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기사, 병원으로 가세.”
“예, 사모님.”
글로벌 메디컬은 각종 양약과 한약은 물론 다양한 의료 기구까지 생산하는 국내 제일의 제약회사였다. 호구는 글로벌 메디컬의 창업주이자 회장의 집에서, 일 년쯤 전부터 지인의 소개로 여러 가지 잔심부름과 운전기사 일을 하고 있었다.
“처는 좀 어떤가?”
“…….”
대답 대신 그저 긴 한숨만 토해 놓는 호구를 뒷좌석에서 지그시 보던 김 회장의 부인 박씨가 다시 말을 이었다.
“중환자실 병원비가 상당한 부담일 텐데.”
“예……. 그래도 사모님께서 도와주셔서 일부는 해결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도 몹시 안타깝네. 자네 처의 일은. 하지만 마음을 굳건히 가지게. 인명은 재천이라니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우리 근호만 해도 그렇고…….”
근호는 김 회장의 전 부인에게서 난 장남으로, 두 달 전의 교통사고로 식물인간 상태로 와병 중이었다. 김 회장의 자식은 모두 다섯 명으로, 그렇게 비운의 사고로 입원한 전처소생 근호를 비롯해 결혼해서 외국에 살고 있는 그의 누나, 그리고 두 번째 부인 박씨 소생인 두 아들과 딸이 있었다. 큰아들의 불의의 사고로 인해 김 회장이 받은 정신적 충격은 엄청났고, 지금은 잠시 휴식 차 미국에 있는 딸에게 가 있는 상태였다.
근호의 아내이자 큰며느리가 되는 강씨는 해산을 앞두고 있었다. 지금 박씨를 태우고 호구가 향하는 곳은 강씨가 입원해 있는 병원이다.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김 회장의 장남이나, 그런 남편의 2세를 뱃속에 잉태한 채 출산을 준비해야 하는 강씨나, 호구 자신의 아내나, 너무도 젊은 나이에 잔혹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 가여운 사람들이었다.
“후…….”
탁한 한숨이 그의 입술 새를 비집고 흘렀다. 병원으로 향하는 호구의 마음은 바윗돌이 짓누르는 듯 착잡하고 무겁기만 했다. 아직 정확하게 김 회장의 호적에 며느리로 이름조차 올라 있지 못한 강씨는 사실, 호구의 절친한 친구 최경태의 옛 연인이었다. 그러나 골프장 캐디로 일하던 그녀가 우연히 김 회장의 아들 근호와 사귀게 되면서 경태와는 멀어졌다.
근호는 강씨의 집안에는 상관없이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기에, 경태는 마음은 아팠지만 조용히 행복을 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보잘것없는 집안의 여자를 며느리로 들이려 하지 않은 김 회장의 반대에 부딪쳤고 결국 둘은 부모의 허락을 받기 위해 덜컥 아이부터 가져 버렸다. 그렇게 차츰 시간이 지나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서서히 김 회장의 마음이 돌아서는 참에 결혼 날짜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사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장 기사.”
“예, 사모님.”
“아이가 아직 젖먹이지?”
“……예.”
“아이가 정말 가엾군.”
“…….”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룸미러에 비친 박씨의 얼굴에 무언가 심각한 고민의 빛이 서렸다.
“자네 처를 돌려보낼 때까지의 병원비와 자리 잡을 수 있는 밑천을 마련해 주겠네. 자네 꿈이 체육관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
호구의 숨결이 일순 거칠어졌다. 긴장감에 입술이 바짝 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본능적으로 지금 박씨가 내놓으려는 말이 힘들고 어려운 부탁일 것이란 예감이 스쳤다. 그는 잠시 호흡을 멈춰 잔뜩 청각을 곤두세우곤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자네 친구와 그 아이가 서로 사귀던 사이라는 걸 알고 있네.”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그 말속에 박힌 가시는 몹시도 뾰족했다.
“……사모님!”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외쳤다. 등골에 서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다음에 이어질 말이 어떤 것인지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러자 꼭 죄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쿵쿵거렸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난 그 아이 몸속에 들어 있는 아이를 근호의 씨앗이라고 인정할 수 없어!”
단호하고 날카로웠다. 안경 너머로 번득이는 박씨의 두 눈에는 싸늘함만이 가득했다. 기가 막혔다. 아니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가당치도 않은 말을 할 수가 있냐 따지고 싶었지만 그는 차마 입 밖으로 쏟아 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렇게 억지를 쓰는 박씨의 의중이 무엇인지 훤히 꿰뚫어 보였지만, 엄마 없이 남겨질 어린 세진과 자신의 고단한 현실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사산한 걸로 처리할 거야. 오늘 수술하면 자네가 알아서 처리해 주게. 자넬 죽 지켜봐서 허튼소리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하는 것이야. 그 아이는 오늘 태어나자마자 죽은 거야. 알겠나?”
“사……모님……. 아무리 그래도 사람 목숨을 어떻게…….”
“훗,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러서야 되겠나…….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네. 영아원이든 고아원이든 자네가 알아서 해. 사례금은 자네 통장으로 오늘 당장 이체해 줄 거야.”
“……!”
정말 끔찍한 결론까지는 가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강씨와 김 회장의 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도 아릿했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자신의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남기고 싶어 하는 박씨의 탐욕에 호구는 일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아리고 쓴 물이 입 안을 가득 적셔 들었다.
가난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게 꽃 같은 아내를 잃어야 하는 상황까지 왔어도 아직 자신은 정신을 못 차린 걸까. 저렇게까지 해서 돈의 노예가 되고 싶진 않았다. 돈이란 그저 꼭 필요한 곳에, 써야 할 곳에 쓸 수 있을 만큼 있으면 족하다 생각했는데……. 저렇게 모든 걸 다 거머쥐고도 더 많은 것을 쫓다니.
“자네완 오늘 여기서 본 게 마지막이라 여기고 싶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또다시 마주치는 일이 생겨선 안 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