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저는 그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도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이렇게 죽습니다.

눈을 떠보니 내가 쓴 글 속. 그리고 나는 악하디악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여자 조연 ‘에본느 라이네’가 되어 있다. 그리고 올해는 에본느 라이네가 본격적으로 죽음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는 그 해. 그런데 어째서 내가 쓴 것과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내가 쓴 적도 없는 설정들이 존재하나. 까닭을 알 수 없는 내 감정들은 어찌 된 일이며, 까닭도 모르는 이 본능 같은 것들은 어찌 된 일인가.

내가 잃어야 하는 그것들은, 과연, 글의 이야기인가.

나의 꿈은 정녕 꿈이었나.

“제가 당신의 생명을 거둡니다. 원망, 하십니까?

“아니요.”

“해주십시오. 당신을 제 손으로 거둬야 한다면, 당신과의 관계도 잃고, 그 죽음 속에서 살겠습니다.”

“결코 자책하지 마십시오. 난 내 죄로 죽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죄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매 순간 행복하였던 저를 좀, 봐주십시오.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그 숨결 하나하나마다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제발 살아주십시오.”

2. 작가 소개

작은밤

글쓰기를 좋아하고 상상하기를 좋아합니다. 촉촉한 느낌의 햇빛이 내리는 오전을 좋아합니다. 그 시간에 글을 쓰는 건 더더욱 좋아합니다.

3. 차례

#Prologue. 스물여덟, 미련한 자의 종언(終焉)

#CHAPTER 1. 스물다섯 (1)

#CHAPTER 1. 스물다섯 (2)

#CHAPTER 2. 악을 위하여 (1)

4. 미리 보기

지구에서의 나는 평범했다. 자존심은 강했고, 어쩌면 자존감도 강했다. 아니, 아니다. 자존감의 경우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고 생각한다. 명예를 드높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고,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기를 바라는 야욕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화하기에는 내 욕심의 크기가 부족했고, 끈기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그런 야망이 간절하지가 않았다.

내가 내 시간을 온전히 투자하기를 마다치 않은 건 다른 분야였다. 나는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다면 며칠을 굶어도 좋았고, 사색에 잠기는 것도 좋아했다. 나는 그런 활동들로 인해 내가 살아 있음을 느꼈고, 내가 지쳐 있음을 느꼈다.

사색에 잠겨 있다가 형체 모를 갈망으로 초조해질 때가 있어도 나는 또다시 그 초조함으로 말미암아 내 생명을 느꼈다. 나는 살아 있었으며, 살아 있기에 살고 있었으나 죽어야 한다면 죽을 것이며, 죽는 것이 싫었고, 만일 죽는다면 평온한 가운데서 죽기를 바랐다. 나는 살아 있는 것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 애매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생계를 위해 번역 일을 하였다. 그러다 외국으로 나와 살게 된 까닭은 어느 날의 갑작스러운 충동 때문이었던가. 충동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일이었으나 세심하게 계획을 짜서 실행하였다. 나는 미래를 운에 맡기는 걸 상당히 두려워하는 편이었으므로 어떤 일을 실행함에 있어 계획이 없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마주한 외국은, 실로 좋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일감의 양은 거의 그대로인데, 외국에 나오니 어째서인지 마음에 여유가 생기더라. 서양의 건물들을 보면 이유도 모르게 입맛이 쓰고 불안한데, 그럼에도 마음에 친근한 여유가 생겼다.

덕분에 번역도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일을 했으니 돈은 여전히 들어오는 와중 나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좋은 일이었다.

들뜬 고민 끝에 나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오로지 내 환상과 상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아,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던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그것을 쓰기 시작했다. 글은 가볍게 쓱쓱 써졌다. 얇은 노트가 열 권이 넘고, 스무 권에 달해가도록 내 상상은 멈추지 않았다.

이야기의 모든 요소 하나하나 타당하고 온당하기를 바라며 전개하니 그리도 길었다. 그리고 끝은 평범한 권선징악으로 맺었다. 내가 쓴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한 선한 여자주인공이 있고, 그 여자주인공을 사랑하는 주변 인물들이 있으며, 여자주인공을 질시하여 적대하는 악한 여자가 한 명 있다. 여자주인공은 악한 여자에 의해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는데, 신묘하게도 다시 살아난다. 더 신묘한 부분은 시간을 되돌아왔다는 부분일까.

