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딸기로군. 작고, 앙증맞고, 귀엽지만 촘촘히 박힌 씨처럼 빈틈없어 뵈고, 그렇지만 막상 속은 말랑말랑할 거 같으니까.”

잘생긴 외모, 탄탄한 집안, 출중한 능력까지 다 갖춘 정도진 사장. 모든 여자들이 그를 탐내도 예외인 딱 한 사람이 있다. 비서계의 철벽녀 서가인! 연애경험이 전무한 데다 공사 구분이 확실한 그녀의 심장을 두드리는 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데……

“하지만 지금이 과연 적절한 때일까요?”

가인이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도진이 가인을 가볍게 당겨 미간에 살짝 입 맞췄다. 그러자 가인을 둘러싸고 있던 심각한 분위기가 와르르 무너졌다.

“가인, 난 한 번도 당신과의 관계를 가볍게 생각해본 적 없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과 결혼하고 싶고, 당신과 사랑하고 싶고, 당신과 내 아이를 낳고 싶어. 당신은 그렇지 않아?”

2. 작가 소개

한하연

쓰는 일이 좋아서 시작했다가 지금도 쓰고 있는 평범한 글쓴이.

동화와 귀여운 걸 좋아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면도 있는 그런 사람

▣ 출간작

그녀는 수학을 배운다

엘핀느의 꽃

붉은 벨벳 위 하얀 진주 한 알

달콤한 말 세 방울

푸른 단검과 흰 장미

집(House)(단편집)

비밀의 숲(공저)

맑은 하늘 푸른 잎새

목련화

루비아스 마티아스

3. 차례

#8. 복숭아는 속살이 달콤하다

#9. 수박은 겉과 속이 다르다

#10. 두리안은 아무나 먹지 못한다

#11. 아픈 이로 딸기를 깨물면 시리다

#12. 베리류는 몸에 좋다

#에필로그

#외전 1

#외전 2

4. 미리 보기

가인은 가벼운 트레이닝복을 입고 한강 둔치에 서 있었다. 챙 모자를 눌러쓰고 물병 하나를 든 가인은 하나둘 지나다니는 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가인과 도진의 제주도 출장은 생각보다 일찍 일정이 끝났다. 도진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같은 공간에 있다 보면 자제하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신혼부부 콘셉트라고 생각할 때는 괜찮았는데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자 가인도 너무 떨려서 내심 빨리 끝난 일정에 안도하고 있었다.

둘은 회사에서는 철저하게 비밀로 하기로 했다. 둘 다 어린 나이가 아닌지라 소문의 파장이 얼마나 클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문이란 사람들 입을 통하는 동안 대부분 부풀려지고 부정적으로 흐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가인도 아직은 도진의 밑에서 일하고 싶었기 때문에, 공과 사는 철저하게 나누자고 약속했다. 만약 그게 힘들게 되면 자리를 이동하기로 합의를 봤다.

그리고 둘만의 비밀 데이트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초반에는 별거 아닌 걸로도 길어지는 통화에 아침마다 졸린 눈을 부비고 인사하기도 했었다. 회사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서울 이곳저곳을 다니는 것도 즐거웠다.

도진은 신중하고 보수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어서, 좋다는 마음을 확인했어도 급하게 스킨십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니면서 해주는 크고 작은 배려들은 가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향한 도진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만남이 세 차례가 넘어가서야, 가인은 자신이 도진에게 특별하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뜨문뜨문 이어진 만남은 함께하는 시간을 아름답게 물들여주었다.

가인은 한강을 지나가는 반짝이는 유람선을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작은 일상도 그 사람이 있음으로 달라진다는 사실이 묘하게 짜릿했다.

“일찍 왔네.”

어깨를 살짝 잡는 손과 낯익은 저음의 목소리에, 가인이 회사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환하게 상대를 맞이했다. 도진도 그런 가인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훤칠한 키에 걸친 트레이닝복은 별다른 무늬가 없는데도 매우 귀티 나 보였다.

“여전히 멋지네요.”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다시 한 번 말해줄래?”

“음. 내가 선심 한번 써서 다시 한 번 말해주죠.”

그러더니 가인이 까치발을 들어 도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멋있다고요. 세상에서 내 남자가, 제일.”

그 말을 듣자마자 도진이 못 당하겠다는 표정으로 가인에게 답했다.

“새삼 느끼는데 매번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어.”

“그럴 리가요. 난 별로 애교가 없는걸요.”

“아니야. 그건 가인이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참, 충고 하나 하는데, 꼭 들어줘야 해.”

“뭔데요?”

