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황후 사하란의 유일한 친자인 나! 어이하여 나는 영원토록 굳게 닫혀 있어야만 했던 비밀의 상자를 열어버렸을까. 대체 어쩌자고 내 힘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나!

일개 후궁이었던 황후 사하란. 황후가 되었다고 그녀의 과업이 끝난 것이 아니다. 한의 절대권력으로 사하란이 욕망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따로 있다. 사하란을 막아야 한다! 그녀의 핏빛 욕망으로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기 전에…….

“영왕비도 앞으로 몸조심하세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음 표적은 바로 영친왕비이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혹시 황후마마께서는 이 나라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옵니까? 제가 보기에는 영유 황자를 한의 다음황제로 만드시겠다는 공언은 표면상의 명분일 뿐, 실질적으로는 황후마마께서 그 권좌에 올라서시려는 의중이신 듯하옵니다. 아니옵니까?”

2. 작가 소개

은서우

자칭 현실주의자라면서 머릿속에서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세상에 풀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느려터진 손에 한숨만 내쉬고 있다.

▣ 출간작

휘린(輝潾)

휘린(輝潾) 외전

휘린(輝潾) 2부

3. 차례

#제8장. 약조의 이행 (1)

#제8장. 약조의 이행 (2)

#제9장. 붉은 낙인 (1)

#제9장. 붉은 낙인 (2)

#제9장. 붉은 낙인 (3)

4. 미리 보기

사실 이서현은 최태경과 백연극단의 경극에 관한 논의가 조정에서 공론화되지 않기를 바랐었다. 최태경의 주장이나 그것과 관련성이 짙어 보이는 백연극단의 경극 모두, 청은 공주가 서 왕실의 혈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서현에게 있어서 은세희만이 유일한 반려였다. 설령 은세희가 서왕의 친자가 아니래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황실과 조정은 그렇지가 않았다. 서인 수뇌부의 핵심인사로서 황후와 대적하는 존재로 우뚝 서 있는 그녀를 자빠트리려는 정적들에게는 청은 공주의 혈통이 아주 중요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놓는 주장의 핵심은 이러했다.

과거 황제께서 서 왕실에 제안했었던 국혼의 전제조건은 ‘한의 황자비가 될 여인은 서 왕실의 혈윤이어야 한다.’였다. 그러므로 서 왕실과 무관한 핏줄은 결코 한의 황자와 국혼을 올릴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한 황실을 기만한 서 왕실에도 사과를 요구하고 그 책임까지 물려야 한다. 국혼의 무효화, 그리고 영친왕비의 폐서인. 그것이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였다.

동인 강경파들의 지나친 주장을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었던 이부시랑 구동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강민준 한림좌승지는 말씀을 삼가십시오! 영친왕 전하와 영친왕비께서 황실의 축복과 만백성의 경애 속에서 가연을 맺으신 지 어느덧 다섯 해가 되어갑니다. 종묘에 고한 지 오래된 국혼을 어찌 물릴 수 있단 말입니까? 서에서 오신 청은 공주께서는 이미 한 제국의 영친왕비십니다!”

“이부시랑이야말로 논점을 흐리지 마시게나. 당시에 우리 조정신료들과 한의 백성들은 서 왕실의 공주를 황자비로 모셨네. 만일 그 존재가 서 왕실의 핏줄도 아님을 알았더라면, 우리 동인은 결단코 서나라와의 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일세!”

그러자 공부시랑 부동수도 공박했다. 그를 포함한 일부 관원들은 영친왕비는 서 왕실의 혈윤이 아니라고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일종의 여론몰이에 호부상서 정진우가 나섰다.

“귀관들의 말씀에는 의아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귀관들께서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청은 공주께서는 현재 우리나라의 영친왕비십니다. 허니 그분의 혈연관계에 대한 논의는 매우 신중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헌데 여러 관원들께서는 공신력이 없으며 발언의 의도도 의심되는 특정인의 주장에 휘둘리시는군요.

대중들의 구미에 부합하게 상상력을 발휘하여 창작된 경극의 내용도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이십니다. 뛰어난 지성과 냉철한 판단력을 갖추신 분들께서 어찌 한갓 흥밋거리에 불과한 이야기를 맹신하는지, 본관으로서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습니다.

귀관들께서 잘못 판단하신 게 아니라면, 검증되지도 않은 궤설과 상업성이 강한 허구적인 이야기가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출하시는 걸까요? 모두가 함께 말입니다.”

