다가온 유성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부추겼다.
“하아……. 심장이 말을 듣지 않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조금 쉬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운이 날 때까지만 옆에 있어 줄게.”
“으응. 부탁해.”
휘랑을 안아 들고 집으로 들어온 유성은 침대에 그녀를 눕혀 주고 침대 난간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미소 짓는 모습이 안타까워 수건에 물을 적셔 닦아 주기 위해 일어서는 그를 휘랑이 가지 못하도록 옷깃을 꼭 붙잡았다.
“…….”
“대통령, 아니 유성 님아……. 내가 당신이 진짜 싫은 이유 알려줄까?”
“뭔데?”
그걸 당신이 알아내면 좋은데 그러지 않을 것 같아서, 직접 말해 줄게. 그날 밤, 술에 취해 당신에게 입맞춤 했던 것도 진심이지만 피하고 싶은 것도 진심인걸.
“그 이유는……. 정말 두려운 상대가 옆에 있어서야. 아주 오래전에 말이야…….”
휘랑은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며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오래된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유성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예전에 자신의 겪은 일이 떠올랐다.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지켜 주지 못했던 과거가 떠오르고, 마지막으로 여인이 자신을 밀어내는 것까지 다른 부분이 하나 없었다.
“결국, 그 여자는 남자를 떠나지. 왜일 거 같아? 자신이 없어서,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 아니야. 자신 하나로 가족이 몰살당해서야. 혼자 남은 세상에서 남자를 사랑해 봤자, 축복해 주지 않을 테니까. 모두 그녀의 가족을 죄인 취급하는데 축복해 줄까, 그건 아니지. 후훗. 두 번 다시 그런 사랑 따위 하지 않기로 한 여자 앞에 또 그 남자가 나타나다니, 운명인지 필연이지. 우연인지. 무엇이 되었든, 정말 피하고 싶었대. 그런데, 그럴 수 없었어…….”
“왜지?”
깊게 가라앉은 유성의 목소리에 휘랑이 그를 보았다. 그건 나도 모르지, 그 여자가 나인걸, 피하고 싶었는데 왜 피하지 못하는지, 그건 당신이 알지 않을까,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대어본다. 끈적끈적한 자신의 손을 소중하게 감싸는 남자의 온기에 휘랑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몰라, 그 여자가 왜 피하지 못했는지. 알아내는 건 남자의 몫이야. 왜 두려워야 했는지, 정말 지켜 줄 거라면, 남자가 알아내는 게 맞아. 여자는 더 이상 그를 밀어내지 못하니까.”
말을 마친 휘랑이 잠이 들자, 유성은 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그녀와 자신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 정도로 같은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휘랑이인가, 유성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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