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주인님, 애(愛)란 무엇인가요? 어째서 생겨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심의 근원이란다.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본디 품고 있는 것이지.”

천술사 유가에게 잡혀 그의 비복이 된 요신 홍주. 연심을 품고 상대를 그리며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주인의 곁에서 홍주도 힘을 보태며 지내던 중, 어느 순간 주인을 보면 가슴이 뛰고 있음을 깨닫는데…….

‘주인이 좋다. 그의 비복이라 좋다.’

“자고로 사내가 뭇 여자에게 잘해주는 것은 모두 흑심이 있어서이지. 아무 생각 없이 친절한 경우는 없단다.”

“그럼…… 주인님은요? 주인님도 제게 잘해주시지 않습니까.”

“나는 제외다.”

“어째서요? 주인님도 사내이지 않습니까.”

“내가 나의 것을 중히 여기는 걸 흑심이라고 할 수는 없지.”

“나의…… 것이요?”

“그래. 너는 나의 비복이 아니냐. 내 것이나 다름이 없지. 허니, 너를 보살피는 것은 나 하나면 된다. 알겠냐.”

2. 작가 소개

정혜

착실한 청개구리

▣ 출간작

야차

달콤한 인생(eBook)

몸(eBook)

러브 크라임(eBook)

3. 차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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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5

#6

#7

4. 미리 보기

“워낙에 력(力)이 약해서 긴가민가는 했지. 요신이었나.”

중얼거리는 말에 주섬주섬 팔을 내렸다. 미남자의 힘에 의해 강제로 혼이 신체로 바뀐 것 같았다. 홍주는 떨리는 눈길로 미남자를 올려다봤다. 쓸려나간 야화가 생각났다. 요녀들이 죄다 목이 뽑혀서 죽었다. 미남자는 천술사고, 요녀들은 요신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목이 뽑히는 건가. 미남자가 손을 움직였다.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악. 악…….

허공에 홍주의 목소리가 단말마로 메아리쳤다. 미남자가 가만히 홍주를 내려다봤다. 그저 자세를 바꾸는 중이었는지 팔이 한번 움직이고는 끝이다. 침묵이 흘렀다. 왠지 목이 잠겨왔다. 무서운 가운데 괜히 낯부끄러웠다.

미남자 어깨 언저리를 보면서 생각했다. 요신인 걸 들켰으니 이제 살아서는 못 돌아갈 것이다. 그래도 혼을 불러내어 도망가면 신체로 달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수풀 속에 몸을 숨기면 나무를 타기도 더 수월하겠지. 나무 뒤에 숨어서 올라가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아앗!”

벼락처럼 소리치며 손을 뻗어 저 너머를 가리키자 미남자가 흘긋 고개를 돌렸다. 그 틈새에 다시 혼을 불러낸 홍주는 죽어라 수풀 속을 뛰었다. 밤나무에 다다라 그 뒤를 돌아갈 때였다. 바람이 불더니 수풀이 쓰러져 땅을 드러내고 그 사이에 있던 홍주를 내보였다.

“뭐 하는 거지? 여긴 내 결계 안이라고. 지금 설마, 결계도 안 느껴지는 건가? 터무니없이 약하군.”

미남자가 작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앗 하는 사이에 바람에 잡혀 두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버둥거려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대로 미남자 앞까지 동동 떠갔다.

“흠. 이걸 어쩐다…….”

별로 고민하는 것 같지도 않는 얼굴로 미남자는 말만 그리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둥실둥실 남자를 따라갔다.

“태어난 지 얼마나 되었지?”

“예?”

“요신이 된 지 얼마나 됐냐 이 말이다.”

미남자가 툇마루에 앉으며 물었다.

“2, 200년…….”

“200년! 핏덩어리군.”

미남자가 흘긋 홍주를 봤다.

“어떻게 태어났는지 기억은 하나?”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원래 배골산에 사는 산 다람쥐였습니다.”

홍주는 배골산의 금실다람쥐였다. 형제자매로는 넷이 있었으며 어미에게서 독립할 적에 모두와 떨어졌다. 배골산은 먹을 것이 풍부했다.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다.

