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알았더라면, 이안에 대한 내 인상이 조금은 바뀌었을까……?

이안과 나오미의 어린 시절 이야기인 ‘여름 이야기’와 ‘나오미의 비밀’, 지아와 이안의 첫만남을 그린 ‘첫인상’, 그리고 본편의 스핀 오프 ‘If Only(spin off story)’까지! “세인트 루이 기숙학원”을 즐겁게 읽으신 독자분들에게 드리는 특별한 선물!

2. 작가 소개

빈즈(Beans)

취향에 맞는 책을 찾고 찾다, 어느 날 아예 직접 글을 써버리기로 결심,

웹 연재게시판에 첫 글을 올린 후 3년간 꾸준히 집필한 소설이 ‘세인트 루이 기숙학원(Saint Louie Academy)’이다.

개인적인 욕심에 시작한 글이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개인지 제작과 eBook 발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글을 쓰는 것보다는 읽는 것을 여전히 좋아하지만, 쓰고 싶은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면 언제라도 글 쓰는 즐거움을 다시 누리고 싶다.

현재는 직장에 다니며 틈틈이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삶의 소소한 낙이다.

▣ 출간작

세인트 루이 기숙학원

세인트 루이 기숙학원 - 마르시아나의 열쇠

세인트 루이 기숙학원 특별외전

세인트 루이 기숙학원 외전집 1

3. 차례

#여름 이야기

#나오미의 비밀

#첫인상

#If Only(spin off story)

#유디트의 마지막 날들

4. 미리 보기

언제나처럼 여행을 가장 즐거워한 것은 어린 나오미였다. 바캉스에는 귀찮은 시녀들도 엄격한 선생님들도 과제도 예의범절도 따분한 회의도 없고 오로지 놀이, 놀이, 놀이뿐이었다! 가족 외의 다른 사람들이 없다는 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오라버니에 대해 쓸데없이 수군대는 무리들도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안이 그 어두운 7층에서 벗어난 지는 불과 반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오미는 그 의젓하고 다감한 오빠에게 이미 폭 빠져 있었다. 게다가 이안이 솔레일 궁이나 남부 해안에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 아닌가.

아직 어려서 더 깊은 것까지는 헤아리지 못하는 소녀는, 작년에는 오빠를 쏙 빼고 세 식구끼리만 해안에 놀러 왔었다는 점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대신에 소년은 폰테인 남작이나 그를 귀여워하는 시녀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피서를 갔었다. 아이를 키워 보지 않은 어른들 틈에서 그가 얼마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을지는 의문이지만.

한편 황후와 황제는 마음의 짐을 다 벗어버린 듯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길을 떠날 때에도 뒤통수가 당기는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생기 없는 소년을 찍은 사진을 앞에 두고 아이가 여행지에서 식사를 제대로 했는지, 혹 벌레에 물리거나 어디가 아프지는 않았는지 동행인들을 닦달할 필요도 없었다. 비앙카 황후는 이번 여행 내내 아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올 여름부터는 이안에게도 기억에 남는 멋진 추억들을 잔뜩 만들어 주겠노라고-. 안드레아스는 웃으며 그런 아내의 계획에 동참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그는 여행을 오기 며칠 전부터 이안과 나오미와 무엇을 하고 놀지 계획을 세워 놓기까지 했다. 이처럼 모두들 들뜬 가운데,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것은 이안 하나였다. 그는 함께 솔레일 궁으로 떠나자는 어머니의 제안에도-

“제가 가도 괜찮으면 그렇게 할게요.”라고 말했을 따름이다.

그래도 여행은 즐거운 편이었다. 나오미는 배가 고프다느니 오라버니에게도 음료수를 좀 주라느니 시끄럽게 떠들면서 어른들을 바쁘게 만들었다. 비앙카는 솔레일 궁의 굼뜬 시녀들을 제치고 요리 솜씨를 발휘했다. 안드레아스는 낮에는 귀여운 아이들과 놀아 주고 밤에는 폰테인 남작과 술잔을 기울인 후 사랑하는 아내와 잠자리에 들었다. 폰테인 남작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술을 한 잔 더 마시거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 없이 안뜰을 서성였다. 아이들은 잠을 자지 않고 있다가, ‘남작님’의 모습이 보이면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었다. 남작은 지난 해 여행 때 물갈이로 고생을 치렀던 소년이 지금은 활기찬 모습으로 휴가를 즐기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어쨌든 아이들은 좀 더 밝고 자유롭게 지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그는 이안에게 물고기가 잘 잡히는 곳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다. 소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위험한 곳이라면 나오미는 데려가지 말자고 했다.

