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나 화내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지? 나 화나면 무서워.”
엄마보다도 더 챙겨주던 녀석이 갑자기 남자를 하겠단다. 세연 역시도 그 놈, 윤호에게 마음이 있지만 생각보다도 더 소중해진 녀석이기에 쉽게 마음을 열어주지 못한다.
“나를,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상처주지 않겠다는 건데 그게 뭐가 나빠?”
하지만, 바람결에 흩트려지는 녀석의 머리칼이, 녀석의 넥타이가, 녀석의 미소가 다시 또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집이 제일 편하다고 주장하는 땅굴녀, 세연.
그리고 이제는 그녀의 엄마보다도 그녀를 더 잘 아는 그 놈, 신윤호, 이제 그만 땅굴녀를 땅굴에서 꺼내기로 마음먹다.


<본문 중에서>

“다리 아파. 발도 아프고. 엄청 아프다. 아파라. 으헉!”
비상등이 켜지자, 어둠 속에 숨어있던 새까만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내 비명소리에 조금씩 꿈틀거리는 까만 물체. 움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니 까만 물체가 고개를 든다. 그러자 놀랍게도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이 떡하니 나타났다.
“시, 신윤호.”
우리 집 앞에 쪼그려 앉아 고개만 든 채, 나를 노려보는 신윤호. 슬쩍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더니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더욱 매섭게 변한다.
“너 지금 몇 시야!”
“야, 사람들 깨. 다 자는 시간에 왜 소리를 질러?”
“그래, 다들 자는 시간에 어디 갔다 이제 와?”
“쉿! 들어가, 들어가.”
문을 열고 잔뜩 심통이 난 신윤호를 밀어 넣었다. 고개를 돌리니 아직까지도 씩씩대고 있는 신윤호가 보인다. 그리고 홱 노려보는 눈길에 움찔대며 움츠러드는 불쌍한 나다.
“넌 애가 왜 그러냐?”
“뭐가.”
“뭐가? 몰라서 물어? 도망을 가?”
“그게 아니라. 당황해서.”
“당황? 너 알았잖아.”
“몰랐어.”
“알았어. 알고 있었어. 너 눈치 채고 있었잖아. 아무리 네가 눈치 없고 분위기 파악 못하고 조금 덜 떨어졌다고 해도.”
“뭐야?”
“내가 한 짓 보면 세 살짜리 꼬맹이도 아, 좋아하는 구나, 라고 생각해. 아니야?”
“…….”
“내가 죽을 때까지 고백 안 할 줄 알았어? 너 결혼하고 애 둘 정도 나면 그 때서야 내가 고백할 줄 알았냐?”
“……너 엉덩이는 잘 털었어? 거기 벌레 많단 말이야.”
신윤호의 매서운 눈빛이 다시 나를 향한다. 그리고는 기가 찬 듯 웃더니 곧 나를 보며 삐딱하게 고개를 튼다. 그리고 서서히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너 왜 그래?”
뒤로 슬슬 물러나니 어째 신윤호의 걸음 보폭이 더 커지는 것 같다.
“야, 너 왜 이래. 신윤호!”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침대에 누워버렸다. 물론, 신윤호에게 갇혀서.
“이, 이러면 안 되지. 너 나 좋아한다며.”
“좋아하지. 엄청 좋아하지.”
“근데 이러면 안 되잖아.”
“왜?”
“너, 너 나한테 엄청 잘해놓고 이, 이런 걸로 점수 깎이면 곤란하지 않겠냐?”
“너 나 놀리냐?”
“어?”
“지금까지 챙겨주고 잘해줬더니 고작 돌아오는 게 고백한 날, 도망가는 거야. 근데 내가 왜 그 방법을 고수해야 하는데. 방법이 잘못 됐다는 걸 깨달았으면 바꿔야 되지 않겠냐?”
“그 바꾼 방법이 역효과일 수 있잖아.”
“아아, 난 꽤나 모험심이 강한 선생이거든.”
“야, 시, 신윤호. 진짜 하려는 건 아니지.”
뜨겁다. 내 손목을 잡고 있는 녀석의 손도, 나를 내리누르는 녀석의 몸도, 내 입술로 내려앉는 녀석의 입김도.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녀석의 얼굴이 점점 숙여져 가까이 온다. 두근거려오는 심장 때문에 제대로 숨도 쉬어지지 않는다. 이대로 있다가 녀석의 입술이 정말로 닿을 것만 같아 최후의 방법을 써야만 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