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만나려고 했었는데 잘됐다.”
“응?”
“따로 만날 필요 없이 오늘 여기서 얘기하면 되겠다고.”
“무슨 소리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버지와 윤호가 애를 써줄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알아야 했다. 찻잔을 손으로 받치고 하진은 밖의 풍경에 시선을 준 채 윤호를 향해 궁금했던 것을 묻기 시작했다.
“거선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하진아…….”
“혹시 내 결혼도 상관이 있어?”
윤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깊게 들이마시는 숨결에서 그녀의 불안이 대충 맞아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진은 다시 위안처럼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분명 달콤하고 부드러웠던 맛이 이제는 아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은 질척하고 너무 달달해 눈살이 찌푸려졌다.
“……제한 그룹과 약속한 것이 깨진 거 맞아?”
“넌 아무 걱정 마. 작은아버지와 이 오빠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냥 지금처럼 살면 되는 거야, 하진아.”
하진은 들고 있던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호의 턱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허공으로 치켜졌다.
“오빠, 난 계약을 한 거야.”
“하진아…….”
제 입으로 사실을 말하면서도 하진은 가슴이 아팠다. 제한 그룹과 거선 그룹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고, 그걸 충족시키기 위해 그녀와 도균은 결혼을 했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것은 쉬워. 하지만 언제까지 그래야 하는데? 난 허수아비가 아니야, 오빠. 생각이 있고 지각이 있는 사람이기에 알아야겠어.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어떻게 해야 지금의 날 지킬 수 있는지…… 알아야겠다고.”
하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실상은 비겁하면서 안 그런 척하는 것도 이젠 지쳤다. 하진의 어깨가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밑으로 툭 처졌다.
“후회하니?”
윤호의 나직한 물음에 하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럼, 도균일 사랑해?”
그래, 사랑한다. 그것도 진부한 혼자만의 짝사랑.
그에게도 아직 털어놓지 못한 감정을 윤호에게 고백하긴 싫었다. 하진은 대답을 하지 않고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등 뒤를 따라오는 윤호의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다.
“하진아, 네가 걱정하는 게 뭐니? 거선이니, 아니면 네 결혼이니?”
아팠다.
윤호의 말에 담긴 이중적 의미가 뚜렷하게 느껴져 등에 꽂히는 그의 시선이 아팠다. 대답을 기다리는 줄 알면서도 하진은 입술을 쉬 열지 못한다. 거선도 걱정이지만, 만약 그들 사이에 약속되었던 것들이 이행되지 않는다면 결혼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도균과 그녀는 사랑을 해서 결혼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뒤늦게 그녀가 도균을 사랑하게 됐다고 해도 제한에 아무런 이득이 없이 결혼을 유지하기란 힘들 것이다.
“그 사람은 나한테 아무런 말도 안 해. 무슨 문제가 생겼냐고 물어도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전부야. 오빠, 난…… 내가 착한 애인 줄 알았어. 오빠를 위해, 언니에게 숨 쉴 틈을 주기 위해, 거선을 위해 결혼한다고 속으로 으스댔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다 사실이 아니야. 내 이기심 때문이었어. 그래서 더는 남들 뒤에 숨어서 이득만 보고 싶지는 않아. 내 몫은 해야 하잖아.”
뭉뚱그려 말을 했지만 정작 말을 듣는 윤호는 이해를 못할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한 말이었으니까.
“나 때문에 모두가 고생이구나.”
자책하는 윤호의 말도 하진의 가슴까지 파고들지는 못했다. 그게 아니라는 말을 할 순 없었다. 하진도 염치가 있어 시무룩한 표정의 윤호를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다.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알아.”
“거선이 너한테 짐이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할게.”
“난……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하겠지?”
“아니야. 너 때문에 가장 큰 도움을 받고 있는걸. 도균이와 제한 그룹이 왜 거선의 일에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겠어? 그게 다 너 때문이잖아.”
“그럴까?”
제한 그룹과 도균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거선을 돕는다는 것은 분명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윤호의 말처럼 과연 그녀 때문일까. 그럴 만한 의미를 그녀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직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제한 그룹의 이득이 아닌 그녀를 위해 도균이 움직였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절실했다.

[미리보기]


“이게 뭐지?”
“양가의 합의 문서입니다.”
“합의 문서?”