미끈거리는 것, 살아 있는 것, 작고 꼬물거리는 것은 무조건 질색하는 소녀는 선심 쓰듯 두 사람이 따로 놀러 가는 것을 허락했다. 사실 나오미는 그동안만이라도 엄마와 아빠를 독차지하고 싶었다. 남부로 놀러 온 다음에는 어머니의 눈이 계속 오라버니의 모습만 좇고 있는 것이 살짝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날 낮 최고 기온은 섭씨 30도를 웃돌았다. 수평선을 나는 갈매기들이 뙤약볕에 바싹 구워져 버리지나 않을까 염려될 정도의 더위였다. 비앙카는 내심 낚시를 간 아들을 걱정하면서도 남편과 어린 딸과 함께 해변을 거닐었다. 나오미는 신이 나서 엄마와 아빠 주변을 뛰어다녔다. 이따금씩 파도에 떠내려 온 불가사리를 보고는 놀라서 꺅꺅 소리를 치기도 했다. 안드레아스는 그런 딸을 한 팔에 안고서, 멀리 보이는 섬과 등대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언젠가 모두 소녀의 상징적 소유가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녀의 아이들이 물려받을 유산이었다. 어린 소녀는 이내 하품을 했다. ‘여기는 너무 따분해. 바람은 짜고 햇볕은 뜨겁고 주변도 너무 조용하잖아.’ 비앙카와 안드레아스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긴 낚싯대를 등에 진 폰테인 남작이 헐레벌떡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들고 갔던 양동이는 물고기로 가득 차 있었고, 밀짚모자 아래로 벌겋게 그을린 얼굴이 꼭 어부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나오미가 까르르 웃는 동안 그는 황제와 황후에게 다가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알려 주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작에게 여인은 괜찮다며 위로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비앙카도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딸아이에게 들리지 않도록, 하지만 충분한 경악을 담아 반문했다.

“이안이 해변에서 없어졌다고요? 맙소사, 그 아이는 이 근처 지리를 전혀 몰라요! 에밀 경, 대체 그동안 뭘 하고 계셨던 건가요?”

남작은 더듬더듬 설명했다.

그와 이안은 인적 없는 낚시터에서 예상외의 수확을 올렸다. 의기양양해진 남작은 미끼를 더 얻어 오겠으니 그동안 꼼짝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소년에게 지시했다. 이안은 그가 가리킨 바로 그 곳에 앉았다. 원래도 어른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남작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질 좋은 미끼를 놓치는 것이 더 염려되어, 그는 서둘러 낚시용품점으로 향했다. 가게는 황실 사유지와 국립공원을 나누는 경계선 즈음에 위치해 있었다.

“제가 자리를 비운 것은 채 15분도 되지 않습니다. 도중에 저는 경호원 한 사람하고만 마주쳤을 뿐 외부인은 그림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폰테인 남작은 그런 말로 아이가 납치되었을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패닉에 빠진 어머니에게는 그런 말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비단 납치뿐 아니라, 이 넓은 바닷가에서 일곱 살짜리 소년이 마주할 수 있는 위험에는 수천 가지가 있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사이 나오미를 저쪽에 앉혀 놓은 황제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안드레아스는 즉시 경호원들에게 연락해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를 알아보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사내아이들은 가끔 그렇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라는 말과 함께.

비앙카는 날카롭게 지적했다.

“앤디, 모르겠어요? 이안은 여느 사내아이들과는 달라요. 그 애는 어른들 말을 잘 듣고, 얘기도 없이 아무 데로나 가 버리진 않는다고요. 이제 곧 밀물 때인데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아들을 직접 찾아 나서겠다는 어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나오미만이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비앙카는 경황이 없는 나머지 딸에게 작별 키스를 해 주는 것도 잊었다.

