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너는 나를 우선순위 신붓감으로 고려해보겠다, 약조하였다!”

“그때는 자가의 신분을 몰랐기에 그리했던 것입니다.”

“공주면 달라지느냐? 어찌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느냐!”

그대가 다가오지 않는다면 내가 다가갈 것입니다. 법도에 어긋난다 하였습니까? 내게는 그대가 법도이고 숨입니다. 그대가 웃어야 나도 웃고, 그대가 살아야 나도 살 수 있나니. 내일 죽더라도 오늘 후회하지 않고자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갈 것입니다.

“자가와 저는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냉정하십니다.”

“서운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제 마음이 열리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혹여 그런 일이 생겨 자가 외에는 다른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집을 부리면 어찌하시렵니까?”

“그럴 수는 있는 것입니까?”

“다가오지 마십시오. 자꾸 두드리지 마십시오. 품고 있는 감정을 몰아내시고 저에게는 손톱만큼의 마음도 내어주지 마십시오.”

2. 작가 소개

서은수

▣ 출간작

공주, 선비를 탐하다

윈터 블루스

고백의 이유

3. 차례

#9. 달물결 위로 바치는 꽃

#10. 돋을볕이 오실 때까지

#11. 현명한 단념

#12. 은은한 달빛, 빛나는 햇살

#13. 향몽(香夢)

#14.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

4. 미리 보기

화경궁에 들어선 은명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최 상궁에게 장옷을 건넸다. 크게 심호흡하는데 뒤이어 언짢은 기색을 드러낸 서율이 모습을 나타냈다.

최 상궁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대놓고 그 연유를 묻지도 못하고 이쪽저쪽 번갈아 흘끔거리다 난이와 눈빛을 교환했다. 잠시간 공기 중으로 어색한 기운이 퍼졌다. 은명은 그것을 참지 못해 충동적으로 후원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안채에서 후원으로 연결된 중문을 지나 수련이 우아하게 피어난 널찍한 연못가에 멈춰 섰다. 생각할수록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을 오늘에야 만났는데 또다시 꾸지람을 듣고 말았다. 조금은 유해졌나 싶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그가 얼굴을 굳히고 예전처럼 돌아가니 은명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곧바로 뒤쫓아왔는지 김서율이 가까이 다가왔다. 전해지는 기운만으로도 그가 무시무시하게 성이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취연당에 한번 찾아와주지도 않고 지지리 애를 태우더니 이제는 저렇게 화까지 내고 있다.

서운한 만큼 속이 터지지만 별수 없었다. 어떤 식의 인간관계든 안 보면 아쉬운 사람이 참고 져줄 수밖에 없는 게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곁눈질하여 살짝 훔쳐보니 그의 얼굴엔 짙은 먹구름이 끼어 있다. 생각보다 상황은 더 안 좋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은명도 대응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말도 못 하고 노심초사하다간 남은 시간 꾸중만 듣다가 헤어질 게 뻔했다.

우선은 송 판관과의 진지한 대화를 방해한 그를 탓하고, 이후에 너그러이 용서해주는 척 다과를 들며 분위기를 돌리는 게 나을 듯하였다. 은명은 이런 식의 신경전에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그를 돌아보며 최대한 쌀쌀맞게 따지고 들었다.

“이 무슨 무례한 행동입니까. 제가 송 판관께 사과하던 중이었습니다.”

“소신에게 언질을 주셨으면 따로 자리를 마련하였을 것입니다. 꼭 그렇게 송 판관과 단둘이서 만나셔야 했습니까?”

“못 만날 게 무에 있습니까? 송 판관과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요? 화낼 사람은 스승님이 아니라 저입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석 달 만에 만났는데 건강이 어떠한지 묻지도 않으시고 화부터 내시다니요. 모르는 이가 봤다면 속 좁은 질투라도 하시는 줄 알겠습니다.”

“…….”

생각 없이 내뱉은 마지막 말에 김서율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확 달아올랐다. 은명은 실수했음을 깨닫고 입술을 즉시 깨물었다. 그가 저렇게까지 당황스러워하는 건 처음이라 뭔가 제가 크게 잘못한 성싶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비유를 들었나? 마지막 말은 하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가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은명은 위기를 벗어나고자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자가의 말씀이 맞습니다.”

“……!”

그런데 딱 자르며 들려온 그의 대답에 은명은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새까만 먹물로 칠해진 느낌인데 그는 일말의 주저함이 없었다. 붉어진 귓가를 채 추스르지도 못하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게 은명을 다그쳤다.

“송 판관과 단둘이서 마주하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송 판관뿐 아니라 다른 사내라면 누구도 싫습니다. 앞으로는 오늘과 같은 모습을 소신께 보이지 말아주십시오.”

저게 무슨 소리일까. 은명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방금 들은 말이 믿기지가 않아 정수리가 뜨거워질 지경인데 급작스러운 그의 다음 행동에 사고마저 정지된 듯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 김서율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좁혀졌다. 자꾸만 가까이 다가오는 그 때문에 은명은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고 양손이 잘게 떨렸다.

“대답 안 하십니까?”

말 나온 김에 분명히 해두겠다 작심한 사람처럼 서율은 확실한 대답을 촉구했다.

“자가께서는 소신을 연모한다 하셨습니다. 아직도 그러하십니까?”

“……무, 물론입니다.”

“그 말씀이 진정이시라면 앞으로는 소신만 바라봐주십시오. 어떠한 이유에도 공주께서 저 아닌 다른 사내와 단둘이 만나시는 건 절대로 용납지 않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은명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바라고 꿈꿔왔던 일이 지금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목이 꽉 메어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는데 그 침묵을 오해한 서율이 안절부절못했다.

“자가께서 혼란스러우신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 자가와 함께하며 저라고 아무런 감정이 없었겠습니까.”

“스승님…….”

“이 마음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비겁하게도 굴었습니다. 허나 그럴수록 깨닫게 되는 건 오로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떨리는 음성에서, 간절한 눈빛에서, 그의 진심이 전해졌다.

“당신이 웃어야 나도 웃고, 당신이 빛나야 나도 빛날 수 있으며, 당신이 살아야 나도 살 수 있다는 것.”

서율이 한쪽 손을 올려 은명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자가의 귀한 옥체에 함부로 손을 대었으니, 소신은 이제 대역죄인이 되는 것입니까?”

꿈을 꾸는 듯 넋이 나간 은명은 고개만 간신히 가로저었다.

“그럼 이제 소신을 안심시켜주십시오. 저만을 바라보고, 저만을 생각해주시겠다, 그리 대답해주십시오.”

“……예. 그리할…….”

거의 혼절할 것 같았다. 은명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려는데 그의 뜨거운 입술이 부드러운 입술을 단숨에 삼켰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따뜻하고 달큼한 입술의 감촉에 온 세상이 흐름을 멈추고 오로지 감각만이 살아 있는 듯했다.

이러다간 정말 무릎에 힘이 풀릴 것 같은데 한쪽 팔로 은명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그는 깊고 진한 입맞춤을 퍼부어대느라 정신이 없다. 그럴수록 은명은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아득한 상황 속에 눈앞이 어지러우면서도 그의 허리를 꼭 잡고 매달렸다.

그들을 둘러싼 후원의 탐스러운 꽃들이 한여름 오후의 햇살을 받아 점점 붉은빛을 띠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