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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음악, 첫 사랑.
가슴을 간질이는 설레임, 가슴 벅찬 황홀함.

주위에 별 관심이 없던 열 일곱 여고생의 마음을 홀린 성인 남자는 봄과 함께 왔다가 봄과 함께 갔다. 연두빛 바람도, 꽃향을 머금은 햇살도 아무런 의미 없던 몇 번의 봄이 지나고 그를 다시 만났다.

여전히 그는 봄을 닮아 있었다.

-본문 중에서-

봄 빛에 반짝이는 그의 머리카락이 그 열어놓은 창문을 타고 들어온 봄바람에 사르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에게서는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일정한 박자로 하얗게 피아노 덮개 위로 흩어지는 입김만이 그가 잠들어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자리에 박힌 듯, 꼼짝없이 그를 바라보던 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자각했다. 몸을 돌리기 위해 오른 발을 뒤로 뺐다. 그 때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까맸다.
“뭐야, 너.”
잠에서 바로 깬 탓에 약간은 갈라졌으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목소리.
“누구냐고, 너.”
“이 학교 학생인데요.”
깊고 날카로운 눈매와 콧날, 턱선이 그를 냉정하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그의 목소리가 더욱 그렇게 그를 만들었지만.
그는 내 대답에 나를 가만히 보더니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났다. 드르륵하는 소리가 제법 컸다. 그는 내게 등을 보이고 저벅저벅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느린 춤을 추고 있는 커튼 자락을 한 손에 모아 쥐었다.
“신입생?”
“네.”
커튼 자락을 묶는 그의 손의 움직임이 그의 얼굴만큼이나 단정하다.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난 내 앞에 바로 마주 한 그를 고개를 들고 올려다봤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미간을 좁히고 바라보는 곳은 내 가슴팍이었고 난 품 안의 피스와 플롯을 조금 더 모아 그의 시선이 닿고있는 가슴팍을 가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더 먼저였다. 탁, 하고 그가 가볍게 내 팔을 쳐 냈다.
“전이은?”
“…….”
내 명찰을 보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귀에 닿자, 내 자신이 스스로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은 동요를 눈치 챈 그가 픽, 하고 웃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그 자리에 세워두고 다시 그가 앉아있었던 스타인웨이로 돌아갔다.
그는 자연스레, 마치 손에 익은 자신의 악기를 다루듯 피아노의 덮개를 열었다. 햇살가루가 눈부시게, 52개의 하얀색, 검정색 건반으로 쏟아졌다. 한 음, 한 음 그가 눌렀다. 사랑하는 연인의 뺨을 어루만지듯 건반을 터치하던 그의 손가락이 조금씩 달리기 시작한다. 이내 자유롭게 건반들을 넘나드는 그의 손가락 끝.
봄바람의 움직임을 따라 그 소리를 따라, 스타인웨이가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