바닥이 얇은 샌들은 달아오른 백사장 위에서 금세 뜨거워졌다. 그녀는 불에 덴 고양이처럼 펄쩍펄쩍 뛰면서 모래밭을 가로질렀다. 폰테인 남작이 가르쳐 준 낚시터는 일광욕장 건너편의 낮은 구릉들 틈에 있었다. 파도가 발자국을 쓸어 가 바닥은 말끔했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여인은 주위를 필사적으로 둘러보았다. 키가 그녀의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소년의 모습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들의 이름을 소리쳐 부를 때, 갈매기들은 끼룩끼룩 구슬프게 울었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꼭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녀는 샌들 뒤축이 벗겨지는 것도 마다 않고 힘겹게 구릉 위로 올라갔다.

‘그 아이를 떼어놓지 말 걸.’

폰테인 남작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가 가족의 눈 밖에서 사고를 당하는 것만큼은 용납이 안 되었다. 테오도르는 비앙카가 없는 곳에서 쓸쓸하게 죽어 갔다-그 사실은 두고두고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나마 황궁 안에서는, 이안이 어디서 뭘 하는지가 전부 내 귀에 들어왔는데…….’

그녀의 눈이 바다와 땅 사이를 정처 없이 헤맸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푸른 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 일대에는 저렇게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아 관광객들의 발길을 끈다고 들었다. 어떤 섬들은 밀물 때에는 사라졌다가 썰물 때 다시 나타나 마법 같은 정경을 선사해 준다고-.

때마침 비앙카는 구릉에 솟아난 바위틈으로 난 작은 길을 발견했다. 비좁은 길은 언덕 아래쪽, 즉 바다를 향해 곧장 나 있었다. 호기심을 느낀 그녀는 그리로 방향을 틀었다. 몇 걸음 더 걸어가자 길 끝에 위치한 조그만 섬이 하나 보였다. 만조 때가 되면 저 섬도 바다 속에 잠겨 보이지 않게 되리라. 어머니만이 가질 수 있는 신비한 직감이 그녀를 섬으로 이끌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질퍽질퍽한 갯바닥에 찍힌 앙증맞은 발자국들이 많아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멀리도 왔구나. 그녀는 감탄인지 뭔지 모를 기분에 젖었다.

예상대로, 비앙카의 아이는 그 곳에 있었다.

자글자글한 구멍이 가득 뚫린 까만 바위들 틈에서, 아이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강렬한 여름 볕에 두 뺨이 약간 상기되어 퍽 건강해 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더운데, 모자나 양산도 없이 돌아다니다니! 비앙카는 날카로운 조개껍데기와 축축한 흙을 피해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서둘러 두 팔을 내밀며, 그녀가 말을 걸었다.

“이안, 왜 혼자서 이렇게 멀리 왔니? 얼마나 찾았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여인에 비해 소년은 별반 놀라지 않은 듯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무릎에 묻은 하얀 모래가 보였다. 그녀는 아이에게 다가가 옷과 손바닥을 정성껏 털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금 아들을 타일렀다.

“이안,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사라져 버리면 안 돼. 알겠지? 다들 걱정하시니까.”

“나오미가 저를 찾나요?”

‘왜 여기서 나오미 얘기가 나오는 걸까……?’

황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소녀는 햇볕이 너무 뜨겁고 바닷물이 짜다며 종알종알 불평을 하다가 지금쯤 지쳐서 파라솔 그늘 아래에서 잠이 들었을 터였다.

“아니야, 나오미는 낮잠 잔단다. 동생이 걱정돼서 그러니?”

“걱정하셨다고 하니까….”

이안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곤 앞장을 섰다. 무엇을 넣었는지 호주머니가 불룩하다. 비앙카는 아이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 그 말은 무슨 뜻일까?

