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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 엉뚱 발랄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오희수의 눈에 띤 지하철 스펙남 강한결. 한국사람 유전자로는 불가능한 키와 몸매, 거기다 은근 따듯한 인간성까지. 출근 시간 단 몇 분, 그를 보기 위해 새벽잠을 설치며 지하철역에서 기다리기를 몇 달.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희수에게 다가온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그리고 일사천리 진행되는 희수와 한결의 사랑은 달콤하며 진취적이기까지 하다.

-본문 중에서-

오직 그분과 같은 시간에 지하철을 타겠다는 일념 하에 아침 식사도 가방 안에서 뭉그러져 가고 있을 바나나로 만족하고 목숨줄 같은 화장까지도 포기하고 이렇게 오매불망 정신없이 뛰어왔건만 정작, 임은 어디에 계신 건가요?
‘어제 아침에 큰 가방 안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딜 갔나?’
그 사람과 함께 탔었어야 할 지하철은 이미 도착하여 승객들을 꽉꽉 채우고서 출발을 해버렸다.
‘어딜 가면 간다고 미리 사인을 보내든가, 늦으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신호를 보내든가! 왜 사전 약속 없이 안 나타나는 건데!’
희수가 왠지 모를 실망감과 짜증스러움 허전함 외로움, 그러니까 말하자면 데이트 약속에 지각한 남친에게서나 느낄법한 그런 말도 안 되는 감정을 마구 혼자 뒤집어쓰며 계단 위쪽으로 무심코 눈을 돌렸는데, 옴마나, 그 사람이 조금 급한 발걸음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순간 조금까지의 짜증과 실망감은 대번에 날아가 버리고 그저 너무 반가운 마음에 희수는 본인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눈 똥그랗게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바로 아뿔싸, 이런 미친…… 당황스러움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나름 자연스러운 손동작으로 연결해 머리띠를 잡아 머리에서 풀어 다시 밀어 올리면서 몸을 반 바퀴 정도 돌려 돌아서긴 했지만 찌푸려진 두 눈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친, 미친, 미친, 이런 똘아이, 아 쪽팔려…… 봤을까? 눈치 챘을까? 아 미쳐, 미쳐, 미쳐…….’
정말 당장 지하철 선로로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무안한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차마 그 사람 쪽을 볼 수가 없어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며 벤치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양 볼에 바람을 넣고서 입을 오물짝거리며 애꿎은 치맛단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왼쪽 옆자리에 누가 와서 앉았다. 눈길도 주지 않고 그냥 버릇처럼 오른쪽으로 살짝 반 발자국 움직여 앉는데 아래로 내리 깔은 희수의 눈앞에 핸드폰 하나가 왼쪽으로부터 쓱 들어왔다.
‘이건 또 뭔 개수…….’
이것저것 여러 가지의 짜증스러움 한꺼번에 밀려와 살벌한 칼눈을 치켜뜨던 희수의 눈이 위로 위로 향해 그의 눈과 마주쳤다.
“흐어억, 켁켁.”
너무 놀라 침까지 잘못 넘어갔는지 사레가 걸려 한참을 켁켁거린 희수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스펙남은 한 손으로 코를 만지는 척하며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희수가 켁켁거림을 멈추자 다시 핸드폰을 쓰윽 들이밀었다
“그쪽 번호 찍어요.”
그 말을 희수가 이해하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제 번호를…… 요?”
희수의 물음에 그 사람은 그냥 어깨만을 으쓱했고, 잠시 머뭇거리던 희수는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그 사람의 핸드폰 끝을 조심스럽게 잡아 받았지만 다시 그 사람의 얼굴을 흘낏 올려다보았고 그 사람은 턱짓으로 번호 찍으라는 말을 대신했다.
‘아이 증말, 얘는 뭐 턱짓 하나까지 이렇게 섹시한 거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체 일단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찍으면서도 희수는 스펙남의 간단한 턱짓 하나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었다. 번호를 찍고서 다시 손가락 두 개로 조심스럽게 전화기를 건네주자 그 사람이 저장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이름.”
