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은 - 그때부터 녀석은 언제나 내게 길을 만들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힘들지 않도록, 다치지 않도록, 위험하지 않도록, 안전하고 따스하게. 추억이 되어, 따스함이 되어. 처음으로 홀로 겨울을 맞던 그 날에도, 그 추억은 어김없이 나를 보듬어 주었다.

“길을…… 잃었어.”

유선오 -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네가 제일 힘들어하는 순간에 널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 제일 힘든 순간에 날 놓아버리면…… 도대체 어떡하겠다는 건데? 그래, 내가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존재면 좀 더 제대로 날 이용해. 이용하라고 했잖아! 제대로 좀 해봐. 그렇게 놓을 생각만 하지 말고, 힘든 순간에 네 곁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란 말이야! 그 다음에 버리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 지금은 아니야.

“그렇게 찾았던 그 소녀가…… 그렇게 그리워했던 그 소녀가…… 유년 시절 나를 내내 웃게 만들었던 그 소녀가…… 다시 나를 웃게 했어.”

신지훈 - 그때, 그 자리에 함께 서 있을 때 확실히 알았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네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있잖아. 다행인 건데, 내내 바라기도 했던 일인데 이상하게 씁쓸했어. 내 생각이 맞길 바라면서도 틀리길 원했었어.

“그럼 나한테 오던가! 적어도…… 내가 이렇게 힘들진 않겠지.”

차 건 - 고작 4년이잖아? 그래, 그렇게 생각했지. 4년 먼저 네가 태어났을 뿐이라고. 네가 했던 경험, 네가 겪었던 슬픔, 그런 건 그저 다 무시한 채로 그저 숫자 4에 불과하다고. 그런데 아니었어. 4년이 아닌 1440일, 34560시간동안 네가 있었던 세상에 내가 존재하지 않은 거야.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 나보다 널 더 아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싫어? 그런데도 못 받아들이겠어? 대체 얼마나 더 대단한 사람이 나타나야 받아들일 건데? 정신 차려! 누가 혼자야? 널 세상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을 무너지게 하지 마. ……부탁이야.”


-본문 중에서-

“더 좋은 방법을 찾아냈지. 어쨌든 네 앞에 나타날 거 이왕 나타났으니 그걸 더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게 이득일 테니까. 네 첫사랑이 신지훈인 건 참 안타깝지만 네가 그렇게도 찾고 있는 ‘thurs’는 다행히도 나니까 말이야.”
“…….”
“기억해? 찾기만 해도 일에 관한 고민거리 반 이상은 줄어드는 셈이라고 네가 그랬었어.”
“…….”
“내가 필요하잖아.”
“…….”
“그래서 난 그 기회를 이용해볼 생각이야.”
“…….”
“그러니까…….”
녀석의 눈동자에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웃음이 서서히 고이기 시작했다.
“너도 날 이용해.”
단호한 목소리에 아무 말도 못한 채, 녀석의 눈동자를 마주보고만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는 부드러움과 강함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이용?”
잔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계약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녀석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럼 내가 좋아서, 순전히 나 하나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다는 거야? 순간 아주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녀석을 향해 물었다.
“후회…… 안 하겠어?”
내 물음에 녀석은 살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후회라면 이미 그때부터 시작됐겠지.”
“…….”
“내가 신지훈이 되고 싶었을 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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