여름 끝 무렵과 가을에 바지런히 양식을 모아두지 않으면 한겨울에는 조금 버거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배골산 끝자락에 있는 절에서 가끔가다 도토리나 홍시를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배골산 끝자락에 있는 절은 산 아래 마을에서 유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절을 오고갔다. 하지만 절의 큰스님이 돌아가시고부터 절에는 사람들의 발이 끊겼다. 큰스님은 살아생전 굉장히 존경받는 스님이었지만 시신을 화장했을 때 사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리가 나오지 않았다는 게 소문이 나면서부터는 사람들 발이 끊겼다. 사람들 발이 끊기고 엄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절에서 수행하던 스님들도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나도 그 얘기는 들어보았지. 하지만 배골산의 큰스님은 불덕이 강하신 분이라 사리가 안 나올 순 없었을 텐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미남자가 어렴풋이 보기 좋은 눈썹을 찌푸렸다. 홍주는 목이 떨어져나가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사리는 나왔어요. 다만 뒷산의 고라니가 그것을 먹어버렸습니다.”

모두가 알아채기도 전이었다. 불길 속으로 뛰어든 고라니가 큰스님의 몸에서 나온 사리를 다 먹어치웠다. 그러자 타들어가던 고라니의 몸에 황금빛 새털이 나고, 허물어졌던 주둥이가 갓 태어난 새끼들처럼 반들반들하게 변했다. 그리고 고라니는 배골산의 큰 신(神)이 되었다. 산에 있던 여우와 멧돼지, 호랑이보다도 힘이 셌다.

“그 절에는 자주 갔었나?”

“겨울에는 가끔이요.”

큰스님이 겨울에는 먹이를 구하지 못한 산짐승을 위해 담벼락에 과일이나 곡물을 올려다 주었다. 홍주는 종종 그것을 먹으러 갔었다. 절이 무너지고 나서도 홍주는 절로 갔다. 아직 지붕이 있는 그곳은 추위를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 상 앞에 놓여 있는 공물을 발견했다.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겨울은 추위가 너무 지독하여 먹을 것이 너무나도 없었다. 결국 배고픔을 못 이기고 생쌀을 세 입 먹었다. 먹으면서 죄송하다고 속으로 빌었고, 먹고 나서도 죄송하다고 속으로 말했다.

벌이 내리진 않을까 했지만 벌은커녕 몸이 점점 쌩쌩해져갔다. 칼바람이 불어도 춥지 않았으며 며칠을 먹지 못해도 허기지지 않았다. 나무도 더 잘 타는 것 같았고 아픈 데도 없었다.

“산에서는 왜 나왔지?”

질문에 홍주는 침울하게 그때를 떠올렸다.

“고라니가……. 나무를 타고 있었는데 우연히 고라니와 마주쳤어요.”

홍주를 발견한 고라니가 눈을 빛냈다. 순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은 표독함이었다.

「너도 절밥을 먹었나 보지? 요신이 다 되었군. 좋아. 너를 먹어 내 힘을 더 키워야겠다!」

고라니가 입맛을 다시며 달려들었다. 기겁한 홍주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서둘러 산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다시는 배골산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야화에 가게 된 것이냐?”

“예. 수방 할멈이 저를 길거리에서 발견하여 거두어주셨어요.”

할멈은 살았을까. 그래도 할멈 덕에 요신이라는 걸 알고 이제까지 살아남은 것인데. 그러나 그 착잡함도 잠시, 야화가 요절나던 광경이 뇌리를 스치자 다시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흘긋 미남자를 봤다. 담담한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야화의 요신들을 죽이셨나요? 야화는 이제 사람도 죽이지 않는데…….”

“그 자리에서만 안 죽은 게지. 거기에 들렀다 나온 사내들은 전부 비실비실하여 쉽게 병을 얻고, 쉽게 죽어버렸어. 그것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기엔 좀 그렇지.”

미남자가 부드럽게 말하고 덧붙였다.

“마침 부탁을 받은지라 어쨌든 나도 일을 해결하긴 해야 했고.”

미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침을 꼴깍 삼켰다. 이제 남은 것은 홍주 하나다. 아프지 않게 죽여달라고 청하고 싶은 반면, 이대로 죽는 게 억울했다. 두 손을 부여잡고 외쳤다.

“그렇지만 저는 야화에서 생선만 튀겼을 뿐인데요! 남자 정기는 하나도 빨아먹지 않았습니다.”

“그래?”

“예! 저는 술독만 나른걸요!”