스펙남의 질문에 희수는 자동적으로 ‘오희수’라고 대답했다.
“잘 한다 응? 왜, 그냥 내 이름은 쉬운 여자요 그러지 응?”
그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단번에 대답한 것에 조금 무안해하고 있는데 희수의 전화가 핸드백 안에서 진동을 했다. 핸드백을 열어 핸드폰을 꺼내니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강한결.”
‘아, 그러니까 니 이름이 강한결이다, 이거지 지금. 그 이름으로 이 번호를 저장을 해라, 이 말씀인 거지 지금?’
번호를 저장하면서도 희수는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좀 얼떨떨했다.
‘도대체 스펙 군이 왜 내 번호를 따는 것이며 왜 나는 마치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이렇게 스펙 군의 번호를 내 전화기에 저장하고 있는 것이지? 뭐지 이거?’
일단 전화번호를 저장하기는 했지만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머뭇머뭇하고 있는 사이에 지하철이 도착했다. 벤치에서 일어나 지하철문 쪽으로 걸어가며 스펙 군이, 아니 이제는 강한결 군이라 해야 하는 건가.
“저녁에 시간 되요? 밥이나 같이 먹죠.”
마치 가나다라 다음은 마바사아입니다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졌다. 바쁘게 내리고 타는 사람들 사이로 일단 지하철에 올라타 자리를 잡느라 미처 대답할 여유가 없었던 희수가 정신을 차리고서 오른쪽 왼쪽을 휙휙 보는데 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가만있자. 이게 지금 도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인 거야?’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잠깐 동안 방금 일어났던 일을 정리해 보고 있는데 머리 위쪽에서 ‘훗’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몸을 홱 돌려 보니 그 사람이 희수 바로 뒤에 서서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희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히 무안한 생각에 새침한 표정으로 한번 째려주고는 다시 앞쪽으로 돌아섰지만 바로 뒤에 그 사람이 서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신경이 쓰였다. 결국 내려야 할 역까지 가는 동안 정말 숨 한번 크게 못 쉰 채로 꼼짝 마 자세로 뻣뻣하게 서 있었고 문 쪽으로 몇 발짝 걸어가는 걸음마저도 몹시 부자연스런 걸음으로 걸었던 것 같다.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었는데 내릴 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 있던 자리를 살짝 돌아봤더니 그 사람이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해 귀에 대고서는 씨익 웃었다.
희수는 그냥 못 본 척 하며 지하철에서 내려서 얼른 종종걸음으로 걸어 기둥 뒤에 가서 숨듯이 서 있다가 문이 닫힌 지하철이 출발한 후에야 천천히 쭈그려 앉아 무릎에 머리를 기대었다. 심장에서 출발한 혈액이 머릿속으로 올라가며 마치 귓속으로 터져 나오기라도 할 것 같아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상관없이 그렇게 한참을 앉아 진정을 시켜야만 했다.

<미리보기>

[뚜우, 뚜우, 뚜우, 뚜우.]
핸드폰 알람이 울리자 희수는 눈을 감은 채로 잠금 해제를 하고는 베개를 집어다 머리 위에 덮었다.
‘5분만 더…… 딱 5분만……아주 딱 5분…….’
어제 그놈의 소설책을 읽고 자는 것이 아니었다. 몇 장 안 남은 것 같아 끝내겠다고 붙들고 있었던 것이 새벽 두 시를 넘기고서야 잠자리에 들었고, 주인공 남녀의 연애놀이에 괜히 심술도 나고 부럽기도 하고 암튼 온갖 심란한 생각에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하다 간신히 몇 시간 눈을 붙인 탓에 오늘 아침 희수는 빨딱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얼마 후 갑자기 눈을 번쩍 뜬 희수, 머리를 덮고 있던 베개를 집어 던지고서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악!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내가 미쳐 미쳐 미츠어어!”