자신이 어찌 몰려 죽었는지를 기억하는 여자주인공은 이번에는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그 여자주인공이 악한 여인을 적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악한 여인의 악행이 여전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아무것도 후회치 않고 끝까지 여자주인공을 죽이려 하던 악한 여인은 결국 비참하게 죽게 되는 것으로 끝맺는 이야기. 이미 언급했듯, 평범한 권선징악이다.

……징벌당할 악이 내가 될 줄 알았다면 그렇게 쓰지 않았을 텐데. 글 속 세계에서 내가 살게 될 줄 알았다면, 이리 살벌한 세계, 참 평화로운 꽃밭으로 만들어놓았을 텐데…….

평화롭고, 평화롭다 못해 이 세계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이 바보가 될지라도, 내가 오게 될 줄 알았다면 세계관에 괴물 같은 건 넣지 않았으리. 여자주인공을 적대하는 인물 같은 것도 결단코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의 글 속에서 살기 위해 글을 쓴 순간이 한순간도 없었다.

‘당신이 그리도 질색하는 이 세계의 잔혹함이 어느 정도냐.’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살해당하여 죽은 내 영혼이 쉴 곳이 신의 품이 아니라 제2의 세계라는 걸 알았을 때 느꼈던 멘탈 붕괴보다,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알았을 때 온 멘탈 붕괴가 더 심할 정도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여기가 어떤 글 속이라는 건 상관없다. 내가 썼다는 사실 자체도 아직은 그다지 수치스럽지 않다. 주인공들끼리 하하 호호 웃으며 짝짜꿍해도 괜찮아. 얼마든지 악녀의 손에서 살아남아라. 다 괜찮다. 다 괜찮은데, 이 글의 세계관이 내게 있어 단 하나의 문제였다.

이곳.

사람을 살해하는 괴물들이 살고.

심지어 그 괴물 종족 대부분 인지능력이 있고.

어떤 괴물은 인간만큼 영리하며.

어느 왕국들은 전쟁 중이고.

신분 고하가 존재하는 그런 세계.

그리고 그런 세계에서 나는 여자주인공에게 종국에는 징벌당할 악이 되었다. 시간을 돌아오기 전의 여자주인공을 죽음까지 몰고 갔다 하던 그 악한 여인. 그 사람의 몸을 내가 입어버렸다. 그러나, 글쎄, 그 사실에 대한 충격은 내 정신을 추스른 다음에야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세계에서 눈뜬 나는 그날로부터 며칠을 헤맸다. 내 자아, 내 사후세계, 내 휴식을 찾아서. 기왕에 죽은 것. 이상하리만큼 나는 쉬기를 원했으며, 드디어 죽었음에도 쉬지 못한다는 사실에 많이도 절망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나는 천천히, 정말 천천히, 적응해나갔다.

괴물로부터 신성한 힘으로 보호받고 있는 수도는 괴물들이라곤 떠올릴 수도 없게 화사하였다. 을씨년스럽지 않았다. 이곳도 무언가 생명체가 사는 곳이라고 햇빛이 내리고, 산들바람이 불고, 비도 내리고, 이파리가 파랗게 햇빛 받아 빛나는 그런 따스한 곳이었다.

나는 내가 지구에서 살해당한 후 온 이 글 속 세계에도 나름의 생명들이 움직이고 있음을 인지하고 인정했다. 과연 지구에 존재하는 나와 같은 ‘진짜’ 생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니, ‘진짜’ 생명이라 생각지는 않으나, 마치 글의 세계를 지구 삼은 것처럼 이 세계는 그 나름대로의 생명을 가지고 있었다.

아, 이만 정리하겠다. 이 세계에, 내가 쓴 글 속으로 오게 된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어쩌면 죽은 뒤 꾸는 짧은 꿈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눈을 뜨면 나는 하늘에 있고, 신의 품에 보듬어 안겨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어쩌면, 지구의 나는 아직 죽지 않아서 혼수상태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여기는 잠시 거쳐가는 곳. 정도 이상의 정은 훗날 필시 나를 힘들게 하지 않겠느냐고. 혹시라도 지구에 돌아가게 된다면, 환상 속에서 내가 가장 바라왔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해하다가 돌아가는 것보다는, 이 메마름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그런 불안한 각오를 하고도 나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며 많이도 변했다. 변화라는 건 나도 모르는 새 찾아오는 것이더라.

