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연. 

여자로서 살 수 없는 조선 땅을 떠나 대륙으로 가서 편히 살라는 부모님의 배려로 이 땅을 떠날 계획이 진행되고 있던 그때, 은평군 이겸을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열여섯 그해, 그녀의 인생은 급변한다. 신씨 가문의 아들 이연에서 객주의 황부낭으로. 

상원군의 적장자. 상원군은 세자였던 형님이 죽고 조카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겸은 조선에서 왕가의 식구로 산다는 것은 죽느니만 못한 삶이란 사실을 일찍 깨닫는다. 그는 괴벽으로 스스로를 표출할 수밖에 없었고, 그날도 그래서였다. 계집같이 생긴 선비 이연을 기방 창고에서 만났을 때, 그렇게 까칠하게 나갔던 건. 그리고 그녀와 같이 겪게 된 열여덟 해 봄에서 여름은 눈부신 청춘과 함께 긴 회한으로 그의 가슴에 오랜 시간 남는다.

“좋겠다, 도령 넌.”

조금은 편안해진 겸의 얼굴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나한테 가르쳐 주고 싶은 세상일이 많아서.”

슬픔이 다 가시지 않은 눈을 하고서도 저를 보고 피식 웃어 주는 겸이 고맙고 좋아서 가슴이 아팠다.
가르치려 했던 의도 따위는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으며 가르쳐야겠다는 생각 또한 감히 해 본 적이 없었건만, 스스로 깨우쳐야 할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고 나니 배웠다고 말할 줄 아는 겸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아서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러면서도 가슴 가운데가 뻐근하게 조여 오는 통증이 든 이연은 붉어져 있던 눈시울에서 결국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제 눈물에 제가 당황해서 황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냈다.

겸이 당황한 이연의 손의 손목을 가만히 말아 쥔 것은 그때였다. 너무 억세지도 그렇다고 주저하는 힘도 아닌, 뜨거운 온도로 이연의 눈동자를 헤집어 든 눈빛과 다르게 부드러운 손길로 눈물을 훔쳐 내던 손목을 쥐고 있었다. 코끝이 닿도록 가까이 다가온 겸의 눈이 뚫어져라 이연의 놀라 동그래진 눈을 들여다봤다.

숨이 멎는다.
부드럽게 잡힌 손목이건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발을 담근 온천물이 부드럽게 물결쳤다. 아니, 어쩌면 온천물에 올라오는 따뜻한 수증기가 그리 보드라웠는지도 몰랐다. 고개를 틀어 연초록 버들잎처럼 내려앉은 겸의 입술이 수증기처럼 따뜻하고 발을 감싼 온천물처럼 부드러웠는지도 몰랐다.

살랑살랑 나무에 매달린 등롱이 춤을 췄다. 온천물이 동글동글 동심원을 그려 나갔다. 휘―휘 울던 휘파람새의 노랫소리가 길게 이어져 숲 속에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