“방금은 생선만 튀겼다고 하지 않았나?”

미남자가 즐거움을 품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홍주에게는 그것이 느껴질 새가 없었다. 당장 저 복도에서 구왕 선비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나타나고, 천장에서는 큰부리 독수리가 내려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술도 나르고 생선도 튀겼는데요. 참말로 그것만 했습니다.”

“흐음. 난감하군. 두희 네 생각은 어떠냐? 이를 어찌 해결하는 게 좋겠느냐?”

갑작스런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궁이 방에서 두희가 차 한 잔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

“요신이라 하여도 부처의 은덕을 받은 몸인데 함부로 대하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할 듯합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색 잔을 미남자의 앞에 두고 두희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돌보던 다람쥐가 허공에 떠서 말을 하고 있는데도 별반 놀라는 기색도 없다.

“하지만 이 요신은 은덕을 받은 몸으로 남을 해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그래도 좋지 못한 생각 같으냐?”

미남자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홍주는 두희를 봤다. 말이 안 통할 때도 잘 돌보아주었는데 사정까지 들은 후라면 살려주라고 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두희가 이윽고 답을 내놓았다.

“생이 넘어가기 전에 업을 갚게 하시지요. 본디 천술사란 멸(滅)보다는 보(補)를 행하는 것에 뜻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미남자가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마치 비파가락 같아 홍주는 잠시잠깐 상황을 잊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야화의 요녀들이 어째서 목이 떨어져나가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남자에게 홀려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미남자가 무릎을 가볍게 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렇군. 네 말이 옳다. 그리되었으니 내 너를 살려주마.”

허공에서 툇마루로 내려앉았다. 홍주는 자신의 의지로 혼에서 신체로 화하여 고개를 숙였다. 다소 앳된 얼굴 아래로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단색의 옷이 겹치는 두 손을 따라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덕을 쌓으며 살아가겠습니다.”

주절주절 내뱉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이 집에서 나가자. 두희야,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이 은혜는 그때…….

툇마루에 내려서려고 다리를 뻗었을 때였다.

“어디 가는고?”

“예?”

화들짝 돌아보았다. 미남자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지금 막 살려주신다고…….”

설마, 벌써 마음이 변한 것인가. 이렇게 빨리? 나뭇가지에서 나뭇잎이 떨어지는 속도보다도 더 빨랐다.

“살려준다 하였지, 보내준다는 말은 아니 했는데?”

“예?”

“업 갚는 조건으로 살려주는 것 아니냐.”

“예에. 그래서 앞으로 덕을 쌓으며 살아가려고…….”

미남자가 빙긋 웃었다.

“부처께 받은 그 큰 은덕을 어느 세월에 되갚겠냐. 여서 내 일이나 도우려무나.”

“여, 여기서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흘 내내 보아왔던 나무 집과 정원이다. 그것은 평범했지만 집주인이 평범하지 않았다. 천술사였던 것이다.

“네 이름이 뭐냐?”

“호, 홍주라 하옵니다.”

미남자가 기분 좋게 웃었다.

“네 이름을 내가 받았으니 이제 태산께 청하여 너를 내 비복(婢僕)으로 둘 것이다.”

기다란 손가락이 허공에서 글자를 하나 쓰더니 손바닥을 뒤집어 호 하고 입바람을 불었다. 앞에서 불어온 바람에 머리칼이 날린다. 깜박 눈을 감았다 뜬 홍주는 원래 없던 금색 줄이 제 발목에 실처럼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앗!” 하며 손으로 더듬거렸다.

그러나 만져지는 것은 없다. 보이기만 할 뿐이다. 줄이 당겨진다. 시선을 따라가자 그 끝에 미남자의 손가락이 있다. 미남자가 웃으며 검지를 흔들었다. 그 끝에 매여 있는 금빛 줄이 출렁이며 홍주의 발목까지 이어져 있다.

“나는 도성의 천술사다. 사람들은 나와 나의 이 집을 일컬어 유가라고 부르지.”

금빛 줄이 점차 흐려지더니 이내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너와 나는 이제 태산의 이름 아래 주(呪)로 얽혔으니 넌 앞으로 내 비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부디 덕 많이 쌓아라.”

해서, 홍주는 유가라고 불리는 이 미남자의 곁에서 비복 노릇을 하며 살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