그러자 도진이 짓궂게 웃으며 가인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숨결에 간지러워 가인이 몸을 움찔하자, 도진이 낮게 속삭였다.

“다른 남자한테는 그렇게 말하지 마. 챙겨주지도 마. 나한테만 하도록 해.”

가인이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아빠나 남동생한테도요?”

“흠. 그쪽은 조금만 해줘. 나머지는 나한테 다 해주고.”

“와, 우리 도자기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참…….”

그러나 가인은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저 멀리서 낯익은 매우 간드러진 여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어머, 자기이이. 나 기다렸어요오오? 영화도 얼마나 자기가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오오.”

아무나 할 수 없는 꼬인 발음에 도진과 가인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화려하게 차려입은 영화가 한 남자에게 낙지빨판처럼 매달리며 콧소리를 심하게 내고 있었다.

다행히 영화는 오로지 남자에게만 집중하느라 두 사람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도진과 가인이 서로 눈이 마주치자, 둘은 별다른 말이 없이도 손발이 척척 맞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여느 연인처럼 점점 걸어오는 영화로부터 멀어져갔다.

영화가 어느 시점에서 걷기를 멈추고 마치 팥 앙꼬가 팥빵 속으로 들어가듯이 남자의 품으로 쏙 들어가서 남자 입술에 입을 쪽 맞췄다. 남자는 얼굴은 우락부락했지만 키가 작고 왜소한 편에 속했다. 다만 차림새나 액세서리가 고급스러웠다. 단순히 썸 탄다고만 보기에는 과한 스킨십이었다.

가인은 소라가 문어다리 오징어다리 하면서 도리질하던 이유를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도진이 재미있다는 듯 장영화 뒤편 눈에 잘 띄지 않는 으슥한 곳으로 가인을 이끌었다. 가인이 장난스럽게 도진에게 대꾸했다.

“와, 도자기 씨,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이런 데로 갑자기 끌어들이고……. 기다려준다고 하더니 너무하네요.”

“흠. 난 우리 쁜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는데. 조금만 더 천천히 알아보자고 하더니 기다리고 있었나? 자, 오해는 말고 조용히 하고 잘 들어봐.”

가인이 도진의 말대로 말을 멈추니, 아주 크게는 아니었지만 영화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게다가 영화가 평소보다 톤을 높게 하고 주변은 신경을 전혀 안 쓰고 있어서 더 잘 들렸다. 민망할 정도로 큰 쪽쪽 소리와 함께 영화가 말을 시작했다.

“자기, 역시 회사생활은 너무 힘든 거 같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야.”

“누가 우리 꽃님이한테 나쁜 소리를 해? 이 오빠가 혼내줄까?”

우와, 꽃님이래. 이름에 ‘화’자가 들어간다고 꽃님이라고 부르나. 아마 소라 씨가 들으면 화병의 화자라고 하겠지. 촌스러운 작명센스에 속으로 가인이 도리질하다, 자신들의 애칭도 만만치 않게 촌스럽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평소보다 한층 앵앵거리는 소리로 영화가 말을 이었다.

“그러게. 오빠가 확 혼내주라. 이소라라고, 입사 좀 일찍 했다고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남친이 없어서 허전해서 더 히스테리인가, 나한테 얼마나 별거 아닌 거로 트집 잡는지 알아?

내가 매일매일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는데. 내가 일도 잘하고 회사에서도 예쁘게 꾸미고 다니니까 아무래도 열등감 폭발한 거 같아.

일 때문에 자기 사무실 자주 갈 수도 있는 거 아냐? 상사가 상무고 전무고 이사지 자기도 같은 직함인 줄 알아. 막 면박을 주면서 볼일 다 봤으면 가야죠, A4용지는 비품이니까 그만 빌리러 오고 제때제때 신청하세요, 복사기는 우리 사무실보다 김철민 전무님 쪽이 더 가깝지 않나, 이런다니까.

그리고 저번에는 자기 자리에 좀 앉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까지 하는 거야. 일은 언제 할 거냐면서. 아니, 당연히 갈 만하니까 내 일 처리하고 간 거 아니겠어?

그리고 일하다 보면 서로 상부상조하는 거지, 얼마나 구두쇠같이 떽떽거리는지 몰라. 하다못해 믹스커피 하나만 가져가도 눈을 부라린다니까. 사람이 융통성이 없어요, 융통성이.

