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화화. 이야기꽃…….”

세 살 때 죽었다 살아난 뒤 대한민국 표준으로 정말 평범하게 살아온 김양이.

어렵사리 취직한 그녀의 첫 직장은 바로 이세계 존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공간, 화화(話花).

이상한 일만 가득한 그곳에서 치명적 매력을 가진 사장님 도는 그녀를 ‘보호’ 해준다는 핑계로 은근슬쩍 자꾸 다가오는데…….

양이는 도에게 안겼다. 가슴이 메어서 터지질 못하는 소리로 사과했다.

“괜찮아. 다 괜찮아. 내가 빨리 찾아주지 못해서 더 미안해. 무서웠지? 아팠지?”

양이는 도의 가슴으로 무너졌다. 떨리는 두 팔로 도를 꽉 안았다. 사과, 변명, 감사, 원망, 사랑, 그중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2. 작가 소개

이재온

행복해지는 이야기,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http://blog.naver.com/kindkit

3. 차례

#42. 카니발

#43. 아름다웠던

#44. 결합의 날

#45. 엇갈리는 진심

#46. 이야기꽃: 개화(開花)

#외전 01. 어느 찐빵 애호가의 우울

#외전 02. 도깨비와 찐빵과 무지개 꼬리

#미주

#작가 후기

4. 미리 보기

맑은 금빛이 어둠을 갈랐다. 별이 날개 얻어 나는 듯했다. 금빛 긴 꼬리는 벽에도 바닥에도 천장에도 구애받지 않고 얼음 대지 밑을 샅샅이 훑었다.

‘김양이.’

빛은, 도는 하나만을 생각했다. 김양이, 제 반려만을 마음에 담았다. 굳이 ‘그 마음이 어딘가로 뻗고 있다.’고 본다면 그 뻗는 방향은 하나였다. ‘찾아야 한다.’ 양이가 어떻게 보호 결계를 풀었는지, 어쩌다 사라졌는지, 어떠한 상태일지, 양이를 찾는다면 혹은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기실 생각할 일이 많았으나 일절 생각을 버렸다.

‘양이’라는 존재에만 집중했다. ‘찾아야 한다.’는 의지만 붙들었다. 그리도 순수했기에 빛은 더없이 밝았다. 걸림 없이 신속히 공간을 넘나들었다.

양이는 어둠 속을 천천히 걸었다. 이쪽 세계 정령 모습이 아닌 ‘인간 양이’ 모습이었다. 치유 주술에 힘입어 겉모습이야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러나 치유력이 충분히 스미지 못했다. 뼈는 헐거워 사소한 충격에도 다시 부러질 터였고 각성으로 새삼스레 인지한 내부는 쑥대밭이었다. 다리를 곧게 펴고 의연히 걷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발을 끌듯 내딛듯 천천히 나아갔다. 어둠을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 오도카니 멈췄다.

맑은 금빛이 벽을 뚫고 나왔다. 금빛은 껍데기를 깨며 터지는 목화솜처럼 검은 어둠을 깨고 확 부풀었다. 양이의 몸을 휘감고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다 푹 줄어들었다. 하염없이 밝고 따스한 덩어리로서 양이의 목덜미를 스치며 휙휙 돌았다.

목덜미를 핥으며 올라가 뺨을 어루만졌다. 공중에서 재주넘듯 핑그르르 맴돌다가 다시 양이의 두 팔을 타고 빙글빙글 내려갔다. 양이의 가슴을, 허리를, 다리를 춤추며 휘돌았다. 자그마한 털 뭉치처럼 보드랍고 간지럽게 양이의 피부를 훑었다. 긴 빛 꼬리를 정신없이 살랑였다.

─ 찾았다! 여기 있었어! 다행이다! 아아, 다행이다! 행복해! 기뻐! 아이, 예쁘다! 사랑해! 안 다쳤을까? 괜찮나? 괜찮은 것 같아! 아아, 진짜 다행이다! 좋아해! 제일 좋아해! 사랑해! 고마워! 고마워! 무사히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 사랑해! 네가 제일 좋아!

지금 도는, 이 금빛은 순수한 정기였다. 껍데기를 버린 도깨비로서의 오롯한 본질이었다. 이 본질에는 거짓이 없었고 예의나 격의도 없었다. 천진난만한 애정과 기쁨만이 가득했다.

빛은, 도는 부풀어 오르고 또 줄어들면서 한없이 포근하고 보드라운 빛을 내뿜었다. 양이를 뱅뱅 돌고 핥고 휘감으며 꼬리 흔들었다. 몇 번이고 쉼 없이 재주넘었다.

─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걱정했어! 보고 싶었어! 기뻐! 행복해!

양이는 가만히 섰다. 눈 감고 빛에 몸을 맡겼다. 어둠 속에서 웬 빛이 불쑥 튀어나와 자신을 희롱하는 셈이었지만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이 빛을 알았다. 익히 알았다. 이 빛이 누구인지 알았으며 제 혼의 고갱이에서 날뛰는 도갑으로 말미암아 이 빛이 제게 다가온다는 사실도 진즉 알았다.

