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자신이 서 있는 세상에 대한 공허함과,
미래를 보지 않는 눈.

꾸지 않는 꿈과, 한 번도 간절하지 않았던 희망.

“네 말대로 동화 같은 내 세계에서 꼼짝없이 있을 테니까 네가 그 지옥 같은 네 현실에서 기어 나와.”
“뭐?”
“내 세계는 동화 같다며. 그러니까 나한테 와 봐.”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보여 줄게.”
“뭘?”
“내 세계가 얼마나 지옥 같은지. 네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를 바 없다는 거. 도망치고 있는 사람은 너라는 거. 내가 널 따라잡을 수 있다는 거. 전부.”

민준 그리고 선희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중에서-

“15분 지났어.”
15분의 정적이 깨졌다. 휴대폰 시계를 들여다보며 민준이 먼저 말을 꺼낸 탓이었다. 경태 손에 의해 끌려 온 두 사람은 조그마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앉았다. 시계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작은 방. 선희의 갈 곳 잃은 메마른 시선들이 여전히 목적지를 찾지 못 하고 방황했다.
그러니까 경태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재 두 사람은 ‘격리’당한 상태였고 더 정확한 단어를 찾자면 두 사람은 현재 강제로 30분간 ‘대화’를 하라는 벌을 받고 있었다. 물론 말 한마디도 없이 그 반을 흘려보냈지만 현재로써는 그랬다.
“언제까지 그렇게 보고 있을 거야?”
민준의 시선. 그 무게를 참지 못하고 선희가 먼저 입을 뗐다. 이내 민준이 두 입꼬리를 길게 빼어 웃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피하고 있을 건데?”
누군가 아이에게 다가와 유혹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지옥의 한복판에 서 있고 이중 누가 정말 살아 있는 것인지를 파악할 수 없다.
몸을 한 번 움츠린 민준이 다시 길게 목을 빼고 선희를 주시했다.
“당신 변태지?”
“내가 변태 캐릭터는 아니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민준의 기다란 손가락들이 서로 겹쳐졌다. 곧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그만큼 선희와의 거리가 좀 더 가까워졌다.
“미친놈.”
선희의 평소 성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병원 문을 박차고 나가는 편이 맞았다. ‘벌’을 준다는 경태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이 조그마한 방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만한 타입의 사람이 아니었다.
“미친놈은 내가 아니라 너라니까. 그래서 그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서 혼자 울고 있었던 거잖아. 것도 추하게.”
“아니야.”
다만 굳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할 일정한 이유를 찾지 못한 탓이다. 분명히 그 뿐이다. 분명히.
“아직도 그때 그 사람이 본인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은 거야?”
“적어도 울고 있지는 않았어.”
앞으로 쏠려 있던 민준의 무게중심이 뒤로 옮겨졌다. 하얀 테이블 위에 올려졌던 민준의 기다란 팔이 거둬졌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니트의 선들이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미리보기>

1.

소름이 끼쳤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온몸을 타고 돌았다. 조그마한 돌기 같은 것들이 하얀 팔 위로 돋아났다. 피부 아래 깊은 뿌리들을 박고 서 있는 돌기들이 서로에게 엉켜 단단한 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따가움이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세게 감았다. 눈알이 금방이라도 타버릴 것처럼 여리게 진동하며 시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감각들이 눈을 떴다.
아프고 따갑다. 저리고 아프다.
“그래서 지금 뭐가 어떻다는 거죠?”
“검사 결과는 정상입니다.”
다리를 감싸 안으며 터질 듯 타이트하게 조여진 짙은 은색의 레깅스가 천장 위의 조명으로 인해 이따금씩 빛을 냈다. 경숙이 통통한 허벅지를 들어 올렸다. 곧 제 두 다리를 엑스자로 교차시키자 왼쪽 허벅지가 오른쪽 허벅지 위로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안정적이지 못한 각도에 두 다리가 비틀거렸다. 몇 초간 버티는 듯해 보였으나 이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왼쪽 다리가 떨어지며 바닥을 세게 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죠? 정상인 애가 왜 아파.”
의사가 흘러내리는 안경테를 중지 손가락으로 깊게 밀어 올렸다. 그러나 아무리 밀어 올려도 콧잔등에 낀 기름들에 안경테는 제자리에 밀착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마른 입술을 적시고 짧은 틈으로 숨을 내쉬었다. 조그맣고 쫙 찢어진 눈이 주변을 훑으며 방황했다. 의사는 선희 쪽으로 한 번 시선을 주고서 다시 경숙에게로 돌렸다.
“그럼 환자분께서는 잠시 대기실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메마른 의사의 목소리가 채 끝을 맺기도 전에 경숙이 두 팔을 교차시켰다. 풍만한 가슴이 깊숙하게 들어오는 두 팔에 의해 불쑥 앞으로 기울었다. 백태가 낀 통통한 혀로 입술을 쓸어내렸다. 진료실의 공기는 지독했다. 경숙의 커다란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이산화탄소 때문인지 마주 앉은 의사의 콧잔등을 번지르르하게 하는 기름들 때문인지는 몰랐다. 선희는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등을 될 수 있는 만큼 구부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점점 고통스럽게 숨이 막혀 왔다. 익숙한 속도로. 아니. 그보다 좀 더 빠르게.
“얘, 나가지 마라.”
의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경숙이 앙칼진 목소리를 냈다.
“아니 굳이 왜 나가. 선희 아픈 이야기하자는데 선희보고 나가라고 하면 그게 앞뒤가 맞는 거예요? 아니면 나랑 선희 아픈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하자고 그러는 거예요?”
온 얼굴을 뒤덮고 있는 보톡스의 잔여물들이 고스란히 피부 속에 남아 있었다.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이자 얼굴 근육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표정 변화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이마와 입술의 근육들이 같은 방향으로 일정하게 움직일 뿐 미세한 감정들이 드러나지는 못했다.
“설마 나랑 자자고?”
경숙의 목소리가 한숨에 튀어나왔다. 두 손을 책상에 올린 채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던 의사가 등받이로 등을 기대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미간에 짙은 주름이 만들어졌다. 선희 뒤에 서 있던 간호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경숙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경숙의 목소리가 꽤나 컸던 모양인지 진료실 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환자들에게까지 그 소리의 진동이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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