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두둑 비닐하우스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더위가 한풀 꺾이는 소나기였다. 우비로 갈아입고 물이 쉽게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괭이로 물구멍을 팠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빠르게 몸을 움직여서인지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는 새싹을 보며 지현은 아이의 볼을 쓰다듬듯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이파리의 느낌에 아이처럼 까르르 소리를 내며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난생처음 키워낸 야채가 밥상 위에 올라갈 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었다. 달팽이와 벌레들을 보며 기겁했던 처음과 달리,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상태였다. 그녀가 농사에 대해 잘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안 오 팀장이 사람들을 데려다 하우스를 지어준 다음부터 독학으로 작물을 가꾸었지만 솔직히 싹이 나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기분 좋게 하우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지현의 눈에 구두가 보였다. 날씨답지 않게 반짝거리는 구두는 그가 방금 전에 차에서 내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숙였던 고개를 든 지현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숨을 삼켰다. 상대방 역시 자신을 보고 많이 놀란 듯했다.
“지현아?”
자신을 그의 부르는 목소리는 상당히 날카로웠다. 눈앞에 있는 게 지현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는 듯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도 반신반의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와 반대로 그녀는 조금 더 냉정하게 대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과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인지 지현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침착하게 맞을 수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우비의 소매를 돌돌 말며 그를 올려다보던 것을 멈추고 그의 앞을 지나쳐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가 싶더니 금세 자신과 보조를 맞췄다.
“정말 혼자서 사는 거야?”
“놀라실 필요 없어요.”
현관에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그가 몹시 놀란 듯했다.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상당히 넓은 터였다. 겉에서 보는 집은 그녀가 갖고 있는 자산에 비하면 볼품없어 보였지만, 안은 최첨단으로 만들어져 있어 불편함은 없었다.
“들어오세요.”
집 안을 한번 휘 둘러보더니 신발을 벗고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만요. 저,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그래.”
방 안으로 들어온 지현은 욕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씻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비가 와서인지 기온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더위는 쉬 꺾이지 않았다. 지현은 팔꿈치까지 오는 셔츠와 칠부 바지를 입었지만 셔츠의 단추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몇 번이나 손을 놓았다. 그의 방문이 너무 급작스러워 솔직히 기분이 이상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꼼꼼하게 살펴본 뒤 방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두리번거리던 세준의 시선이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참동안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그를 마주 바라보며 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떠올려보려 했지만 도대체가 알 수 없었다. 문을 닫고 그가 앉은 바로 맞은편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그런 자신에게 바늘처럼 따가운 시선이 얼굴에서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자신을 살폈다. 예전 같으면 그의 시선을 피했을 테지만 이제 노하우가 생겼는지 시선을 마주볼 수 있었다.
“좋아 보이는구나.”
“공기가 좋아서인지 이곳에 온 뒤로 심하게 앓았던 적은 없었어요. 차 좀 드릴까요?”
“음.”
지현이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들어가자 세준도 따라 들어왔다. 집 안에서 유일하게 공간이 넓었다. 아무래도 식탁이 놓여 있어 더욱 그런 것 같았다. 물을 끓여 차를 내어주자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났다.
“네가 이런 일을 할 줄은 몰랐다. 왠지…… 뭐라고 해야 할까?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그리고 이런 모든 일들이 저한테는 익숙해졌어요.”
고개를 끄덕이더니 끓인 차가 입에 맞지 않는지 두세 모금 삼키더니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제가 있는 곳을 아셨어요?”
“며칠 전 우연찮게 오 팀장을 호텔 식당에서 만났어. 네 소식을 물었더니 그냥 잘 있다고 했는데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어서…….”
“아직도 오빠에게 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동생인가 보네요.”
자신의 직설적인 말투에 세준이 놀라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현은 멈추지 않았다. 한때 그를 이성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고, 미래의 남편으로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아니면 돌아가시면서 아버지가 오빠한테 절 부탁한다고 하시던가요?”