딱 5분만 더 잔다는 것이 30분을 더 자버리고 말았다. 이불을 발로 막 걷어차 버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뛰어가던 희수가 잠시 멈칫했다.
“5분, 5분이면, 뭘 포기해야 하지?”
시간을 맞추려면 5분 안에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럼 희수는 아침에 하는 준비 작업 중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잘 나눠서 포기할 건 포기하고 지킬 건 지켜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희수의 머릿속에서 차르르르 하며 마치 슈퍼컴퓨터가 돌아가는 소리라도 들릴 듯하더니 삽시간에 준비해 필요한 작업 리스트를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 두 분류로 나누기 시작했다.
필요한 것 : 샤워. 머리.
원하는 것 : 화장, 아침 식사.
샤워. 어차피 세수는 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이 납작 새집머리로 나갈 수는 없다. 화장, 회사 가서 하면 된다. 아침 식사, 마침 어제 사다 놓은 바나나가 있다. 오케이, 그럼, 샤워 2분, 머리 말리는 데 1분, 옷 입는 데 1분 30초, 식탁 위에 바나나를 집어 들고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고 뛰어나가는 데까지 30초……. 가능하다, 할 수 있다.
그 멈칫한 단 1초 사이에 희수의 머리가 많은 가능성과 장단점들을 초단위로 계산해 내었고, 다시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물 흐르듯 하는 동작으로 샤워기 물을 일단 틀고서 잠옷과 속옷을 훌러덩 벗어 던진 후 칫솔에 치약을 묻혀서 샤워기 밑으로 들어가 광분의 칫솔질을 시작하였다.
“으아아악! 오 쉩 오 쉩!”
아직 물이 채 따듯해지기 전이라 갑작스런 찬물의 충격에 희수의 입에서 격한 발언들이 치약 거품을 튀기며 쏟아져 나왔다. 샤워기 물로 입 안을 헹궈내며 칫솔은 일단 싱크대 쪽으로 아무렇게나 던졌는데, 젠장…… 변기로 떨어진 것 같다…….
“에라이, 십팔 년을 우려먹을 쌍화차 같은 칫솔아!”
다시 격한 발언들을 쏟아 내었지만 칫솔이야 집에 오는 길에 사면 된다. 참자, 참고 머리 감는 데 집중하자. 5분만 더 자겠다고 게으름을 피우다 이 난리를 치르고 있는 자신에게 벌을 주기라도 하는 건지 희수가 손톱 끝을 마구 세워 두피를 다 벗겨 버리기라도 할 듯 머리를 감았고 또 빛의 속도로 몸에 비누칠을 하고 씻어 내고서 샤워기 물을 잠갔다. 수건을 낚아채 먼저 몸의 물기를 대충 닦고서 머리를 마구 비벼 가며 화장실에서 나와서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보았다.
“앗싸아, 시간 좋아.”
화장대 위에 놓인 드라이어로 초특급 스피드로 머리를 대충 말리고 머리띠로 앞머리를 쓰윽 밀어 올려 대충 정리한 다음 옷장으로 달려갔다. 달려가긴, 이 좁은 원룸에 달릴 공간이 뭐 있다고……. 암튼, 한 걸음 크게 빠른 동작으로 움직여 옷장 문을 열고 속옷을 챙겨 입고 이럴 때 가장 만만한 원피스와 카디건을 꺼내 휘리릭 입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한번 얼른 확인하고 나서 식탁 위에 놓인 바나나를 하나 뜯어 핸드백에 일단 집어넣고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열면서 시계를 보니 아주 짤 없는 5분. 희수는 “좋았어!”를 연발하며 현관문을 닫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희수는 계속 오른쪽 왼쪽 그리고 계단 쪽을 흘끔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핸드백에서 립글로스를 꺼내 거울도 없이 익숙한 손동작으로 쓱쓱 바르고 입술을 오물오물하는 걸로 일단 화장 비슷한 흉내를 내기는 했지만 비비크림이라도 얼른 찍어 바르고 싶은 걸 지금 억지로 꾹꾹 눌러 참고 있는 중이다. 암만 얼굴에 철판을 깔았대도 이 사람 많은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비비크림을 발라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손목시계를 흘끔 보니 분명 매일 출근하는 시간이고 전광판에는 다음 열차가 27초 후면 지하철역으로 들어올 거라 알리고 있는데, 희수가 5분 만에 광란의 준비를 마치고 이 시간에 지하철역 바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그 이유, 그 사람이 아직 나타나질 않는다.
