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북부, 헨리 1세가 통치하던 시절 어느 해 봄

한낮을 가르며 울려 퍼지는 전쟁 나팔 소리는 블랙소른 성의 새 영주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마치 막 소개가 끝난 배우가 팡파르와 함께 무대 위에 오르듯, 안개 속에서 검은 덩어리－완전무장을 한 채 거대한 종마에 올라탄 기사가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말과 기사는 한몸인 듯 서로 어우러져,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남성의 힘을 내뿜으며 광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가씨, 그 남자는 악마래요.｣
미망인 에디스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몸서리를 쳤다.
｢노르만 기사라고 하면,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그 중에는 친절하고 관대한 마음을 지닌 사람도 있어.｣
마가렛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용히 하녀에게 대꾸했다.
에디스 입술 사이로 코웃음이 흘러 나왔다.
｢글쎄, 그렇기는 하지만, 아가씨 신랑은 강철 갑옷을 입고 무시무시한 말을 타고 왔어요. 전쟁의 속삭임이 들려 오는 듯해요.｣
｢이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가 이 결혼을 왜 하는데! 이제 더 이상 피를 보지 않을 거야.｣
메그(마가렛의 애칭)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판단 잘 하세요. 결혼보다는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더 많으니까요.｣
에디스는 잔인하리만큼 히죽거리며 장담했다.
｢노르만 침략자들에게 죽음을!｣
｢조용히 해. 난 전쟁의 ‘전’자도 듣고 싶지 않아.｣
에디스는 입술을 삐죽거렸으나, 더 이상 전쟁이란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며칠 후면 남편이 될 전사와 그 부하들을 보기 위해, 메그는 덧문 뒤에 몸을 숨긴 채 창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들판을 가득 메운 은빛 안개 속엔 말을 타고 달려오는 단 한 사람만이 보일 뿐이었다.
어디선가 또다시 나팔 소리가 들려 왔다.
강철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모습이 점점 뚜렷해졌다. 위풍당당하게 성을 향해 다가오는 그 모습에선 공포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종종걸음치며 뒤를 따라오는 부하나 번쩍이는 금속 무기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관습과는 다르게, 도미니크 르 사브르는 전쟁 나팔의 깊은 울림만을 호위병으로 삼고서 색슨족의 성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의 탈을 쓴 악마가 틀림없어요. 나는 절대로 저런 남자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에디스는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다짐했다.
｢그래. 하지만 저 사람에게 손을 내밀 사람은 바로 나야. 네가 아니란 말이지.｣
｢하나님이 아가씨를 구원하시길……. 아가씨가 정말 걱정돼요. 아가씨는 자신을 전혀 걱정하지 않아서 큰일이에요.｣
에디스가 걱정스런 얼굴로 혀를 찼다.
｢천하의 글렌드뤼드의 딸이 어찌 노르만 사내의 이름만 듣고 벌벌 떨 수 있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순간 메그는 등골이 오싹했다. 도미니크 르 사브르가 가까이 올수록 하녀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아가씨,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거예요. 저 사람은 분명 악마예요.｣
메그는 평온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가까이 다가오는 기사의 오만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신부로 맞이함으로써 이 거대한 땅을 상속받을 사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블랙소른 영주의 사위’라는 역은, 왕국이 있는 국경 근처까지 노르만의 용맹한 기사를 끌어들일 수 있는 훌륭한 미끼였다. 블랙소른 영주의 재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메그는 스코틀랜드 영주들 사이에서 최고의 신부감이었다. 하지만 윌리엄 2세에 이어 헨리 1세까지 메그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절대로.
아직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약혼자가 홀로 말을 타고 온 이상으로 남다른 사람임을 메그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추방된 기사처럼 화려한 의상은 전혀 걸치지 않았어. 하지만 영국 왕의 두터운 신뢰를 받는 사람이 분명해. 보통 사람이 아냐. 나중에 어떤 영주보다도 더 넓은 영토를 지배하겠군.’
‘위대한 영국의 영주’가 된 축복 받은 노르만 기사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메그는 또렷해진 기사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물방울 모양의 방패에는 가문을 나타내는 어떠한 문장도 새겨 있지 않았고, 깃발도 없었다. 투구는 타고 있는 말처럼 새까맣고 이상했다. 갑옷 위로 입은, 검고 긴 망토는 말의 힘찬 움직임에 따라 무섭게 소용돌이쳤다.
‘말과 기사가 마왕처럼 오만하고 강인하군.’
다가오는 검은 형체를 바라보며, 메그는 자신을 덮치는 공포를 애써 감췄다.
｢우와, 몸집이 엄청나게 크네. 아가씨, 무섭지 않으세요?｣
메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검은 기사는 정말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장차 남편이 될 남자를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는 소문이 성안에 돌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아니, 무섭지 않아. 말을 타고 강철 갑옷을 입은 남자, 그 모습 그대로 보일 뿐이야.｣
｢생각해 보세요. 사생아로 태어난 기사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왕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됐어요. 영토도 없는데도 사람들은 ‘위대한 영주’라고 부르고요.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사람이기에…….｣
｢도미니크 영주는 사브르라고도 불리는데 검이라는 뜻이야. 사생아든 귀족이든, 사라센(시리아, 아라비아 사막에 사는 유목민)에게서 귀족의 아들을 구했어. 저 기사가 없었다면, 십자군도 그리 좋은 결과를 보여 주지 못했을 거야. 그래서 왕이 상을 내리신 거지. 정말 현명한 처사였어.｣
메그는 잔인할 정도로 도미니크를 미워하는 하녀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우리의 땅을 말이죠?｣
에디스가 쏘아붙였다.
｢그건 왕의 권리야.｣
｢아가씨는 자신에 대해선 전혀 걱정하지 않는군요.｣
｢내 희망은 오직 한 가지, 피를 보지 않는 거야.｣
‘도미니크 르 사브르, 성지(팔레스타인)에서 동정심은 배우셨는지 모르겠군요? 나의 간절한 소망이 당신의 관용에 의해 이루어질 수는 있을는지……. 지금 입고 있는 갑옷을 좋아하나 보죠? 혹 미래의 희망보단 가혹함을 보여 줄 수 있어서 좋아하나요?’
에디스는 여주인의 가냘픈 옆모습을 곁눈질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하녀는 전쟁이 아닌 결혼을 위해 열심히 말을 달려 오고 있는 노르만 기사 쪽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싸움터에선 얼음같이 냉정하고 잔인해진대요.｣
에디스의 목소리가 침묵을 뚫었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난 얼음도, 전사도 아니니까.｣
｢역시 글렌드뤼드 딸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