빛이 노래하는 소리 없는 기쁨도 들었다. 제 몸을 안팎에서 가로막던 벽 가운데 내부의 벽이 이미 무너졌고 그걸 수복할 의지도 힘도 없기에 모든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빛이 내뿜는 해맑은 환희와 애정이 들렸다.

─ 아이, 참 예쁘다. 정말 예뻐! 아아, 여기 있었어! 내 소중한 왕비님! 사랑해, 사랑해!

양이는 느릿하게 팔을 들었다. 빛이 휘감긴 팔을 눈앞까지 들었다. 감았던 눈을 떴다. 빛은 찬란하고 또 찬란했지만 물질체라기보다는 정신체였다. 의식을 아찔하게 할지언정 눈을 부시게 하지 않았다. 양이는 떨리는 눈으로 그 빛을 응시했다. 빛은 쭉 늘어나고 확 부풀더니 형체를 갖췄다. 귀와 꼬리가 달린, 진줏빛으로 빛나는 정령이 되었다.

“찐빵!”

화신체가 된 도는 양이의 두 팔을 어루더듬었다. 그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흐읏!”

양이는 도에게 안기며 파드득 떨었다. 속절없이 신음했다.

“앗!”

도는 화들짝 놀라며 포옹을 풀었다. 양이 안색을 살피고 양이의 어깨를, 팔을 매만졌다. 눈을 크게 뜨고 양이를 거듭 살폈다.

“내가 너무 세게 안았어? 아파?”

도는 양이가 절벽에서 떨어졌으리라던 짐작을 상기했다.

‘겉모습만 멀쩡하지 많이 아픈가?’

도는 덜컥 겁이 났다. 연신 양이를 어루만졌다.

“괜찮아? 어디 불편해? 응?”

양이는 통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장자리가 잔물잔물한 눈으로 금세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도를 볼 따름이었다.

“울었어? 많이 울었어? 아팠어? 놀랐어? 응?”

도는 어쩔 줄 모르다가 일단 치유술을 쓰려 들었다. 기력이 바닥을 쳤고 본체도 떨어트려 놓았기에 간단한 치유술조차 수월치 않았다. 양이에게서 손을 떼고 손가락을 꽈서 인을 맺었다. 양이가 팔을 들어 그 손을 잡았다.

“힘, 쓰지 마세요. 몸은 괜찮으니까.”

양이는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입술을 깨물며 젖은 숨을 억눌렀다. 어깨를 뻣뻣이 굳히고 떨다가 물 젖은 소리로 울먹였다.

“왜, 이제야 찾아준 거예요? 그렇게나, 계속 기다렸는데.”

“미안, 미안해.”

도는 양이를 다시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양이가 아파할까 봐 비눗방울이라도 다루듯 살포시 품에 넣었다. 양이의 정수리에, 이마에 정신없이 입맞춤을 퍼부었다.

“미안해, 미안해. 무서웠구나. 정말 미안. 더 빨리 찾고 싶었는데 추적이 잘 안 됐어.”

도는 살며시 양이를 제 품에서 떨어트리고 그 얼굴을 다시 보았다.

“많이 울었어? 눈가가 젖었어. 여기.”

도는 양이의 눈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꽃에 머무는 나비처럼 눈가에 사뿐히 앉았다. 함빡 젖어 조르라니 늘어선 속눈썹 끝에 입술을 스쳤다. 나비가 꽃에서 꿀과 이슬을 취하듯 달콤한 눈물을 받아 마셨다. 눈꺼풀에서 뺨으로, 뺨에서 입술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양이를 찾기만 하면 멋대로 결계를 깬 일이며 겁 없이 물가로 나간 일까지 단단히 꾸짖겠다고 다짐했건만 그런 다짐 따위 싹 잊었다. 양이가 운다는 사실만이 속상했다. 그 마음을 달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했다.

안타까이 한숨 쉬었다. 양이의 뺨을, 어깨를, 등을 쓸었다. 떨리는 그 몸을 살뜰히 보듬었다. 그러다 양이를 제게서 살며시 떼었다. 얼굴을 다시금 확인하고 눈가를 쓸어주었다. 입술에 쪽쪽 입 맞췄다. 또 끌어안고 다독이고, 그러다 얼굴을 보고 거듭 입 맞췄다. 미소 짓다가도 한숨 쉬었고 한숨 쉬다가도 활짝 빛났다.

“죄송, 해요.”

양이는 도에게 안겼다. 가슴이 메어서 터지질 못하는 소리로 사과했다.

“괜찮아. 다 괜찮아. 내가 빨리 찾아주지 못해서 더 미안해. 무서웠지? 아팠지?”

양이는 도의 가슴으로 무너졌다. 떨리는 두 팔로 도를 꽉 안았다. 사과, 변명, 감사, 원망, 사랑, 그중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차마 어떤 말도 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부끄러운 울음을 숨죽여 누르며 다만 느꼈다. 제 혼에 꽁꽁 휘감겨 여기 제 가장 깊숙한 곳에서 몸부림치는 도갑을 감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