이안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똑똑하고 예민한 아이였지만, 말수가 적어서 자기 생각을 다 털어놓는 일이 없었다. 가정교사는 가끔 아이가 너무도 당돌한 눈빛으로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시겠어요?’라고 묻는 것 같다고 불평하곤 했다. 황궁의 가정교사들은 대부분 실력보다는 연줄로 뽑히는 이들인지라, 비앙카는 아이에게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교사가 공연한 화풀이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 작은 두뇌 속에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지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런 그녀도 이번만큼은 아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결국은 이렇게 묻고 말았다.

“이안, 잠깐만. 내가 찾은 것은 너인데 왜 나오미 얘기를 했니?”

소년은 망설였다. 수줍어서라기보다는 정말로 대답을 해도 좋은지 아닌지 고민을 하느라 그런 듯했다. 그녀는 아들을 독려했다.

“여긴 너하고 나밖에 없잖니?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왜냐하면 나오미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찾으시잖아요.”

비앙카는 걸음을 멈추었다. 태연히 내뱉은 아이는 해안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하얀 모래사장과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뜨거운 볕이 쏟아졌다. 그녀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것도 잊고 아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안의 말이 맞았다. 황궁 사람들은 누구나 나오미가 이안을 제일 좋아한다는 것, 어느 때고 유일하게 따르는 사람은 제 오빠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녀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떼를 쓰거나 토라졌을 때 사람들은 으레 이안을 찾곤 했다.

보통 아이들이라면 낯선 곳에서 엄마를 보았을 때 울음을 터뜨리며 안겨 왔을 텐데,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밭을 혼자서 잘도 걸어가는 소년의 등이 곧았다. 그 꼿꼿한 등이 오히려 안쓰러워 비앙카는 가슴이 아팠다. 나오미도 그렇지만 이안도 절대 여느 아이들 같지는 않았다. 소녀는 차기 황제가 될 몸이니 그렇다 쳐도, 테오도르의 아들은 좀 더 말썽을 피우고 응석을 부려도 되는 것이었다. 다른 집 아이들이 하녀들한테 장난을 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비앙카는 동정심보다는 깊은 부러움을 느꼈다. 동시에 해묵은 죄책감이 고개를 들고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다. 나는 내 인생과 아들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저 애의 어린 시절을 빼앗아 버렸구나. 그 때문에 저 아이는 평생 나이에 맞지 않는 어른스러움을 지니고 살아가야 할 테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안. 그렇게 빨리 걸으면 금방 다리가 아파진단다. 나하고 좀 천천히 걷지 않으련?”

이안은 어머니를 기다렸다. 짭짤한 소금 냄새를 실은 바람에 소년의 연갈색 머리칼이 흩날렸다. 그녀는 여전히 주저하는 아들의 손을 재빨리 낚아챘다.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도 그 손은 서늘하고 하얗기만 했다. 그녀는 아이와 맞잡은 손을 장난치듯 흔들며 걸었다. 비앙카의 키가 더 큰데도 보조를 맞추어 주어야 하는 것은 도리어 어린 소년 쪽이었다.

“이안. 나오미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하고 앤디는 염려가 된단다. 여기는 넓고 위험한 곳도 많아서, 너 같은 아이들은 조심해야 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니? 여기뿐만이 아니라 어디서든 엄마는 ‘너’를 걱정하는 거야.”

“네, 잘못했어요.”

소년은 순순히 사죄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동작에서는 어떠한 반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과를 해야 될 사람은 난데…….’

비앙카는 한숨을 쉬었다. 이안은 말없이 그런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맑고 고요한 눈동자였다. 다음에 그가 한 말이 그녀를 또 놀라게 했다. 그녀는 충격을 받아 숨을 두 박자쯤 멈추어야 했다.

“저, 그런 말은 쓰면 안 된댔어요.”

“그런 말이라니? 어떤 말?”

“……‘엄마’라는 말이요. 그런 말은 써서도 들어서도 안 된다고-.”

“누가 너한테 그러라고 하든?”