“그래.”
부인하지 않는 그에게 지현은 이상하게 서운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혹시 제가 뉴스에서처럼 약물에 취해 치료를 받는다고 생각하셨던 것은 아니죠?”
결코 가볍지 않은 대화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너무 놀라 제대로 답변을 못할 수도 있지만 세준에게선 전혀 흐트러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현이 다시 한 번 침착하게 질문했지만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인 채 지현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뚫어지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연락이 되지 않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지 대략 짐작은 갔다. 악성루머에 그저 의연함으로 대처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절 찾아오신 것을 보니 무슨 할 얘기라도 있는 것 같은데 말씀하세요.”
직설적인 지현의 물음에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한참을 아무 말이 없더니 마음을 다 잡은 듯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네 소식을 궁금해하셔.”
“겨우 그 말씀하시려고 절 찾아오신 거예요? 그런 일은 오 팀장님에게 얘기해도 되는데 괜한 걸음 했어요.”
자신의 속내를 읽어내려는 세준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은 채 올려다보자 그의 이마에 잔주름이 잡혔다. 뭔가 못마땅할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지현이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평소와 달리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준의 방문은 확실히 급작스러웠다. 하지만 정작 그가 가져온 소식에 기분만 나빠졌다. 아주머니가 자신에 대해 궁금해하다니…… 비웃고 싶은 것을 힘겹게 억눌렀다.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아주머니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녀의 싸늘한 음성에는 차 여사에 대한 미움까지 같이 실려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세준이 아니었다. 그의 눈매가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지현은 도저히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어 몸을 일으키려는데 세준이 낮지만 위협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어머니에 대해 왜 그렇게 냉소적이지?”
“그런 적 없어요.”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최대한 냉정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눈동자가 살포시 떨리는 것만은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넌 다른 사람한테는 그렇지 않은데 우리 어머니에게만은 이상하게 적대적이야. 어머니 역시 네가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씀을 못하시는 게 아무래도 이상해.”
“너무 비약하시는 것 같네요.”
말을 끝낸 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에 힘을 주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무릎을 세우기도 전에 그에게 손이 잡혀 다시 앉혀지고 말았다. 그의 손아귀 힘이 얼마나 센지 손목이 이대로 꺾일 것만 같았다.
“날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 것 같니?”
“내가 왜 오빠를 속인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럼 아니야?”
그의 질문에 지현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무덤까지 가져가야 했다. 오래전 시조에서처럼 휘영청 달 밝은 날에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본 뒤부터 시작된 가슴의 통증은 한 번씩 이런 일이 생길 때면 엄청난 고통을 동반했다.
“오빠하고 상관없는 일이에요.”
“언제까지 그런 말이 내게 통할 것 같니?”
“아파요.”
“말해!”
그가 큰소리를 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오랫동안 억눌러왔고 잊고 싶었던 일이었다. 신호그룹과 모든 인연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입을 열 필요조차 느껴본 적이 없었다. 자신 안에 간직한 비밀을 이제와 꺼내보았자 모두에게 상처만 될 뿐이었다. 분노로 진해진 세준의 눈빛을 보며 지현은 가슴에 엄습하는 통증을 몰아내기 위해 호흡을 조절했지만 쉽지 않았다. 갑자기 맞닥트린 아픔은 전신을 뒤흔들었고 정신까지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볼을 타고 내렸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가 내게 숨기는 것, 당장 말해.”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호흡을 뱉어낸 순간 그제야 세준이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린 듯했다.
“왜 그래?”
“가…… 가슴이…….”
재빨리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린 그가 어딘가로 급하게 전화를 거는 것을 보며, 지현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지현아!”
부축하려는 그의 손을 자신도 모르게 세게 움켜잡았다. 그런 자신에게 그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서…… 서랍에 약…….”
그 뒤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는지 지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세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의식을 놓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