진우는 최태경의 주장과 백연극단의 ‘위왕녀지담’ 공연을 근거로 영친왕비의 혈통을 문제시하던 관원들을 사실과 이야기를 구별하지 못하면서 사기꾼이나 진배없는 특정인의 계략에 쉽게 휘말리는 바보로 만들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일고할 가치조차 없는 사안을 불순한 의도로 정쟁화하는 모리배가 되었다. 이러나저러나 그들은 못난이로 취급받거나 부정적인 인물로 매도되는 셈이다.

“뭐라고? 호부상서께서는 지금 우리들이 허튼소리나 하고 있다고 지적하는가!”

이에 무위장군 추부길이 발끈했다. 그는 앞서 조회의 초반에 영친왕비의 혈통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었던 표기대장군 문현을 적극 지지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진우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영왕비마마께서 서 왕실의 혈윤이 확실했다면, 어찌 최태경 같은 자가 등장할 수 있겠는가? 또 최태경의 주장이 모조리 거짓이라면, 어떻게 그런 경극이 백성들에게도 흥행할 수 있겠나? 호부상서께서 그만 잊어버렸나 본데, 항간에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말이 있네.”

“최태경의 궤변과 경극 ‘위왕녀지담’의 내용이 사실처럼 느껴지신다면, 이참에 서에 국서를 보내어 그 진위여부를 확인해보심이 어떠하십니까? 서 왕실에서 영왕비마마를 여전히 서의 공주라고 인정한다면, 그분의 신분에 관한 논쟁도 깔끔하게 해결될 겁니다.”

정진우가 내놓은 대책의 이면에는, 명확한 사실을 근거로 활용하지 않고 고작 한 사람의 주장만을 참고해서는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만 내놓는 논쟁이야말로 무의미하다는 지적이 깔려 있었다. 정곡을 찌르는 공격에 추부길 등의 동인 강경파들은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틈새를 예부상서 박민제가 파고들었다.

“나도 호부상서의 제안에 동의하외다. 조정의 결의에 따라 서에 국서를 보내어 사실을 확인하고, 어사대로 하여금 최태경과 백연극단을 면밀히 조사하게 합시다. 만일 최태경이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영친왕비마마의 명예를 훼손하고 황실을 능멸했다고 판명되면, 당장에 국청을 열어서 그자의 죄를 엄히 다스리지요.”

이에 후장군 주명환이 반박했다.

“허나 나는 이번 문제의 해결을 서의 답신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오. 만일의 경우를 가정한 말이지만, 서의 왕실에서 청은 공주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숨기고 공주는 그쪽의 혈윤이 분명하다고 거짓으로 답변할 수도 있지 않겠소? 여태껏 청은 공주의 진짜 혈연관계를 숨겨온 서의 왕실이라면 끝까지 우리나라의 황실과 조정을 기만할 공산이 크외다.”

서 왕실의 답신이야말로 믿을 수 없는 증좌라는 주장은 순간 멈칫했었던 동인 강경파들에게 새로운 힘을 실어주었다. 당장 부동수부터서 주명환의 주장에 적극 동조했다. 그러자 서인에서는 그들에게 얼토당토않은 억지는 그만부리라고 공박했다. 서인과 동인이 극심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대부 조영훈이 엄정히 말했다.

“영왕비마마의 혈연관계에 대해 의혹을 품고서 그 사실 여부까지 확인해달라는 요청이야말로 서와의 외교관계에 있어 크나큰 결례를 끼치는 짓이네. 이미 서 왕실에 심한 모욕을 안겨준 입장에서 그 답신의 내용을 무조건 의심하는 태도는 결코 온당치 않네. 서 왕실에서 영친왕비는 그 나라의 공주가 확실하다고 공언한다면,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

그 나라의 왕실과 조정에서 영왕비마마를 공주로 인정하는데, 어찌 타국의 조정에서 이의를 제기한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영왕비마마께서 서의 국왕의 친자인지 아닌지를 가장 명확하게 분별해줄 수 있는 쪽은, 신원조차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은 위인보다는 그 나라의 왕실이라고 판단하네.”

“조 대부의 말씀에 소직도 한마디 덧붙이겠습니다.”

거기다가 이부상서 이종호도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표기장군님과 비롯한 일부 동인들께서는 영왕비마마의 혈연관계에 대한 의혹은 황실의 명예와 위엄에 직결된 문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헌데 조정에서 고려할 점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번 논란이 서와의 국교에서 어떠한 악영향을 끼칠지도 고찰해야 합니다.

