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윤보리: 그때부터 내 운명은 그들과 이어지도록 결정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들은 내게 불꽃이었고, 재앙이었고, 마른하늘을 가르는 벼락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불처럼 뜨거웠고 파도처럼 격렬했고, 또 007비밀작전처럼 은밀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언젠가는 깨뜨려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인연의 끈들, 나는 늘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 남자 김영준: 눈 깜짝 할 사이 내 동지들이 정체모를 조직에 의해 하나하나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막역지우였고, ‘인연’이란 끈으로 이루어진 형제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을 끝까지 캐내고자 나는 나의 모든 것을 걸었다. 심지어 내 목숨까지…….
앞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기나긴 어둠의 터널과 같은 침침한 곳에서 난 그녀를 만났다. 그러곤 도저히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되는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위험했고, 수없이 많은 죽음의 문을 넘어서야 했었다.



그 남자 장윤후: 처음부터 그녀는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지만, 난 그녀를 살렸다. 그것이 나의 큰 실수였다.
그녀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었다. 그녀의 영혼을 포함한 모든 것을……, 아니 얼마간은 그녀를 소유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지나고 나서 보니 그건 나의 오산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 다른 곳을 향해 있었기에…….



[본문발췌]

“살고 싶으면 다들 입 닥치고 조용해!”
표독스럽게 내쏘는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탕, 하고 문이 닫히면서 사방은 순식간에 적막한 어둠 속에 갇혀 버렸다. 눈에 안대를 착용하고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 그들이 갇힌 곳은 어둡고 침침한 지하창고라는 걸 주위의 축축한 냄새와 몸속을 파고드는 공포의 전율로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우락부락하고 험상궂게 생긴 정체 모를 사내들한테 붙잡힌 사람은 총 6명, 여자라곤 유일하게 그녀 한 명뿐이었다.
“어이, 애송이. 아는 거 있으면 얼른 말해 봐.”
애송이라 불리는 남자는 기껏 해봐야 열여섯, 청춘하고 깔끔하게 생긴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해. 아마 나 때문일 거야.”
맥없이 중얼거리는 애송이를 마뜩찮게 쳐다보던 한 남자의 못마땅한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내가 뭘?’ 하고 내뿜는 그녀의 아우라에 남자는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을 풀고는 농담조로 말했다.
“영웅 하다가 도리어 놈들한테 붙잡힌 포로가 되다니. 잘된 거지 뭐. 죽지만 않으면야.”
“뭔 소리야?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여기서 죽는다는 게 말이 돼? 나갈 방법을 찾아봐야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금방 다들 못 봤어? 그리고 그중에 뾰족하게 생기고 갈치처럼 생긴 새끼 봤지. 그 새끼, 손가락에서 칼이 춤추며 날아다니는 것도 봤지? 나가긴 다 글렀단 말이야. 어떻게? 무슨 수로 나가? 수법이 신랄하고 지독한 악당들한테 잡힌 거야.”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왜 벌써 죽을 거란 불길한 생각부터 하는데? 어? 지조가 없는 부실한 새끼들!”
여태껏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녀가 벌떡 일어서서 씩씩거리자, 뭔 그런 재미있는 농담을 다 하느냐는 듯 조금 전 이기죽거리던 남자가 그녀를 쳐다봤다.
“저기…….”
그때였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애송이가 긴장된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데 벌컥 문이 열리며 남자 셋이 들어왔다. 동시에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한 줄기 빛에 의해 그녀는 세 남자의 얼굴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었다.
“어제 잡힌 녀석들인가?”
중간에 선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잘생긴 얼굴에 강한 턱선과 차가운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아랑, 오랜만이야. 여기서 볼 줄은 몰랐지만.”
애송이를 향해 말하는 그의 오만하고 차가운 얼굴에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랑에게 머물러 있던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옮겨지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런, 여자도 있었군. 이거, 꽤 흥미로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