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살 남자에게 어느 날 나타난 것은 예쁜 여자도 아니고, 돈 주머니를 든 부자도 아니었다. 언제 태어났는지도 몰랐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자신과 너무도 닮은 4살박이 아들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정자은행에서 태어난 이 아이가 온 순간 27년의 인생과 10년 전의 과거의 굴레에서 조금씩 벗어날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27살 남자의 앞에 4살 아들도 모자라 18살 여고생이 짐을 챙겨들고 나타났는데-
“유아센터에서 나왔어요.”
거봐, 호랑이는 아니지만 이 사람도 그다지 양반이 못된다니까. 피식 웃으며 난 예고도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퍽
“꺄악!”
높은 가성의 비명이 들리고 난 눈살을 찌푸리며 약간의 미안함에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갑자기 연 문에 머리라도 박은 모양이다. 난 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의 모습에 천천히 전화기를 내리며 팔짱을 꼈다.
하얀 와이셔츠에 남색 넥타이. 타이와 같은 남색 겉옷과 무릎 위를 조금 올라간 치마. 단정한 구두. 가슴까지 오는 생머리.
“뭐야, 고등학생 아냐?”
아무리 봐도, 눈 씻고 봐도, 다시 봐도 내 앞에 짐 꾸러미를 들고 있는 건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었다.
“꼬마, 이름이 뭐야.”
“네?”
“이름말이야.”
잠시 뜸을 들이는 모습에 난 의아해 하며 고개를 갸웃했고 빨리 말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여고생은 한숨을 푹 쉬며 작게 말했다.
“다음이요.”
“다음에 말고 지금 알려줬음 하는데.”
“아니요, 다음이요.”
“뭐?”
“이다음. 제 이름이에요.”
“아. 이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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