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내년 안에 아이 좀 낳아줘. 화염마법사기만 하면 상관없어.”

“제가 왜요? 전 사랑하는 사람과 상호 동의하에 낳을 거예요.”

“사랑해. 난 너 사랑하니까 너만 나 사랑하면 돼. 알겠어?”

화염마법사 김하나의 인생에 어느 날 갑자기 쳐들어온 서진태. 처음 보는 여자에게 아이를 낳아달라는 참신한 미친놈이라니!

사랑 같은 거 없어도 애는 얼마든지 낳을 수 있다고?

그럼 그런 게 가능한 여자 화염마법사를 찾으시든가!

“어떻게 하면 사랑에 빠지는데?”

“사랑이요?”

“나한테 완전 빠지면 애 낳아줄 거지?”

“그, 그야…… 하지만 저만 일방적으로 하면 안 돼요!”

“아, 나는 널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으니까.”

“거짓말.”

“왜 안 믿어? 그리고 내가 좋다는데 왜 의심을 해? 어? 내가 이렇게 구애하는 거 보면 몰라?”

2. 작가 소개

신서록

집 주변에 사슴과 멧돼지가 삽니다.

기계를 사랑하고 여름에 강합니다.

수중 생물 다큐멘터리를 좋아합니다.

주로 새벽에 글을 써서 서록입니다.

글로 독자분들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3. 차례

1부

#1. 서장

#2. 이상한 남자

#3. 그녀가 사는 세상

#4. 경호인과 피경호인

#5. 꿈과 모험의 나라

#6. 그녀가 세상을 사는 법

#7. 내게 필요한 건

4. 미리 보기

오후 9시였지만 충분히 피곤했으므로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하루다.

쾅쾅쾅!

……라고 생각했던 것은 불과 열 시간 만에 깨졌다. 시끄럽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하나는 비척거리며 억지로 눈을 떴다. 벽에 걸린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봐!”

들어본 적 없는 성인 남성의 목소리다. 하나는 이불로 몸을 칭칭 감고 현관으로 나갔다. 노크하는 걸 보니 강도는 아니겠군, 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지나치게 태연한 얼굴로 밖을 확인했다. 역시나 처음 보는 얼굴이다. 날카로운 눈매와 신경질적인 입매를 가진 남자였다. 문을 열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남자가 다시 한 번 문을 두들겼다. 그녀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총을 숨기고 문을 열었다.

“게을러터졌군. 대체 이때까지 안 일어나고 뭣 하는 거야?”

반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몸을 자연스럽게 들이민 남자는 이불을 몸에 감고 있는 하나와 집 안을 품평하듯 둘러보더니 허락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는 “어, 어.” 하며 남자를 제지하려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슈트를 멋들어지게 입은 그는 어깨가 넓고 키가 커서 짐짓 위협적으로 보였는데 얼굴은 뜻밖에 도시적이었다. 쌍꺼풀이 없는 눈은 날카로워서 가만히 있으면 짜증이 났는지 화가 났는지 가늠이 안 됐다.

그는 부엌 옆의 작디작은 2인용 식탁에 앉더니 “손님이 왔는데 물 한 잔도 안 내와?” 하고 핀잔을 주었다. 하나는 그의 말에 허겁지겁 냉장고에 있는 오렌지 주스를 따라 그에게 내밀었다. 사실 그녀는 그의 태도가 너무 당당해 ‘혹시 이 사람과 친한 사인데 내가 잊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저기…….”

“집 안 꼴이 이게 뭐야? 이건 네 방인가? 아니, 방이 왜 현관이랑 연결돼 있지?”

“워, 원룸이라서 그런데요.”

“원룸?”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원룸의 뜻이 무엇인지 떠올리는 듯했다.

“아, 하나의 방이 독립적으로 있다는 건가? 저기 문밖이 거실인가?”

그는 화장실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나가 “아니요. 저긴 화장실이고요. 집은 이게 전분데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경악스러운 얼굴로 하나를 마주 보았다. 마치 우리 집 개도 이것보다 넓은 집에서 살아,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저, 그런데…….”

하나는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골똘히 생각해보아도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 가지 않았다.

“누구세요?”

“흠.”

그는 품 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식탁에 내려놓았다. 테두리가 금박인 데다 고급스러운 재질이다. 집어서 자세히 보니 ‘써니빌 대표 이사 서진태’라고 쓰여 있다.

‘대체 누구지? 아버지가 이 사람한테도 돈을 빌렸나?’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하지. 8시에 임원 미팅이 있거든.”

“네. 말씀하세요.”