재작년 십일월에 진명 세자가 해상제국인 진을 정복하여 자국에 복속한 이후로, 서는 더 이상 과거의 서가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서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기존의 관계를 재정립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여 표면적으로는 황제국과 제후국으로 구별되지만, 그에 따른 군신관계가 이전처럼 실질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과거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서의 국위를 고려한다면, 이번 문제를 섣부르게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조 대부와 이부상서의 말이 맞네. 이참에 서와의 국교를 단절할 것이 아니라면, 현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 객관적인 물증도 없이 고작 한 사람의 궤변에 휘둘리는 꼴들도 우습지만, 서로의 당익만을 우선시하여 서 왕실과 영왕비마마의 관계에 대해 성급하게 억측했다가는 외려 우리나라의 체면과 위상만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네.”

태위 이노민도 나서서 동인에 대한 서인의 반격을 거들었다. 문현의 발의를 시작으로 일어났었던 의혹은 영친왕비의 입지까지 뒤흔들어버릴 것처럼 거세었으나 지금은 상당히 진정되었다. 판세는 확실히 영친왕과 서인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졌다. 동인 강경파들도 이쯤 되면 말을 잘못 보태었다가는 오히려 자기들의 입장이 난감해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으로 형부상서 백거이가 일어섰다. 그는 단호한 얼굴로 황제께 주청했다.

“폐하, 소신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확한 물증을 근거로 제시할 수 없는 논란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옵니다. 하오니 소신은 서나라에 국서를 보내어 현 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드리는 한편으로, 현재 장안에 체류하고 있다는 최태경을 추포하여 그자가 무슨 의도로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지를 면밀히 조사할 것을 청하옵니다.

아울러 경무청에 백연극단의 ‘위왕녀지담’ 공연을 중단시키라고 하명하시옵소서. 진실이 명료하게 규명되기 전까지는 최태경의 주장과 백연극단의 공연이 장안백성들에게 널리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하옵니다. 황실의 위신과 영친왕비의 명예를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조처되어야 하옵니다.”

“알겠다. 짐은 형부상서의 제언을 받아들이겠다.”

연은 허락했다. 이로써 전반부에서는 서의 왕실이 오랫동안 한의 황실과 조정을 기만했다는 진실을 밝혀준 ‘훌륭한 고발자’였던 최태경이 후반부에서는 근거 없는 망설로 영친왕비에 대한 불경을 저지르고 한의 황실을 능멸한 ‘발칙한 모사꾼’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박의문이 문현을 비롯한 동인 강경파를 움직여 영친왕비의 혈연관계에 대한 의혹을 공론화시켰던 목적은 달성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동인 강경파의 입장도 심히 난처해졌다. 영친왕비를 신하가 정성을 다해 보필하는 황족이 아닌, 권력투쟁에 있어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정적으로만 보았다는 비난을 피하기가 어려워졌다.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불충했던 작태는 대역죄에 필적하는 대죄로 엄히 다스려질 수도 있었다.

만일 백성들이 서 왕실의 핏줄이 아닌 공주는 결코 한 황실의 친왕비로 받을 수가 없다고 거세게 반발했다면, 동인 강경파의 주장에는 강한 정당성까지 부여되었을 터. 지난해에 소영 공주를 본국에서 추방시켰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행위의 명분으로 민심을 내세웠을 것이니.

그러나 이번에는 민심이 그들의 필요만큼 충분히 결집되지 않았다. 만일 백연극단의 단장과 부단장, 일부 단원들이 갑작스럽게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황후께서도 당신의 측근들에게 최태경과 영친왕비의 관계에 대한 의혹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으셨으리라.

정민규는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는, 슬쩍 눈길을 박의문에게로 돌렸다. 황제와 영친왕 쪽을 응시하고 있는 박의문은 비교적 침착해 보였다. 가슴속을 불태우는 감정을 결코 겉으로 내색하지 않겠노라고 스스로를 통제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황후와 동인에게 불리해진 상황을 타개하는 방책을 마련하는 데에 골몰하리라.

민규는 박의문이 최태경을 어떻게 할지가 궁금해졌다. 황제께서 최태경을 혐의자로 공언하신 지금, 박의문도 계속해서 그자를 명동의 별가에 숨겨놓기가 곤란할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황후의 최측근인 박의문이 정치상의 책략으로 최태경을 이용했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으니.

그렇담 박의문은 일찌감치 후환을 없애두는 쪽을 택할지도 모른다. 허나 황상께서는 최태경이 박의문의 손에 음밀히 처리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셨다. 황상께는 최태경의 목숨을 내주고픈 사람이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