이안은 더 말하지 않으려 했다.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고 하늘을 노려보았다. 그래-그 황실의 까다로운 법도가 아직 핏덩이인 아기를 어미에게서 떼어놓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엄마’라는 말도 쓰지 못하게 한단 말이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이안이 여동생에게 나쁜 병을 옮길 수도 있다며 황궁 꼭대기에 아이를 가둔 것은 바로 그런 법도에 휘둘리는 작자들이었다!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억울함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분명히, 그녀 자신도 아들과 거리를 두려고는 했었다. 이 아이를 너무 사랑하면 존경하는 남편의 명예에 흠집이 날까 봐, 샘이 많은 나오미가 상처를 입을까 봐, 그 음험한 폰 어윈의 비위를 건드려 테오도르의 비밀이 누설되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아들을 아끼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사람들-십중팔구는 그 꼬장꼬장한 살로메라는 노인네와 격식 따지기 좋아하는 황가 친인척들-이 비앙카가 모르는 사이에 아이를 다그친 것이었다. ‘엄마’라는 말을 쓰지도 듣지도 말라고!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는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안.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꼭 따를 필요는 없어. 황궁의 주인은 황제 폐하시고 나는 그분의 아내란다. 또 너는 내 아들이고 폐하는 네 아버지시지. 그러니까 너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나를 엄마라고 불러도 된단다. 나오미가 그러는 것처럼 얼마든지 그래도 좋아. 만약 그걸로 누가 너한테 뭐라고 한다면 그때는 엄마가 그 사람을 내쫓을 거야. 알겠니?”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괜찮아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황제 폐하나 황후마마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비앙카는 그의 말 뒤에 생략된 의미를 읽어 냈다.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아무래도 좋은 것 같은 투였다.

이 아이는, 친어머니인 나를 깍듯하게 ‘황후마마’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서투르기는 해도 안드레아스가 그 나름의 애정으로 자신을 감싸 주려 한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나오미의 기분을 알아차리는 데 도사인 소년이 부모님의 마음을 읽지 못할 리가 없다. 다만 그 꼴보기 싫은 유모가, 시녀들이, 가정교사와 귀족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를 그렇게 가르쳐온 것이다-귀족도 황실의 일원도 아닌 그가 공주와 똑같은 부모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그렇지만 그를 ‘오라버니’라 부르며 졸졸 따르는 여동생은 물론이거니와, 황실에서 키우는 사냥개 새끼들도 전부 어미 아비가 있었다!

비앙카는 충동적으로 소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이는 언제나처럼 멈칫거리다, 이내 힘을 빼고 어머니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그녀는 조그만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얘야. 너는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가족들을 부르면 돼. 그리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는 마렴. 네가 그래야 될 이유는 없단다.”

-솟아나는 애정을 억지로 참고, 뒤에서만 몰래 너를 안아 주는 것은 나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아이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까. 그것도 이렇게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비앙카는 그가 자신의 품에 머리를 묻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황후마마가 제 어머니지요……?”

그녀는 아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럼. 엄마가 너를 낳았으니까. 나오미보다도 먼저 낳았는걸.”

그녀는 내심 아들이 ‘그럼, 제 아버지는요?’라고 물어 오기를 기대했다. 테오도르에 대해서라면 그녀는 밤을 새우고도 남을 만큼 해 줄 이야기가 많았다. 언젠가 아들이 자라서, 아버지에게 일어난 비극을 담담히 받아들일 때가 오면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테오도르 폰 그린, 그가 얼마나 믿음직하고 다정다감한 남자였는지. 그이를 잃고 나서 아기와 단둘이 남겨졌을 때 얼마나 눈앞이 캄캄했었는지-.

그러나 예민한 소년은 아버지에 대한 화제가 어머니를 슬프게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자기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비앙카는 눈을 크게 뜨고 아이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이안이 손을 빼냈을 때,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정말 예쁘구나! 여기서 주운 거니?”

단풍잎 같은 손바닥 위에 얹힌 것은 진줏빛으로 반짝이는 하얀 조가비였다. 껍데기의 둥근 부분은 햇빛을 받아 찬란한 무지개 빛깔을 냈다. 울퉁불퉁했을 표면은 파도와 바람에 마모되어 매끈매끈해져 있었다. 구멍을 뚫어 메달로 삼아도 될 만큼 예쁜 조개껍데기였다. 비앙카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쓰다듬었다.

“이게 갖고 싶었니? 다 같이 찾으러 왔으면 좋았을 텐데.”

“남작님이 여기 많다고 그러셨거든요.”

