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없는 설움을 아킬레스건으로 가진 천애고아 유정. 바라보기도 힘든 강호를 마음에 품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어와 버린 그는 다른 여자의 남자였고, 바라볼 수 도 없을 만큼 까마득히 높은 사람이었다.

오랜 사랑에 기막힌 배신을 당한 남자 강호. 그에게 당돌한 한 여자가 다가섰다.
그녀가 부담스러워 거부하려고 했지만 계속 생각이 난다.

첫사랑 유정을 잊지 못하는 현성. 사라졌던 그녀는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유정은 묵묵히 음식을 넘기는 강호에게 말했다.
“전무님. 저에게 전무님이 그런 분이세요. 저, 전무님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강호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의외의 눈빛으로 유정을 바라봤다. 유정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더 용기를 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전무님을 만난 날부터 그랬어요.”
유정은 말을 뱉고 나서 혹시 반감을 사고 건방져 보이지 않을까 걱정 되었다. 하지만 친구가 되길 거절한다 하더라도 손해 볼 것은 없었고, 승낙을 한다면 유정은 그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었다.
어차피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나쁜 이미지로 끝나면 어떠랴 싶었다.
“내 인상이 무섭다고 사람들은 쉽게 다가오지 못해요. 그런데 유정 씨는 예외인가요?”
“전무님, 기억 안 나세요? 저 바닥에 넘어졌을 때 건물 쏟아지게 웃으셨던 거.”
“아, 기억나지. 미안해요. 그때 그렇게 웃으면 안 되는 건데.”
“그때, 험상궂은 이미지 다 버렸어요.”
“하하…… 그래요.”
그의 웃음 끝이 어색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끊겼다. 강호의 얼굴이 험상궂어 보였다.
식사가 끝나고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강호를 보며 유정은 문득 듬직한 어깨를 보았다. 지금 다른 사람들 눈에는 두 사람이 연인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유정은 쓰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괜한 말을 해서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건 아닐까.
가게 밖으로 나온 강호가 유정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그럼, 저는 가볼게요. 잘 가요. 유정 씨. 그리고 2주일 뒤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해주길 기대할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그는 자신의 차를 타고 여유롭게 저 수많은 차들의 행렬 속에 들어갔다. 유정은 그의 차 꽁무니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혼자서 헛물켜다.
딩동댕, 정답.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을 무시함으로써 유정에서 선을 확실히 그었다.
분명 유정이 앞 뒷말 없이 무작정 친구가 되고 싶다는 그 말을 한 순간부터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 강호에게 유정을 만난 의미는 그야말로 아주 오래전 잠시 인사 나눴던 한 사람일 뿐이겠지만 유정에게 강호는 어려울 때 생각나던 마음속의 연인이었다. 그 차이를, 유정의 마음을 알아차렸던 걸까. 유정이 호감을 나타냈다는 걸 육감으로 알아 버린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가 친구가 되고 싶다는 게 우습게 보였을까.
그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식해 버린 유정의 심장은 징 하는 소리를 내며 아프다고 한다. 유정은 자신의 심장을 다독였다.
괜찮아. 관심 갖는 네가 잘못된 거지.
쓸데없는 눈물 한 방울이 흐르자, 유정은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훔쳤다.

[미리보기]