권 여사는 시동생의 사인을 자세히 눈으로 훑으며 다시 되물었다. 유통과 백화점을 제한 그룹에 이양하겠다는 서류는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중요한 일을 그녀도 모르게 시동생이 처리했다는 것을 더 믿을 수 없어 의혹이 가득한 눈길로 서류를 훑고 또 훑었다. 도균은 또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권 여사를 압박하기에 충분한 서류를 보며 그도 내심 기대 어린 시선으로 권 여사를 바라보았다.
“이, 이건…….”
이 회장 생전 병실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했기에 도균도 이런 서류가 존재할 거라는 생각조차 못했다. 하지만 부친인 장 회장은 치밀한 양반이었다. 간병인을 통해 이 사장이 서명한 서류를 인정한다는 사인을 받아냈으니 권 여사가 어떤 변명을 할까 기대가 되었다. 권 여사는 도균이 건넨 서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눌하긴 했지만 남편의 사인이 분명했다.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보길 반복했다.
아니, 설사 위조를 했다고 하더라도 감쪽같아 누구라도 속을 수밖에 없을 만큼 정교했다. 이미 사망한 남편은 뭐라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이건만, 제한 그룹의 장 회장은 뜬금없는 서류로 그녀를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이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안 믿으신다면 저희야 법대로 해결할 수밖에요.”
“거선 백화점과 유통 모두를 다 가지겠다? 이런 속셈으로 우리 하진이와 혼사를 한 겐가? 자네의 욕심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줄 알아?”
권 여사는 노여움이 그득 묻은 음성으로 그를 질책했다. 하지만 도균은 느긋하게 그녀의 표정 변화를 무심히 살폈다. 증거가 나왔으니 조바심을 내야 하는 것은 그가 아닌 권 여사였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는 하진까지 끌어들이는 것으로 봐서는 급박한 상황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 회장님의 유지입니다. 존중해 주시는 것이 권 여사님의 도리일 텐데요? 또 제한그룹에서 유통과 백화점을 거져 먹으려는 것도 아닌데 흥분하지 마십시오. 그만한 대가를 치르겠다는 조항 안 보이십니까?”
“이게 거져가 아니라면 남들이 웃겠네. 사나운 욕심을 이깟 얼마 되지 않는 돈 뒤에 숨기고 제한 그룹이 거선에게 이럴 수 있나? 나도 모르게 이런 이면 계약서가 있을 리 만무한데, 무턱대고 서류 한 장 들이밀고 이대로 지켜라?”
권 여사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반박이었다. 도균도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건 또 뭔가?”
“얘기는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희가 꾸준히 거선의 주식을 매입했고, 금감원에 신고한 내용입니다. 이윤호와 제 장인의 지분까지 합치면 권 여사님과 박선호 씨의 지분율을 넘어서는 양이죠. 이걸 왜 제한 그룹에서 사들였을까요? 이런 계약이 없었다면 다 쓰러져 가는 거선의 지분 따위, 욕심낼 이유가 없죠.”
“다…… 쓰러져 가는 뭐?”
권 여사가 흥분해 내지른 말에 도균은 비릿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자극적인 말이긴 했지만 도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은 그룹의 정체성으로 거선의 루머는 이미 증권가에 파다하게 돌았다. 이윤호와 이성현 사장이 거선에서 물러난 것을 두고 온갖 잡소리들이 진실인 양 떠돌아다녔고, 박선호의 거침없는 행보에 미덥지 못하다는 평들이 이곳저곳에서 분분하게 들렸다.
박선호의 경영 능력은 권 여사가 아무리 포장을 한다 해도 숨길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건설의 처참한 결과는 결국 그룹 전반의 신뢰에 타격을 주었고, 거선 그룹의 주식 하락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현실이 되었음을 권 여사도 알리라 믿었다.
“여기서 멈추십시오.”
“뭐?”
“윤호, 아직도 권 여사님을 믿고 있습니다.”
“됐네. 할 얘기가 이거였다면 그만 돌아가게.”
“왜…… 안 될 일을 고집하십니까?”
도균의 말에 권 여사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곧 평상심을 찾고 평소의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변호사와 상의해 제한 그룹에 이 문서에 대한 회신을 보내겠네. 그러니 오늘은 이만 가주게.”
“그러죠.”
도균이 흔쾌히 대답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권 여사는 휘청거리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장식장 모서리를 손으로 짚었다. 상주댁이 그녀를 대신해 도균을 배웅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며 방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끝내 날 못 믿었네요.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