‘대체 얼마를 빌렸기에 꼭두새벽부터 찾아온 거지?’

하나는 걱정이 앞섰다. 앞으로 2년만 더 일하면 될 줄 알았는데…….

“내년 안에 아이 좀 낳아줘.”

“……?”

“대답해.”

그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재촉했다. 하나는 입을 벙긋거렸다.

“뭐, 뭐, 뭘 낳아달라고요?”

그녀는 충격에 말문이 막힌다는 말을 몸소 체험했다.

“애 말이야. 시끄럽고 쨍알거리는 거. 성별은 뭐, 아들이나 딸이나 화염마법사기만 하면 상관없어.”

아들, 딸을 운운하자 그제야 그가 인간의 아이를 낳아달라고 한 게 실감이 갔다.

“누구 애요?”

“뭐? 당연히 내 아이지. 내가 아침 댓바람부터 남의 새끼 낳아달라고 찾아오겠어?”

그는 몹시도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하나는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대체 뭐지? 이 남자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애라고? 애를 낳아달라고? 나한테 애를 맡겨놨나?

수많은 말들이 혀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는 가장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선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려고 노력했다.

“저…… 혹시 저희 아버지와 당신 아버지가 태중 혼약을 했다거나…….”

“뭐? 너와 내가?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그럼 제가 사실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잊었지만 원래 당신이 연인이거나 남편이었다든가…….”

“너 드라마 찍냐? 아침부터 헛소리하지 마.”

으아아아악! 하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대체 뭐야? 나만 이 대화가 이해가 안 되는 건가?

“아니, 대체 제가 왜 당신의 아이를 나, 낳아야 돼요?”

“그야 네가 화염마법사고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 그, 그걸 어떻게…….”

하나는 까무러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뭐, 뭐…….” 같이 바보 같은 소리만 내는데 남자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너 말이야, 초면에 옷도 안 갖춰 입는 건 너무한 거 아냐?”

그가 하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자 그제야 제가 충격을 받아 몸을 감싸고 있던 이불을 떨어뜨렸음을 깨달았다. 속옷만 입고 잠을 자는 버릇이 있어서 그녀의 옷차림은 매우 헐벗은 상태였다.

“꺄악.”

하나는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집어서 다시 둘둘 싸맸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의자를 일으켜 세워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법사라는 이야길 들으니 남자가 새삼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넌 여자 혼자 살면서 남자한테 그냥 문을 열어주면 어떡해?”

게다가 조심성이 없다는 핀잔까지 들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잔소리에 하나는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온 게 누군데. 하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태연하게 제 할 말을 쭉 늘어놓았다.

“너도 알겠지만 같은 속성 마법사끼리 애를 낳아야 부모와 같은 속성의 애가 나오잖아? 내가 말이야, 저번 달에 파혼을 해서 지금 매우 곤란하거든. 한국에선 안 그래도 화염마법사가 별로 없는데 여자는 더더욱 없고. 심지어 내 나이와 비슷한 가임기 여성을 찾는 게 더 힘들거든? 정말 이 잡듯이 이 대한민국을 뒤져서 널 찾아냈지.”

같은 속성의 마법사가 아이를 낳아야 같은 속성의 아이가 나온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그러나 눈치 없이 되묻진 않았다.

“알아보니 은행 부채가 좀 남아 있던데. 만약 나의 아일 낳아주면 부채 전부 탕감해주고 아이가 태어난 후 5년간 매달 일정 금액을 지급하도록 하지.”

진태는 들고 왔던 서류가방에서 빳빳한 종이뭉치를 건네줬다. 맨 위 장에 ‘계약서’라는 글씨가 가장 먼저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계약서에 쓰여 있으니까 확인해보고. 마음 정하면 거기 있는 내 비서의 연락처로 연락하도록.”

하나는 얼이 빠진 채로 계약서의 앞장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는 그녀가 이 계약에 응할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아, 그리고 난 갓 짜낸 오렌지 과즙만 먹어.”

그는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몹시도 신속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끝까지 밉살스러운 한마디를 남기곤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쾅, 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하나는 그제야 멍청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시계를 보니 6시 20분이다. 남자가 온 지 불과 2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뭔가 폭풍우가 몰아쳤던 것 같은데……. 꿈인가……. 꿈인가 보군. 생판 처음 보는 남자가 새벽 6시에 쳐들어와서 애를 낳아달라는 게 꿈이 아니고 뭐겠어?’

하나는 슬리퍼를 직직 끌고 다시 침대로 몸을 던졌다.

‘정말 현실적인 꿈이군.’

그러나 다시 일어났을 때 식탁 위에 계약서가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남자가 꿈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