희수 직장의 출근 시간은 삼십 분 정도 더 여유가 있는데, 지난 5개월 동안 매일 이 시간 이 자리를 놓치지 않고 출근을 고집하고 있었고 피 같은 아침잠을 줄여 가며 희수가 그러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5개월 전 진저리나도록 추웠던 겨울이 그 추위의 끝자락을 한도 끝도 없이 길게 늘여 놓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신입 사원 하나 훈련을 맡는 바람에 이 주 정도 삼십 분 일찍 출근하게 되었었다. 크리스마스는 다가오고 길거리에 깔린 남자들 중 내 거는 단 한 놈도 없고, 마음도 시리고 몸도 시린데 신입 사원 훈련이나 시키러 출근까지 일찍 해야 하다니. 한숨만 팍팍 나오던 어느 날 이 자리에서 벽에 기대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을 봤다.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 그리고 빨강색 체크무늬 셔츠 위에 패딩 잠바, 그리고 어깨에 배낭을 걸쳐 메고 있는 그 모습 하나 만으로도 ‘나 회사 출근하오’ 쓰여 있는 뻔한 양복 차림의 다른 남자들과 구별돼 보였다. 그런데 그 키! 아니, 한국사람 유전자로도 저런 키와 몸매가 나온다는 게 가능한 건지. 아……. 저 남자의 부모님이 바로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다는 그 유명한 분들이로구나……. 아마 저런 남자를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년은 전생에 우주를 구했을 거다, 라고 생각하며 얼른 그 옆자리를 보니 다행히도 그 옆구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친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설사 님께서 현재 여친이 없다 치더라도 내가 그 옆구리가 내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렇지만 일단은 희수의 눈썹이 씰룩씰룩하며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길쭉하게 걸렸었다. 그리고 희수가 혼자 뻘짓을 하는 동안 지하철이 쉬이익 하며 들어왔고 들어오는 지하철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그의 얼굴을 희수는 보고야 말았다.
‘아…… 저런……. 저런 몸매에 얼굴까지……. 젠장. 그렇다면 아마 성격은 완전 저질 미지왕이겠군……. 그래도 저 정도 스펙이면, 그래, 내, 너라면 까짓것 대놓고 미친놈 지가 왕자인줄 알아 짓거리를 한다 해도 봐 준다…….’
그 사람의 얼굴을 아주 대놓고 빤히 쳐다보며 떡 줄 사람은 절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을 혼자 벌컥벌컥 들이마셔 대느라 정신줄을 놓고 있던 희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앞으로 밀어대는 사람들 틈에서 갑작스레 핸드백을 놓치고 말았다.
“우왓! 내 핸드백!”
사람들 발에 차여 저만치 달아나 버린 핸드백을 줍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사이 어느새 지하철은 문을 닫고 출발해 버렸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희수는 사람들 발에 짓밟힌 핸드백을 집어 안에 내용물 들을 확인하며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미친…… 정신줄 이렇게 놓고 다닐래, 증말?”
콤팩트가 정통으로 밟혔던 듯했다. 열기도 전에 안에서 찌그덕 소리가 나는걸 보니 거울이 깨졌을 게 분명했다.
‘젠장, 산 지 얼마 안 된 건데…….’
짜증스런 마음에 양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고 이마에 주름까지 잡아 가며 쓰레기통 위에서 콤팩트를 가만히 여니, 물론 거울은 박살이 나 있고 분도 다 깨져서 덩어리 덩어리로 떨어져 나왔다. 입 안에서 꿍얼꿍얼 거리며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서 다음번 지하철 타고 가면 늦지 않으려나, 시계를 보려는데 누가 뭔가를 희수에게 쓰윽 건네었다.