강호의 시선이 유정의 목덜미에 닿았다. 가늘고 하얀 목으로 액체가 넘어가는 게 보였다. 살짝 보이는 빗장뼈도 예뻐 보였다. 어깨부터 목덜미로 이어진 예쁜 선이 만지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다른 것들도.
안 되겠다. 견딜 수 없어진 강호가 벌떡 일어났다.
“가자.”
“예?”
“데려다 줄게.”
“바쁘셨군요.”
유정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가방을 들었다.
“후.”
강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괜찮아요?”
강호를 안정시키고 싶은 마음에 유정은 그의 손을 잡았다. 커다랗고 부드러운 손을 손가락 끝이 까슬까슬한 유정의 작은 손이 다정하게 감싸자 순간 강호는 그의 부끄러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유정의 손을 휙 뿌리쳤다. 유정의 손이 공중에 민망하게 떴다. 유정의 볼이 수치심으로 확 달아올랐다.
“미, 미안해요.”
강호가 굳은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당분간 우리 만나지 말자.”
드디어 말을 꺼냈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유정의 눈이 불안한 감정을 담고 크게 흔들렸다. 유정은 이내 침을 한번 삼켰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연하게 대하고 싶었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할 수는 없었다. 서운하고 슬픈 감정만 몰려와 괴로워졌다.
“죄, 죄송해요. 제가 저번 일이 부담될지 알았어요. 제 주제를 생각해야지 어디에 들이대, 그죠?”
장난스럽고 가볍게 하려는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수치심과 울음이 섞여 있었다.
“그런 게 아니야. 난 아직 다른 사람을 담을 그릇이 못돼.”
“제가 성급했어요. 그…… 그러는 게 좋겠어요. 너무, 미안해요.”
유정은 심장이 떨려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어 칵테일 바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리고 서둘러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강호가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서운해. 서운해 미칠 것 같아.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강호가 부담스러워 한다면 언제까지나 연락하고 지낼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걸 각오했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가 혹시 하는 기대감도 있었나보다. 결국 자신은 강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여자일 뿐이라는 생각에 기운이 쑥 빠지고 서운한 감정이 울컥 솟았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갔다. 아무 말 없던 유정은 강호를 슬쩍 엿보았다. 강호의 표정이 화난 듯 험상궂었다. 유정은 강호의 표정을 보고 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부담스럽다고 해도 이렇게 기분 나쁘게 구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정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를 또각또각 걸어가다가 뒤를 휙 돌았다. 순간 두 사람 눈이 마주쳤다. 유정이 강호를 쏘아보았다. 강호의 눈빛이 다른 날보다 무척 검었다. 유정은 매서운 눈빛이 겁났지만 강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냈다.
“혼자 욕심내고 혼자 좋아해서 죄송해요. 네, 별 매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정말 좋아해요. 그래서 죄송해요. 이제 여기서 진짜 포기할게요. 그러니까 그렇게 험상궂은 표정은 그만두시라구요."
하지만 강호는 아무 말 없이 아까보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유정을 노려보기만 했다. 유정은 더욱 겁이 났다. 그의 신경을 건드린 게 틀림없었다.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 하는 게 아닐까……. 그건 안 돼. 유정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미안해요. 그만, 그만할게요. 당분간은 안 만나는 게 좋겠어요. 나중에 연락 주세요.”
울컥 수치심이 사레들린 것처럼 넘어와 목 뒤에서부터 아픈 기운이 척추를 따라 뒷골까지 쭉 올라왔다. 눈물이 치받쳤다.
“후.”
유정이 휙 그 자리에서 뒤를 돌아 로비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오가는 사람들 속으로 유정은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괴롭게 숨을 몰아쉬었다. 감정을 견디지 못한 심장 때문에 갑작스럽게 눈물이 비처럼 흘렀다.
호텔 현관을 나서자 차가운 가을바람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유정은 몸을 잔뜩 움츠리며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유정이 다가오는 택시에 타기 위해 택시 문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유정의 팔을 낚아채더니 커다랗고 따뜻한 어떤 것에 온몸이 파묻혔다. 커다란 놀라움만큼이나 깊은 안도감이 생겼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쿵댔다.
그의 품은 너무 좋았다. 유정이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으려고 하자 그의 손이 그걸 감지하고 유정의 허리를 팔을 교차해 얽어매며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유정은 따듯하고 단단한 강호의 품 안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강호가 낮고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정말 너, 가져도 돼?”
유정의 귀에 그의 따스한 숨과 함께 온몸을 전율하게 만드는 그의 음성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처음 느껴 보는 그의 품. 상상만 하던 그의 품이 고스란히 유정의 온몸에 느껴졌다. 단단하고 뜨거웠다. 믿어지지 않았다. 강호의 크고 빠른 심장고동이 유정의 가슴을 타고 느껴졌다.
목 깊은 곳까지 차오르는 떨림에 긴장을 놓으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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