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 간의 약속. 깐깐한 남자와 너무도 평범한 여자의 사랑이야기.

어렸을 적부터 할머니를 통해 자신에게 정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현우는 정체불명의 정혼자를 도통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녀 때문에 달달한 연애한 번 해보지 못하고 독신을 고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과 같은 회사에 근무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급기야 한 팀이 된 후로는 상사라는 이유로 아무 죄 없는 그녀를 못살게 괴롭힌다.
오로지 목적은 하나. 악덕상사라는 별칭답게 그녀의 눈 밖에 나기 위해서였다.

상사라는 이유로 매번 당하기만 하던 소라는 자신이 그의 정혼자란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그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최현우- 33세. 한 팀의 실장. 독신주의자. 결벽증을 가진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
소라로 인해 사랑을 싹틔우다.

윤소라- 24세. 최현우의 말단직원. 당차고 강한 구석이 있다.
지극히 평범한 환경의 소유자. 자신이 제일 경멸하는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


-본문 중에서-

‘할 말이 있어요. 끝나고 8시쯤 사무실로 갈게요. 기다려 주세요.’

소라의 메시지를 받은 현우는 가만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가끔 눈을 깜박거리는 것이 다였다. 조은미는 장례식 이후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자 그가 무척이나 어려워졌다. 곁으로 다가가는 것조차 숨이 턱 막혔다. 그것은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여러 날이 지났지만 그는 직원들에게 몇 마디 하지 않았다. 슬픔이 너무 오래가는 듯했다. 평소 알던 현우라면 툴툴 털고 일어나야 하는데 그는 맥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자연 직원들의 사기도 한층 떨어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소라를 떠올렸다. 프러포즈까지 할 정도면 깊은 사이인데 이럴 때 위로나 해주지. 좀처럼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기가 힘이 들었다. 그래서 행간에 떠도는 두 사람의 소문을 점점 믿게 되었다.

8시가 다가오자 소라는 초조해졌다. 그를 만나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가 갑자기 변하니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조용히 대화를 시작할까. 아니면 평소대로 툴툴거리며 성격대로 나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현우의 사무실로 향하던 소라는 사무실의 불이 모두 꺼져 있자 망연자실했다. 그가 메시지를 못 받은 모양이었다. 한순간에 허탈함이 밀려 왔다. 소라는 한숨을 깊게 내뱉고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컴컴한 사무실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그녀가 실망을 하며 문을 닫으려고 할 때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 켜지 말고 들어와요.”
소라는 그가 시키는 대로 문을 닫고 자신의 예전 자리에 가서 앉았다. 창문으로 불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와서 어느 정도는 그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잘 지냈어요?”
“그럼요.”
“사람을 마냥 기다리게 하는 재주가 있네요?”
소라는 그의 얼굴을 대하자 그동안 억눌렀던 속상함이 한순간에 밀려왔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날 기다렸습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우리 그날 이후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어요. 실장님 갑자기 절 피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답답해서 왔어요. 왜 피하는 거예요?”
“할머니 돌아가셨잖아요.”
“그……. 래서요?”
소라는 현우가 왜 갑자기 할머니의 죽음을 얘기하는지 그 의도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나한테 시간을 좀 줘요. 소라 씨 하고의 일은 다시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을 알았어요. 할머니 때문에 소라 씨를 사랑한다고 나 자신을 속였는지, 아니면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소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그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처음부터 사랑 아니었잖아요. 실장님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기다려 줄 수 있습니까?”
“난 어느 정도 실장님 마음 알 것 같은데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요?”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소라의 가슴이 멍울졌다. 한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눈물 때문에 그가 그릇된 판단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껴 있는 반지를 뺐다.
“이 반지 돌려줄게요.”
“아직 나 모른다고 했잖아요.”
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소라는 자신에게 조금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나 이 반지 돌려주고 싶어요. 나중에요. 정말 실장님 마음이 저에 대한 사랑이면 그때 다시 주세요. 그때 받아도 늦지 않아요.”
“……그래. 그렇게 합시다.”
현우는 그녀가 내민 반지를 받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반지에 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