“이거, 그쪽 백에서 나온 거 같은데.”
깨져 버린 콤팩트에 아직도 정신이 팔려 아무 생각 없이 “네?” 하면서 보니 바로 문제의 그 스펙남께서 희수의 필통지갑을 손에 들고 있었다.
‘허윽……. 저 망할 놈의 필통은 또 언제 뛰쳐나간 거야……. 아… 쪽팔리다…….’
“아, 고맙습니다.”
냉큼 필통을 받아 핸드백에 집어넣고는 흘끔 스펙남을 쳐다보니 어느새 그 사람은 다시 벽 쪽으로 걸어가 기대어 서서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는지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기막혀. 지루함과 칙칙함 그리고 꼬질꼬질함이 뚝뚝 흘러내리는 지하철벽이 저 사람 한 명 기대어 서 있는 것 하나로 광채가 나는 배경화면이 되어주고 계셨다.
‘캬아……. 저, 다리 길이하며 각도 봐라. 저건 순정만화 아니면 안 나오는 그림인데, 그 말로만 듣던 만찢남, TV 화면 밖에서는 절대 만나기 불가능하다는 그분께서 바로 내 눈앞에 있구나.’
깨져 버린 콤팩트는 벌써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희수가 다시 그 사람을 잠깐 감상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다.
‘가만, 그럼 내 필통 주워 주느라 저 사람도 지하철 놓친 거야 지금? 흠……. 완전 성격 파탄은 아닌 듯……. 가만있어 봐,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건 좀 지나치게 완벽한 거 아냐? 기럭지에 비주얼에 성격까지! 아웅, 이러면 곤란한데 말이지.’
히죽거리며 혼자 사차원의 원맨쇼 콩트를 찍고 있던 희수가 잠시 후 또다시 스스로 머리를 꽁 쥐어박으며 자신의 영혼 세계에게 간절한 당부의 한마디를 건넸다.
‘정신 차리셔, 오희수, 제발, 응? 부탁이야. 응? 응? 응!’
다행히도 다음 지하철이 들어오는 것을 알리는 방송과 함께 희수는 다시 전쟁을 앞둔 군인의 자세로 돌아왔다.
‘그래, 정신줄. 정신줄 챙기자. 이번 지하철도 놓치면 완전 죽음이야. 박 과장이 직접 찍어서 후배 교육시키라 한 건데, 후배보다 늦게 출근했다가는 완전 도끼로 대박 찍힘과 난도질을 당할 것이 틀림없어.’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를 시작했던 그날, 희수는 하루 종일 문득 문득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우리 동네 사는 사람일까, 매일 그 시간에 지하철 타나, 등등등 스펙남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점점 더해만 갔다. 그래서 그 다음 날 늘 출근하는 시간보다 삼십 분 빠른 시간에 다시 지하철역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그 스펙남을 다시 보게 된 후 5개월 동안 희수는 매일 그 시간을 출근 시간으로 고집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매일 그 사람을 볼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난 후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늘 메고 다니는 배낭 외에 좀 큰 가방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나타나는 날이 가끔 있었고 그런 날 후에는 며칠씩 나타나지 않았다. 출근을 이곳에서 하는 걸 보니 집이 이 근처인 것은 틀림없으나 퇴근 시간이 언제인지는 알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언감생심 먼저 말을 걸어 볼 용기는 물론 없었고 그 사람 쪽에서도 한 번 아는 척 눈인사라도 해준 적도 없었다. 처음엔 그냥 그의 겉모습에 끌리고 신기하기도 해서 무슨 연예인 구경이라도 하는 그런 심정으로 그렇게 아침 출근 시간을 앞당겼던 것인데 한두 주가 지나고 한두 달이 지나며, 어느새 그게 희수의 자연스런 일상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