같이 다니는 사람도 다 똑같아요. 왜, 사장님 비서인 서가인 씨라고 있거든? 내가 일이 많아 보여서 회의 때 브리핑 자료 나눠준다니까 자기 일이라고 쌩하고 가버려요. 끼리끼리 논다니까. 그렇게 딱딱하게 일하는 게 일 잘하는 줄 알지만, 사실 그때그때 융통성 있게 행동하는 게 비서로서 할 일 아닌가?

내가 우리 상무님 얼마나 생각하는 줄 알아? 점심식사 후에는 낮잠 좀 주무시라고 오후에는 어지간하면 상무님 방에는 얼씬도 안 한다고. 몸에 좋은 차도 잘 타드리고 말이야. 저번에는 좋은 여행지도 소개시켜드렸다니까.

기계처럼 스케줄 맞춰서 딱딱 해내야 비서로 잘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게 아니지. 다들 기본 소양이 안 되는 거 같아. 그래서 참 피곤하다니까.”

같은 상황이 저렇게도 해석이 된다는 게 참 신기했다. 자기가 한 일은 최대한 포장하고 남의 일은 최대한 깎아내리며 스스로를 칭찬하는 신기한 화법에 가인은 화를 낼 타이밍도 놓친 채 듣고 있었다. 옆에 있는 도진을 슬쩍 보니, 표정의 변화가 없어 무슨 생각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야, 우리 꽃님이 같은 인재를 몰라보다니, 세진그룹도 다 됐네.”

“그치, 자기? 하지만 뭐, 내가 참아야지. 똑같이 싸워봤자 똑같은 사람밖에 더 되겠어? 능력이 없으니까 만날 스케줄 타령하면서 자리나 지키고 있지. 나처럼 일 제때 해놓고 여유 있는 사람을 질투한다니까.

확 인터넷 게시판 같은 데 직장 고민이라고 올려서 속이라도 풀었으면 좋겠어. 사실 전에 한번 익명으로 올렸는데 호응이 완전 뜨겁더라고. 어디가나 직장에 진상은 있는 법이잖아. 공감을 얻은 거지.”

가인은 그 진상이 바로 너라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어떻게 말을 꼬았는지는 몰라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벽히 바뀐 이야기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다. 원래 그런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고 듣는 건 기분의 정도가 상당히 달랐다.

장영화가 맡은 신세기 상무는 업무상 당일 국내 출장이 많은 편에 속했다. 성격도 소탈하고 시원시원해 자질구레한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고, 원칙상 영화가 따라가서 보조해줘야 하는 일도 자주 출장을 따라오면 힘들 게 많다며 빼주는 경우가 많았다. 비서실 쪽에서는 영화가 맡은 곳은 속된 말로 ‘꿀 빠는 곳’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만큼 상사는 자리를 많이 비웠고 비서로서 할 일이 적은 편이다. 실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해도 신세기 상무 자체가 비서에게 요구도가 낮은 편이었다.

영화가 자리에서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혹은 출장을 핑계로 명품관 쇼핑까지 몰래 나갔다 오곤 하는 건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실제로 김미희 실장에게 명품관 쇼핑을 한번 들킨 이후로, 시말서까지 쓰고 그 이후에는 자제하며 눈치를 봤다.

“참, 세진그룹 정도진 사장이 그렇게 잘생겼다는데 사실이야? 어지간한 배우나 모델 뺨치게 생겼다는데.”

그러자 영화가 제가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입술에 침 하나 바르지 않은 채 입에 발린 소리를 술술 내뱉었다.

“아잉, 그거야 자기를 만나고 눈에 차지도 않더라. 참, 아버님 사업은 요즘 어때? 필리핀 쪽이 요즘 경기가 안 좋다고 하던데.”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아. 참 우리 꽃님이는 마음씨도 착해. 이렇게 신경도 많이 쓰고.”

“우리 오빠 아버님이면, 내 아버님이기도 하지. 사실 우리 회사에서도 사장님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난 그런 거 참 부끄럽더라. 그리고 대기업이 괜히 대기업이야? 다들 끼리끼리 사귀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오빠는 아버님이 제법 괜찮은 기업체를 가지고 있는데도 겉멋 들지 않고 이렇게 겸손하고, 나처럼 부족한 사람도 아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겉멋 들지 않았다라. 가인은 비서로 업무를 보면서 비싼 선물을 자주 고르곤 해서 고가의 메이커를 대충 알고 있었다. 남자가 찬 시계는 오천만 원을 호가했고 걸치고 있는 옷가지나 신발도 그에 못지않았다. 자신보다 명품에 빠삭한 영화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영화가 말을 끝내더니 눈을 내리깔고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화려한 복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초함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상대 남자한테는 충분히 먹혔다.