지구에서의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일상인 사람이었고, 사람과 만나는 것을 꺼리고,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기피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앉아서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사람 죽는 것은 본 적도 없고 죽여본 적은 당연히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전반적으로 날 내보이고 돋보이게 하길 지독하게 두려워하는 사람, 틀에 갇혔으나 지독하게 계산적이었던 사람, 입 다물고 뒤로 물러나 사람을 관찰하는 편에 가까웠던 사람,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모르는데 사랑받기를 몹시도 원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여섯 살에 눈떠, 이제 이십 대 중반에 들어선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괴짜로 소문난 지체 높은 소공녀다. 내게는 나보다 더 말썽을 피우는 친구와 나를 호위하기 위하여 가주 자리를 버린 친구도 있으며, 나를 아끼는 동생도 있고, 고귀한 황태자가 선뜻 내 절친한 친우이노라 말해줄 정도로 친분을 쌓았다. 자주 가출하여 여행을 다니기도 하며, 그런 짓을 하면서도 공작위를 거의 보장받다시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죄인들과 악연을 쌓을 정도로 나 자신을 놓고, 버리고, 지켰다. 이 세계에서의 내가 원래의 나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천방지축으로 굴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간단하다. 앞서 말하였던 그 각오의 기저에 깔린 생각이 있기에.

어느 날 갑자기 지구로 돌아갈지도 모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그 각오는, 이 세계는 내 세계가 아니라 생각하기에 할 수 있는 각오였다. 아하, 그렇다. 이 세계는 내 세계가 아니다. 아마 앞으로도 아닐 테며.

그래서 나는 ‘현실’에서 하지 못했던 언행을 할 수 있었다. 현실감은 어느새 자라나 날 붙들고 있다가도 문득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글 속 악한 여자의 몸 안에 있는 내 존재, 이 세계에 섞여 있되 현실 아닌 세계라 묘하게 현실감을 잃거나 없애고 마는 것이다.

그 기묘하게 막연한 느낌. 붕 떠 있다가 어느 날 정신 차려보면 이 세계에서도 눈감을 것 같은 그, 느낌. 안개와도 같이 축축하고 부옇다.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 왜 온 걸까.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은 많다.

그러나 이 몸으로 눈뜬 이래 이제껏 내가 걸어온 길을 보라. 우연찮은 일도 많았고, 즐거운 일도 많았다. 언젠가는 떠날지도 모를 곳에서 겪기에는 지나치게 많이 겪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서 쌓아온 내 길과 내 가치에 나는 만족한다. 하여, 남은 건 계속해서 살아남는 일뿐이다.

이 세계를 세우며 내가 만든 이 몸의 주인은, 일견 선하게 보이는 자리에도 있고 철저히 악하게 보이는 자리에도 있는 이중적인 범인(凡人)에 불과한 사람이고,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여주인공을 미친 듯이 질투하여 스스로 침몰하고 마는 조연이기도 하며, 여주인공에게 빠져 누나를 경멸하게 되는 남동생을 가진 조연이기도 하며, 수많은 사람에게 적대당하는 악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악한 사람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그 설정들을 부정해왔다. 글 속에서 이 몸이 처해야 했던 그 나쁜 상황들을 피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여자주인공에게 복수로 살해되는 건 슬프고 두려운 일이므로.

죽어야 한다면 평화롭게 죽기를 원한다. 본디부터 가지고 있던 그 본능은 지구에서 살해당하며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나아가, 죽어야 한다면 부디 명예롭게 죽기를 바란다.

이 몸이 여자주인공을 죽음까지 몰고 가는 첫 시간인지, 아니면 도중에 여자주인공이 시간을 되돌아와 이 몸이 죽는 시간인지는 모른다. 그에 대해서는 어떠한 힌트도 없기 때문에 더욱 불안해지고 말지만, 어찌 되었든 어떤 시간에서라도 내가 살아남기를 원한다. 살아남으려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다. 결코 여자주인공에게 죽임당하지 않으리.

그리고 나는, 살고 있기에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던 예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그 각오가 기묘하리만큼 간절한 갈망임을 인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