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사랑이 배신으로 한 순간에 무너지고 정아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못한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고 감싸주는 남자 종현, 그들의 미묘한 사이를 어떻게든 무너뜨리려는 한성……정아는 처음부터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이정아, 그녀에게 사랑은 아픔일 뿐, 다시는 상처 받고 싶지 않아.
김종현, 이정아, 난 네가 참 좋다.
그에게 사랑은 언제나 한 사람 뿐, 이제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아.
최한성, 달콤했던 배신의 최후는 쓰라린 고통 뿐, 하지만 내게서 벗어날 수는 없을 거야.
<본문 중에서>
참으로 풍만한 가슴을 가진 아이였다. 많이 되어 봤자 이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무엇이 그리도 당당한지 고개가 꺾어질 정도로 뻣뻣하게 치켜들고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미친놈, 어디서 만나도 저런 핏덩이를…….’
저절로 욕이 새어 나오며 어이없어 정아는 피식 웃어 버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웃을 수 있냐며 은수는 그녀를 살짝 노려보지만 이내 레이저라도 쏘아 버릴 듯 강렬한 그녀의 눈빛을 마주 보지 못하고 눈길을 피해 버린다.
“그래서 잤어?”
한성과 자신은 사랑하는 사이라며 그러니 이제 좀 꺼져 달라고 대놓고 얘기한 은수에게 정아가 뱉어 낸 첫 마디…… 오히려 당황한 건 은수였다.
‘저 여자 보통이 아니네.’
“잤다면요?”
“…….”
정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은수는 그런 정아를 보자 어쩐지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그럼 그렇지. 당신도 여잔데 남편이 딴 여자랑 잤다는 얘기를 듣고 아무렇지…….’
은수의 비웃음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너 사랑한대?”
“…….”
이번엔 은수가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움찔했다. 그와 한 수 많은 잠자리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해달라며 수백 번도 더 애원했지만 그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그것까지 나한테 바라지 마라. 너 만족시켜 줬으면 됐잖아.]
은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정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지만 어쩐지 붉어진 두 눈은 금세
눈물이라도 떨어뜨리어 낼 것 같다.
“그럼, 그 말 듣고 나거든 다시 와.”
정아는 말 안 해도 알겠다는 표정으로 조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데 그것도 저보다 새파랗게 젊고 예쁜 여자랑 피웠다는데 아무렇지 않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오라니…….
‘저 여자 미친 거 아냐?’
은수가 당혹스러움에 금세 새빨개진 얼굴을 잠재우려 손으로 열심히 부채질하고 있을 때 서늘한 그녀의 입김이 은수의 귓가를 차갑게 파고든다.
“절대 쉽지 않을 거야. 잘해 봐.”
비웃는 정아의 나직한 목소리가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하게 온몸을 휘감았다. 은수의 작은 어깨를 꽉 쥐었다 놓은 정아가 낮은 웃음을 흘리곤 유난히 또각거리는 걸음으로 커피숍을 빠져나가자 그제야 잔뜩 움츠렸던 가슴을 편 은수가 이유 모를 떨림에 다시금 온몸을 웅크려 앉았다.
다른 여자의 남자…… 그리고 그의 숨겨진 여자라는 타이틀을 더 이상 도저히 참아 줄 수가 없어 한성에게는 얘기도 없이 무작정 그의 아내를 찾아왔지만 순간 큰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저 무서운 여자가 오늘 밤 당장이라도 한성에게 따지고 든다면 분명 그는 자신을 떠나려 할 것이다. 최한성 그가 아직 저 여자를 버릴 수 없다는 걸 잘 아니까…….
***
“자기야, 오늘 힘들었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한성의 다정한 말투와 살갑게 어깨를 주무르는 그의 손길이 소름 끼친다. 저 손으로 다른 여자의 몸뚱이 또한 주물럭거렸을 거라 생각하니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뺨을 힘껏 때리며 이혼하자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지금 섣불리 자신이 뼈저리게 느낀 배신의 감정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는 이유는 그 어린 여자애에게 한성을 쉽게 보낼 수 없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여자애의 말 한마디에 없어질 감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정아에겐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결정을 해야 했다. 그게 어떤 식의 결정이든 아마도 그녀는 절대 후회하지 않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괜찮아.”
한성은 자신의 손을 밀어내는 정아의 손길에 당황한 듯 얼굴색이 변했다. 한 번도 그의 손길을 거절한 적 없는 정아였다. 오히려 그가 살갑게 대할 때면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제 볼을 쓰다듬어 주곤 했었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 그녀의 손길이 얼음장처럼 차다.
“자기 오늘 밖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왜?”
“그냥, 자기가 좀 달라 보여서…….”
“그런 거 없어. 좀 피곤하다. 나 씻고 나올게.”
“응. 그동안 난 저녁 차려 놓을 테니까 얼른 나와.”
쪽 소리가 나게 정아의 볼에 입 맞춘 한성이 콧노래를 부르며 능숙한 솜씨로 앞치마를 매더니 냉장고를 열고 요리할 재료들을 꺼내어 놓는다. 요리를 좋아하며 제법 맛을 낼 줄 아는 한성은 정아가 피곤해 보이면 종종 그녀를 위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곤 했다.
경제적인 능력과 가끔 철없이 굴 때만 빼놓고 본다면 그는 그녀에게 일등 신랑감이었다. 정아에게는 없는 애교로 마음을 살살 녹이는 것도, 언제나 정아를 중심으로 모두 맞춰 주려 노력하던 모습만으로 그녀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아니었나 보다. 도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이유를 모르겠다. 조금은 무뚝뚝했지만 최선을 다해 한성을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욕실로 들어선 정아는 그대로 주저앉아 한성의 체온이 남아 있는 그녀의 오른쪽 볼을 세차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더럽다. 아직 그의 말을 들어 보지 않았기에 멋대로 지껄이던 그 여자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자신을 타일러 보지만 이미 머릿속에 그려지는 온갖 상상들이 그녀를 미치게 했다.
절대 울지 않을 거야! 입술이 터져 비릿한 맛이 느껴지지만 정아는 울지 않기 위해 악문 입술을 절대 놓지 않았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울음을 더 이상 막을 수가 없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물을 세게 틀어 놓는 것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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