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처럼 소박하고 강인하나 고지식한 여인 태자비 소군.
하늘이 항상 푸를 순 없으나 소군의 하늘은 태자 광운 뿐 이었다.
활 하나로 태자를 구하고, 선비의 마음으로 태자를 품는다.
자존심과 허세를 긍지라 여기는 고집불통 태자, 광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리 박대해도 소군을 떨쳐낼 수 없다.
자신을 유혹할 맘이 없다는 소군이 그에게는 요물이었다.
태자의 연인, 아름답고 화려한 꽃 홍화.
그러나 황제의 소목에 피어날 잇꽃은 그녀가 아니었다.

소군은 태자와 함께 그리고 다채로운 인간군상들의 도움으로 멀고 험난한 길을 떠난다.
그러나 돌고 돌아 온 길 끝에는 고난만큼 벅찬 감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먼 하남땅에서 몇 달에 걸쳐 그 먼 길을 걸어와 궁 안의 넓은 길을 돌아 태자를 뵈었을 때는 지칠 대로 지쳐 쓰러져 자고만 싶었다.
“들어라. 우리가 정식으로 국혼을 치른 후에도 나를 부군으로 생각해선 안 될 것이며, 스스로를 태자비라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공식적으로 그대가 나서는 자리 외에는 허락 없이 함부로 처소에서 나오는 일도 삼가야 할 것이며, 옥천교 너머의 홍화의 땅은 밟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홍화의 심기를 상하게 하는 것은 곧 나를 상하게 하는 것이며, 홍화를 대할 때는 나를 대하는 것 같이 모셔야 하니 투기는 있을 수도 없는 일임을 명심하라. 또한! 혹 그럴 일도 없으려니와 만약 아이를 가지고 그 아이가 사내라면 신하로 사는 법을 가르쳐라.”
태자의 명은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죄여 들었다. 억울함과 서운함 두려움이 소군의 지친 몸을 짓이겨왔지만, 소군은 아픈 다리로 땅을 굳건히 딛고 흔들리는 몸을 애써 감추었다.


소군의 팔이 활과 함께 팽팽하게 당겨졌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시위를 매기는 그녀의 모습에 지켜보는 태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니, 이 중 눈썰미가 있는 사람들은 흔들림 없는 그녀의 기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소군은 신중하게 사슴과의 거리를 맞추고는 시위를 쏘아 보냈다.
‘퉁’ 하고 튕겨진 화살은 ‘쌔액’ 하고 빠르게 날아가더니 그만 사슴의 목을 정확하게 꿰뚫고 말았다.
그녀는 튕겨지는 시위의 촉감과 목표물을 맞혔다는 것에 흐뭇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헌데 돌아서던 소군은 흠칫 놀랐다.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으며 사슴을 모느라 뛰어오던 병사들도 굳은 채 서 있었다.
묘한 정적이 흘렀다. 시원한 바람이 풀을 눕히고 지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화기애애하게 노숙지로 돌아온 일행을 태자비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맞이했다.
“이제 비도 가서 씻고 오도록 하시오.”
“……저는……굳이 씻고 싶지 않습니다.”
부끄러워 씻지 않으려는 것 같아 태자가 애써 부드럽게 달래주었건만, 곧 죽어도 씻지 않겠다, 고집을 부리니 답답한 성정을 참을 수 없는 태자가 기어이 다그쳐야 했다.
“씻지 않으면 두고 갈 것이오! 그 꼴로 어딜 가겠다는 겁니까!”
“저는……귀……귀신이 무섭습니다.”
“…….”
그간 태자비의 당찬 모습을 보아온 일행은 일순 무례하다 할 만큼 말을 잊었다.
결국 태자는 태자비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어 호숫가로 갔다. 태자가 나무 뒤로 돌아가 등을 기대자 비는 옷자락으로 무성한 풀잎을 눕히며 조심스럽게 물가로 갔다.
잠시 후 발을 담그는 출렁대는 물소리가 들렸다. 야심한 달밤에 찰랑 찰랑, 물을 헤치고 나아가는 여인의 걸음 소리는 태자가 귀를 막고 싶을 만큼 유혹적인 소리였다. 곧 몸을 씻느라 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리자 결국 태자는 호기심과 본능을 참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절세가인이라는 홍화를 품었던 태자의 눈에 태자비의 청초한 나신이 들어왔다. 흑단 같은 긴 머리카락을 앞으로 늘어뜨리고 달빛에 빛나는 하얀 등과 허리의 깊은 골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이 훤히 드러났다. 물에 반쯤 잠겨 번들거리는 동그란 엉덩이가 태자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길고 가는 팔이 물을 적실 때마다 언뜻 언뜻 비치는 가슴 언덕은 혈기왕성한 사내에게 고문과 다름없었다.
‘제길!’
태자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자꾸 벌떡대며 뛰는 심장을 주먹으로 꽉 눌렀다.
‘내일부턴 절대로 씻지 못하게 할 것이다.’
유혹할 맘이 없다던 태자비의 순진한 얼굴이 과히 천하의 요물이라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소군의 눈과 황제의 눈이 서로의 깊이를 들여다보느라 꽤 오랫동안 얽혀들었다. 소군이 큰 눈망울을 깜빡거렸다. 황제가 그런 소군을 다시 꼭 껴안았다. 소군의 떨리는 숨결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다시 한 번 몸이 뜨거워지는 황제가 소군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가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고는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 벅찬 기쁨 중에 하나가 이것이라네.”
“하나가 아니라 혹 전부는 아니십니까?”
“피 끓는 사내의 연모란 이런 것이네.”
황제는 소군이 더 따지지 못하도록 입술을 베어 물고 또다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소군도 싫지는 않은지 불그레한 홍조에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처음 궁으로 들어오던 때가 이맘때쯤이었습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는데, 설마 이것이 저의 망상일까, 혹은 허상일까 매일 경계합니다.”
“꿈속을 노닐어도 나는 그대와 마음껏 연모를 나누렵니다. 그래야 꿈에서 깨어날 때 아쉽지 않을 테니 말이오.”
“그럼 저도 그래야겠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소군을 번쩍 안아 올렸다.
“황상!”
“어차피 꿈 속 아닌가.”
황상의 그 짧은 한마디가 소군을 웃게 하고 또 그 웃음이 황제를 웃게 했다.
두 사람의 잔잔한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궁 안 곳곳을 누비다가 궁궐 담을 타고 너울거리며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