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 이제 마음먹고 좀 현실적으로 살아보려는 내 앞에 그가 나타났다.
“작업치고는 좀 약한데.”
처음에 봤던 무뚝뚝하던 그 남자는 다 어디로 갔는지 어느새 내 앞에 앉은 그는 매혹의 향기를 잔뜩 풍기고 있다.
“제가 혹할 만큼 좀 더 적극적인 작업은 어떻습니까?”
그가 자꾸만 날 보고 웃는다. 그가 웃을 때마다 심장이 제멋대로 달음박질치는 통에 딱 죽을 맛이다.
“일 잘 마치면 데이트 한 번 해드릴게요, 와 같은 거 말입니다.”
동갑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 직업, 거기다 설상가상 번지르르하게 생긴 외모까지. 무엇하나 이상형에 부합하는 것이 없는데, 그런데 도대체 내 마음은 왜 이런 거지? 정말 미쳐버리겠다!

-본문 중에서-

맑은 눈동자로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가는 화영을 바라보던 시윤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 너도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다른 여자 말고 나한테만 그랬으면 좋겠어. 자꾸 욕심이 생겨.”
드디어 할 말을 다 한 것일까. 거기까지 말을 마친 화영이 입을 다물었다. 거실 안에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기도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윤이 실소를 터뜨렸다.
“……?”
갑작스런 시윤의 웃음에 어느새 간절한 표정이 되어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화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옅게 웃음을 머금은 시윤이 그런 화영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봐요, 이화영 씨.”
시윤의 부름에 화영이 놀라서 동그래진 눈을 깜빡였다.
“잊고 있나 본데 먼저 고백을 한 건 나야. 그리고 미안한데 좋아해 주기만 하는 건 못할 것 같다.”
“어?”
화영이 놀라서 시윤을 바라보았다. 시윤의 말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에 얽힌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다. 그 눈동자를 보며 피식 웃은 시윤이 팔을 뻗어 화영이 앉은 소파 양 옆을 짚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한결 가까워졌다.
“난 이제…….”
긴장된 얼굴로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화영을 바라보는 시윤의 얼굴에 맺힌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사랑이란 걸 할 거거든. 너랑.”

[미리보기]

그런 두 사람의 사이로 태주의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길 작가님. 이런 곳에서 보는군요.”
어느새 화영을 향해 뻗던 손을 다시금 호주머니로 원상복귀 시킨 태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시윤을 응시했다.
“저도 김태주 본부장님을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두 분이 사적으로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나 봅니다.”
“네. 개인적으로 화영이와 잘 알고 지내는 사입니다.”
“이화영 씨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요.”
무덤덤한 태주의 질문에 역시 담담하게 대꾸하는 시윤. 분명 평이한 질문들이 오고 가는데도 왜 그런지 두 사람 사이에 거센 소용돌이 기류가 생성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화영은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살피다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 묘한 기류는 뭐지?’
화영은 가만히 서서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 상황이 전혀 예상외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럴 겁니다. 전 여기에 화영이와 데이트를 하러 온 것이니 말이죠.”
“호오. 두 사람이 그런 사이었습니까? 미처 몰랐군요.”
“굳이 본부장님께서 그걸 알 필요는 없으시죠.”
“아. 그런가.”
어깨를 으쓱한 태주가 시윤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만히 화영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나 싶었는데. 우리 사이에는 늘 방해자가 끼어드는군.”
우리, 라는 태주의 말에 시윤의 눈썹이 움찔했다. 물론 화영의 미간도 함께 움찔했다.
“아쉽지만 이번에도 다음을 기약하자고.”
잠시 더 화영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태주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멈칫하더니 시윤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 참. 길 작가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모호한 웃음을 비식 흘리고는 이제 정말 미련이 없다는 듯 걸음을 옮기는 태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윤이 미간이 와락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