이안이 변명하듯 말했다.

폰테인 남작은 호기심 많은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두 사람이 함께 낚시를 갔을 때 이 섬에 대한 얘기를 듣고, 해변에는 없었던 조개껍데기들을 찾으러 살짝 와 봤던 것이겠지. 그는 비앙카의 손 안에 조가비를 쥐어 주었다.

“……이건 선물이에요.”

“나오미 주려고?”

그녀는 무심코 되물었다. 나오미는 오빠가 주는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도 뛸 듯이 기뻐하며 받았다. 물론 이안은 여동생에게 정원에서 제일 예쁘게 핀 꽃과 가장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과자, 남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그림만을 선물해 주었다. 어쩌면 남매간에 그렇게 의가 좋을 수 있는지, 다들 신기해하며 물어 올 정도였다. 이에 안드레아스와 비앙카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 이유는 작은 남매들끼리만 아는 비밀이었기에.

그런데 소년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황후마마께서 가지세요. 나오미한테는 너무 크니까.”

손 안에 들린 조가비가 묵직하다. 그녀는 얇은 껍데기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몇 번이고 그것을 쥐었다가 폈다가 했다. 아이가 엄마를 위해 모래밭에서 찾아낸 선물은 어떤 보석보다 빛나고 값진 것이었다.

비앙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손에는 단단한 조개껍데기를, 다른 손에는 아이의 말랑말랑한 손을 쥐고서.

“나만 이렇게 좋은 걸 받아서 어쩌지?”

그녀가 소년을 바라보며 웃자, 그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이안이 웃는 모습은 제 아버지를 꼭 닮아서 어머니의 마음을 뿌듯하게 했다. 테오도르, 당신이 여기에 함께 있었다면. 한 번이라도 우리가 낳은 사랑스런 아이를 보았더라면. 그녀는 이제 그림자처럼 희미한 연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죽은 남편은 여인의 가슴에 꼭꼭 잠긴 방 하나를 차지하고 들어앉아 드물게 그 문을 열어 주곤 하였다. 테오도르를 잊는 것도, 잊지 않는 것도 죄책감이 드는 일이라 비앙카의 마음은 평안할 날이 없었다.

“우리, 나오미한테는 말하지 말까?”

“…….”

아이는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오미는 자기만 모르는 비밀이 있으면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눈치의 소유자였다. 자기만 쏙 빼고 어머니와 오빠가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을 알면 어떻게든 거기 끼어들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샘이 조금 많을 뿐 마음씨는 착한 아이니까 많이 서운해하지는 않겠지.’

따지고 보면 ‘아바마마, 어마마마, 오라버니하고만 해변에 가고 싶다’라고 했던 것도 그 깜찍한 공주님이 아니었는가. 황실의 일가친척을 방문했다가는 또 무슨 언짢은 말을 듣고 기분을 망쳤을지 모를 일이었다. 나오미가 그런 것까지 배려했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바다에 오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앙카는 조가비를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가 불룩해져 원피스의 날씬한 실루엣을 흐트러뜨렸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옷과 신발은 이안의 것처럼 하얀 모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 숨 막히는 황궁에서였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아무려면 어떻담.’

그녀는 느긋해지기로 했다. 나른한 오후의 태양이 마음에 여유를 더해 주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먼 수평선과 높은 하늘뿐인 이곳에서는, 차림새가 좀 흐트러져도 뙤약볕에 살이 까맣게 타도 괜찮았다. 또한 아끼는 아이를 마음껏 예뻐해 주는 것을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가 미소를 짓자, 이안은 눈부신 듯 어머니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이안, 배고프지 않니? 얼른 돌아가서 간식을 먹자. 나오미도 이제 슬슬 일어났을 거야. 폐하 혼자서 심심해하시겠다.”

끄덕끄덕. 고갯짓이 되돌아왔다.

모자 앞에는 갈 길이 아직도 멀리 뻗어 있었다. 더위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사납게 기승을 부렸다. 비앙카는 부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그것을 펴서 아이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이안은 그제야 눈살을 찌푸렸다.

“더워요.”

그 불평이 오히려 반가워,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