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2008년 종이책 출간작품입니다.

“그 사람은 상처를 잊게 해 줘요.
상처가 나아지는 약이 아니라 감싸주는 밴드 같은 사람이에요.
약은 쓰잖아요.”

날카로운 것만 보면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선단 공포증.
과거의 기억이 그녀를 꽁꽁 옭아맨 순간,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되고 말았다.
가장 좋아하는 그림조차 그리지 못한 채,
하루하루 움츠리고 살아가는 그녀에게 어느 날 그가 선뜻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내 직업이 스턴트맨인데 다치는 게 겁 나.
일을 시작하기 전에 당신 얼굴이 떠오르고
당신 때문에 다치지 말자 다짐하면서 촬영에 들어가게 됐어.”

한 번도 누군가를 이렇게 마음에 품어본 적은 없었다.
그 이유가 그녀의 자리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보고 싶고 생각나고 걱정되는 마음에,
한 번도 다치는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무사히 촬영이 끝나면 그녀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본문 중에서>

“뭘 어떻게 해 준다는 거예요? 그냥 날 나가게 해 주면 되잖아.”
나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물을 참으려는 그녀의 눈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언제나 질 수는 없잖아요. 무섭다고 계속 피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 생각은 파이터인 당신한테나 해당되는 말이고요. 맞서 싸운다고 내 병이 낫는 건 더더욱 아니라고요.”
“사람들이 내 직업을 들으면 첫마디가 뭔지 알아요? 내가 스턴트맨이라고 하면 ‘어?’ 하고 놀라고는 ‘그 직업 위험하지 않아요? 매일 다치죠. 힘들지 않아요? 그 위험한 일을 왜 하는 거죠?’ 예요.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조차도 날 이해하지 못하니 처음 안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죠. 그래서 난 강나연 씨 마음 이해해요. 다른 사람들은 ‘그까짓 거 뭐. 이상한 사람 아니야? 그게 왜 무서워?’ 할 테지만 본인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힘들겠죠. 그런 일을 왜 하냐고 사람들이 묻지만 나한테는 소중한 일이고 지키고 싶은 내 직업인 것처럼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보고 만져도 누군가에게는 폭탄보다도 무서운 무기로 보이는 그 마음, 전부는 아니겠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 * *

“난 지금 너한테 강나연이라는 여자가 유창기라는 남자한테 너무 큰 존재가 돼 버렸다고 얘기하는 거야. 네가 도망가도 내가 쫓아가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솔직히 말하는 거라고. 하지만 네가 그냥 있어 줬으면 좋겠어. 널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반말에 놀란 건지 그가 하는 말들에 놀란 건지 나연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막연히 두렵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창기 씨, 후회할 거예요. 내 병 내가 잘 아는데 사람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 줄 알아요? 모르죠? 경험 못 해 본 사람은 모른다고. 내가 왜 친구들까지 피하는데. 다른 사람들 피곤하게 하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건데 이런 내가 남자를? 말도 안 돼. 솔직히 말할게요. 창기 씨 좋은 사람이고 무엇보다 만나면 편해요. 그래서 그냥 지금처럼이라도 만나 가끔은 나도 즐거워지고 싶은 욕심 많아요. 그냥 딱 그렇게만 만나면 안 될까요? 너무 가까이 말고 서로의 인생에 깊게 들어가지 말고 그냥 지금처럼만 나도 사치 좀 부리면 안 될까요?”
초여름의 날씨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온몸에서 나는 열이 날씨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에게 중요한 사람이 된다는 거 부담스러워요. 내 스스로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데 나도 아기가 아닌 이상 받을 수만은 없잖아요. 하지만 난 지금 다른 사람에게 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희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굳게 닫혀만 있던 나연의 마음이 조금은 열려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그는 좀 더 나연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 이유라면 힘들지 않게 할게요. 내 욕심 안 부릴게. 천천히 지금처럼 천천히만 다가가게 해 줘. 딱 지금처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