“아니야. 내가 우리 꽃님이를 얼마나, 어흠. 어흠. 얼마나…….”

남자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영화가 손가락을 들어 남자의 입을 막더니, 다시 남자의 입에다 뽀뽀를 퍼부었기 때문이다. 낯부끄러울 정도로 쪽쪽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더니 영화가 요사스럽게 속삭였다.

“알잖아, 자기. 자기도 내 마음.”

“우리 꽃님이, 내가 그래서 선물 하나 준비했어.”

“어머, 자기. 우리 오빠. 나 그런 거 없어도 돼…….”

“내 차로 가보자. 거기서 보여줄게.”

두 사람이 여전한 애정행각을 벌이며 사라지자, 가인은 어이가 없어 한숨이 다 나왔다. 도진은 그런 둘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인이 그런 도진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설마 밖에서 사람들 험담 좀 한 걸로 불이익을 줄 생각은 아니죠, 도자기 씨?”

“그런 말을 듣고도 편들어주다니, 우리 쁜이는 착한 건지 무른 건지 알 수가 없어.”

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도 저런 말을 듣고 보니 기가 막히지만, 누구나 험담은 하고 살잖아요. 사적으로 들은 이야기로 회사 내 일이 결정되기보단, 영화 씨 업무평가 결과로 회사일이 돌아가면 좋겠네요.”

가인도 영화가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밖에서 이야기하다 보면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말을 바꾸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들이 잘한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게 다 인사고과에 영향을 끼친다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진이 가인을 향해 씩 웃었다. 가인에게만 허락된 시원하고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인사고과 점수는 건드릴 생각은 없어. 그렇다면 인사팀을 못 믿는 게 될 테니까. 우리 가인이는 공명정대한 면이 마음에 들어. 손해 보는 성격이기는 하지만.

다만 저렇게 스스로 일을 잘한다고 하니 이번에 인사조정 때 보직은 좀 바뀌는 게 낫겠군. 지금 자리에서는 역량 발휘를 못 하지 않겠나, 저런 인재가.”

“아, 그런가요.”

그 정도야, 그럴 수 있는 처사다. 이제 꿀 빠는 자리는 다른 누군가의 것이 될 것이다. 입 하나 잘못 놀려서. 하지만 영화는 신세기 상무의 비서직을 오래 수행한 편이라, 안 그래도 이번에 바뀔지 모른다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영화 본인만 혹시 바뀔까 싶어 김미희 실장 앞에서나 혹은 인사팀에게는 잘 보이려 애쓰는 중이다.

“그렇지. 그리고 저 남자, 건일물산의 장남이군. 필리핀 쪽과 무역을 하는 기업인데 제법 탄탄해. 막 커나가는 사업체라고 알고 있는데 어쩌다 보니 그쪽 부친과 안면 정도는 있지.

이제 맏아들이 슬슬 혼기가 차간다고 결혼정보업체에 등록을 하려는 모양이더군. 아들 몰래 자연스러운 만남을 해주려는 모양이었어. 내가 알기론 저 아들, 제법 효자야. 부모 말을 거역하는 법이 없다고 하더군. 굳이 내가 뭘 하지 않아도, 장영화 씨는 물주 하나는 놓칠 것 같아.”

“물주가 아니라 남자친구일 수도 있잖아요.”

“저번에 우연히 다른 남자랑 비슷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걸 봤어. 키도 크고 덩치도 좋던데. 모두 다 남자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물주처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그렇군요.”

가인이 후, 다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도진이 가인의 코를 살짝 잡았다 놓으며 속삭였다.

“아가씨, 남 일로 그만 심란해하고 나한테 집중하죠. 그리고 난 가인의 물주가 되어도 좋아. 단, 나 말고 딴 놈은 안 돼.”

“뭐예요, 그게.”

그러더니 가인이 싱긋 웃었다.

“당연히 우리 도자기 씨밖에 없죠. 제주도까지 가서 한라봉에 새긴 약속인데.”

“그럼 이제 남의 연애엔 신경 끄고 우리 연애를 해볼까? 운동할 시간 한참 지났군. 장영화 씨가 저쪽으로 갔으니 우린 반대편으로 가자고.”

“네.”

그때, 슬며시 손이 잡혔다. 도진이 손을 잡고 가인을 이끌고 있었다. 그래, 우리는 지금 사귀고 있지. 사적인 시간을 같이 보내며, 다른 사람 이야기도 같이 하고, 작은 일에도 같이 일희일비하는.

가인이 빙긋이 웃었다. 사랑은 처음이어서, 더 간지럽고 더 설레고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