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본문 중에서-

“이온 씨는요?”

“네?”

“이온 씨는 사랑에 대한 상처…… 있어요?”

이온은 머뭇하던 대답 대신 걸음의 속도만 좀 전보다 빠르게 했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인가요, 그 상처?”

“아니에요, 그런 거. 단지 그 이야길 왜 갈근 씨에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요.”

한 템포 걸음을 빠르게 한 제갈근은 멈춰 서 있던 이온의 오른손을 또다시 잡았다. 잡힌 손을 빼려 하던 이온은 어둡지만 그래도 가로등 빛에 도드라진 제갈근의 얼굴이 굳어 있는 듯 느껴졌다.

“처음 사랑입니다, 당신이. 그래서 처음은 무조건 당신하고 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누굴 좋아했던 누굴 사랑했던 그게 중요하진 않습니다. 혹시 그때 다친 당신의 상처로, 그때 아팠던 가슴의 기억으로, 그런 이유로 당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건 저를 위해서라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 기억 속에 내가 몇 번째인지 몰라도 내 기억의 당신은 언제나 처음입니다. 사랑합니다, 이온 씨. ……제가 소심한 거 이제 아셨죠? 꼬마 녀석의 힘도 빌리고 말이죠.”

수줍은 듯 살짝 붉어진 제갈근의 옆얼굴로 이온의 놀란 시선이 옮겨졌다. 꼬마 녀석의 힘만 빌려온 것이 아니라 아주 옛날 그 나이 때 이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잡힌 손에 더한 힘이 가해졌다. 앞으로 지나는 길 위로 하얀 이팝나무의 꽃들이 조금씩 흩날렸다. 그렇게 이온의 가슴에는 하얗고 하얀 이팝나무 꽃과 닮은 이 사람이 더 크게 새겨져 버렸다.


‘혹시…… 혹시 말이에요. 서로에게 맞지 않는 부분을 하나씩 하나씩 없애 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정말로 사랑이 남을까요?’



2권

-본문 중에서-


이온 씨! 그리스의 국화가 뭔 줄 알아요?”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뭐예요?”
“이온입니다.”
“에? 저랑 이름이 같네요? 하하, 우리나라 말로 무슨 뜻이에요?”
“제비꽃이라네요.”
“흐흐, 제 이름에 그런 뜻도 있었군요. 몰랐어요. 예쁘다. 저 제비꽃 좋아하거든요.”
싱글벙글 이온의 얼굴로 퍼지는 미소로 제갈근은 가슴까지 따뜻해 왔다. 그리스 이곳저곳을 여행 다니며 사진도 많이 찍고, 배운 것도, 느낀 것도 많았던 그곳의 풍경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 사람과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앞으로 걸어 나가는 동안 어디선가 들리는 통기타 선율이 그 둘의 귓가에 들려왔다. 천천히 그곳으로 발을 옮기는 두 사람, 원을 그리듯 누군가를 뱅 두른 사람들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술과 노래를 파는 것인지 한 사람이 치는 기타로 시선을 잡고, 피에로 분장의 다른 한 사람은 마술 도구로 작은 요술을 부리고 있었다. 한 번의 동작이 이뤄질 때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제갈근의 시선은 당연히 제 옆의 이온을 향해 있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녀 또한 그들과 함께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 순간 피에로 분장의 마술사가 이온 앞으로 다가왔다. 피에로는 마술의 연장인지, 이온에게 정중한 모션을 취하며 마술 도구였던 장미 꽃 한 송이를 건네주었다. 이온은 그것을 받아도 되는지 어리둥절해하다 갈근을 한 번 쳐다보고는 그의 고갯짓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러다 또 한 번 깜짝. 피에로에 건네받은 아이보리 장미가 이온의 손에 쥐어지면서 순간 제비꽃 색으로 변해 버렸다. 정말 마법같이, 마법이 이뤄진 것같이.
“갈근 씨, 이거 봐요! 신기하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색이…… 우와…….”
“좋아요?”
“네, 하하, 횡재한 기분이에요. 마법사 같아요, 항상 당신하고 있으면 이렇게 기분 좋은 일만 생기는 걸 보면. 호호.”
“그럼 기분 더 좋아지게 해 줄까요?”
“예?”

“그 파란색 장미의 엄마가 제비꽃이에요. 파란색을 만드는 유전자가 없어 파란 장미는 이 세상 태어날 수 없었다내요. 그러다 제비꽃에서 추출한 파란색으로 파란장미를 만들었다죠. 그래서 꽃말이 불가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 불가능이 아니라 기적이라는 편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으니까. 그러니 이온 씨는 기적의 엄마가 된 셈이 되겠죠.”
“하여튼 말은……. 무슨 말이든 갈근 씨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거짓말도 진실같이 들리는 이유는 뭘까요. 정말 마법사인지도 몰라요, 갈근 씨는.”
제갈근의 걸음이 멈췄다. 이온 역시 따라 멈춰 섰다.
“기적…… 한 번 더 일으켜 봐요. 사랑하는 사람이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이온 씨,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어요. 노근 그 사람, 지금도 여전히 당신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온 씨 손이 그래서, 사랑이 식어서, 그래서 떠난 게 아니에요. 그때 떠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길 해 줄 테니 너무 놀라지는 말아요.”
움씰 놀라 동그래진 이온의 두 눈동자는 제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찬 제갈근의 눈동자로 꽂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남자의 슬픈 눈동자.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꼭 슬픈 이야기처럼 느끼게 해 귓가로 전해지는 목소리 또한 아려 왔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 그냥 이 사람의 목소리로 듣는 그 사람의 이야기는 슬프고도 슬픈 동화 같은 이야기로 가슴에 박혀들 뿐이었다.
제갈근은 이온을 살포시 가슴으로 안아 주었다. 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 그냥 흐르는 눈물을 삼키는 것이 느껴졌다.
“가요…… 그 사람한테. 당신은…… 기적의 소유자니까.”

목차

1권

프롤로그
제1장 자작나무 이야기
제2장 아까시와 측백나무 이야기
제3장 보리수 그리고 등나무
제4장 진짜 보리수 그리고 칡나무
제5장 자귀 연리목과 구상나무
제6장 이팝나무
제7장 두 번째 이팝나무
제8장 물푸레나무
제9장 회양목
제10장 귀향목
제11장 우로보로스
제12장 생강나무와 토란꽃

2권

제13장 제비꽃
제14장 매직 아워
제15장 배나무 연리목
제16장 감식초와 보리차
제17장 자식이라는 나무
제18장 뿌리 깊은 나무
제19장 코스모스와 국화
제20장 오늘도 이 하루를 선물합니다
제21장 겨우살이
제22장 네가 행복하면 내가 행복한 거야
외전
작가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