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네가 나의 모든 것이야.”

잘생긴 외모에 뛰어난 성적으로 북악고 태자 전하라 불리는 강선우. 그러나 미혼모였던 어머니가 LT금융 그룹 회장과 재혼하면서 호적상의 아버지를 얻는 대신 초등학생 때부터 홀로 지내고 있다. 겉으로는 한없이 잘났지만 혼자인 외로움에 지쳐가던 선우는 한식 요리사인 아버지와 한복 디자이너 어머니, 어린 동생들 사이에서 반듯하게 자란 여학생 민지현과 우연히 얽히게 된다.

유학을 가겠다는 꿈을 위해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는 지현에게 같이 밥을 먹어주는 알바를 제안하고……. 지현과 친구가 되고 그녀의 집에 드나들며 가족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지만, 그럼에도 사랑한다 고백하기에 그녀는 너무나 멀기만 하다. 고등학교를 지나고 대학교를 지나 계속해서 어른이 되어가는 두 사람. 친구라는 이름 뒤에서 그녀만을 바라보는 선우의 깊고도 진한 짝사랑 연대기.

“그래서 뭐 하는 사람인데? 지현 씨 남자친구.”

자타공인 호구조사가 취미생활인 매니저의 끈질긴 질문에 영나는 우문현답을 내놓았다.

“지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되는 사람.”

2. 작가 소개

임소언(스푸키).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 - pukioz.com

애착을 갖는 것들:

꽃, 커피, 책.

털고 싶은 것들:

뽀로로 시청 10년의 추억, 메뉴 고민, 작심삼일 운동의지.

3. 차례

#16. 프러포즈

#17. 반대

#18. 절정

#19. 어른이 되는 법

#20. 동거

#21. 사고

#22. 이해

4. 미리 보기

어제 막 주문 마감하고 쟁여둔 커피가 똑 떨어져서 잠깐 편의점에 가려고 막 사무실을 나섰을 때 밤 9시밖에 안 되었는데 차를 대고 태블릿 PC를 들여다보며 기다리는 선우를 보고 지현은 당황스러웠다.

“선우야.”

“어. 벌써 끝났어?”

“아니……. 잠깐 커피 사러 나왔는데……. 언제 왔어?”

“좀 전에.”

하지만 선우의 컵 홀더에 꽂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겨 있었을 걸로 추정되는 투명한 테이크아웃 컵은 텅 비어 있었다. 선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언제 끝나?”

“오늘 한참 더 해야 하는데…….”

갑자기 선우가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 지현을 보며 선우는 제 손에 든 태블릿 PC를 톡톡 건드리며 청량한 미소를 날렸다.

“나도 일하고 있어. 천천히 해.”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난 괜찮으니까.”

선우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일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또 막상 이리저리 구상하던 것들 내용도 바꾸고 편집도 다시 하고 하다 보니 훌쩍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지현은 헐레벌떡 컴퓨터를 끄고 1층으로 내려갔다.

“미안. 너무 늦었지.”

“미안하긴. 내가 좋아서 기다리는데.”

선우는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건 남자친구의 권리라며 웃었다. 바보같이. 자신을 너무 좋아하는 선우 탓에 지현은 매일이 감동이었다.

“무슨 생각을 해? 사람 앞에 두고.”

“미안. 그냥…….”

“나도 딴생각하고 있었어. 무슨 생각했냐고 물어봐.”

“무슨 생각?”

“여기서 키스해도 되나 그런 거.”

후훗. 지현은 선우의 두 뺨에 제 손을 대었다. 그러자 선우가 자연스레 고개를 숙여주었다. 지현은 살짝 발뒤꿈치를 들고 선우의 입술에 제 마음을 가져다 대었다.

“돼.”

부드럽게 지현을 감싸 안은 선우는 격정을 억누르고 천천히 지현의 입술을 맛보았다. 지난 한 달여간 얼마나 혼이 났는지. 너무 세게 키스해서 입술이 텄다고 난리, 너무 꽉 끌어안아서 숨쉬기 힘들다고 난리. 이제 지현에게 맞춤형 키스를 시전할 수 있게 된 선우는 발전하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슬며시 지현의 티셔츠를 밀며 손끝으로 하얗고 날씬한 허리를 쓰다듬었다. 지현이 살짝 움찔하더니 곧 몸에 힘을 빼고 선우의 목덜미를 쓸었다. 지현의 손이 제 머리카락이 몇 올인지 셀 듯 사그락 귀를 스치고 지날 때 마다 용광로에 풀무질을 하듯 더운 기운이 확 올랐다.

“으응…….”

지현의 콧소리에 슬쩍 눈을 떠보니 눈을 꼭 감고 제게 안겨 있는 지현의 눈가가 조금 붉었다. 이제 선우는 지현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지현이 약속했던, 그때가 멀지는 않았다는 것을.

“……지현아.”

선우가 부르자 지현이 아쉬운 듯 살짝 눈을 떴다.

“응.”

“집에 가야지.”

“응…….”

그러면서 지현은 눈을 다시 감고 선우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말과 몸이 따로 노는 현장이었다.

선선한 밤바람이 걷기 좋다며, 근처까지 택시를 타고 온 둘은 중간에 내렸다. 집을 향해 걷는 새벽의 인사동 길은 고요했다. 평소에는 빼곡히 들어찬 관광객들로 잘 보이지 않던 바닥의 너른 벽돌길이 어스름한 불빛 아래로 적나라하게 제 자태를 드러낸 것이 제법 볼 만했다.

선선한 가을의 밤바람이 기분 좋게 그 길을 타고 달려와 코, 뺨, 귀, 마지막엔 머리카락을 길게 스치고 지나갔다. 나란히 길을 걷다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니 자신들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었다.

선우와 사귄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매일 만나고 마음을 가득 채워서 그런지 더 오래 만난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해. 지현은 드디어 선우에게 말을 할 확신이 생겼다.

“선우야.”

“왜.”

야. 강태. 강선우. 태자님을 부르는 별명은 서너 개였지만, 선우는 역시 지현이 불러주는 ‘선우야.’ 이 말이 제일 듣기 좋았다.

“나 지금 하고 싶은 말 있어.”

“무슨 말인데?”

“근데 말하면 너 좀 놀랄 수도 있는데…….”

“후. 자. 이제 말해.”

크게 숨을 들이쉬고 선우는 지현을 보았다. 가게들도 다 문을 닫은 밤, 하얗게 빛나는 가로등 불빛을 눈에 담은 지현의 눈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우리 결혼하자.”

“뭐어?!?”

선우의 그림자가 제 주인처럼 격하게 거친 움직임을 보이다 이내 어깨를 늘어뜨리고 기운 빠진 모양새를 했다.

“야…….”

“왜? 싫어?”

“하……. 진짜 싫다.”

“싫어? 조금 놀라지만 기뻐할 줄 알았는데.”

지현은 아랫입술을 쑥 내밀며 으쓱했다. 그런 지현을 보며 선우가 짜증스레 머리를 털었다.

“남자도! 프러포즈에 로망이 있다고!”

“무슨 로망?”

“멋지고 좋은 곳에서 꽃도 사고 선물도 준비하고 ‘이걸 받아주겠지?’ 상상하는 그런 로망. 넌 애가 왜 그렇게 무드가 없냐.”

게다가 언제는 사귄 지 한 달도 안 되었다며 이리저리 도망 다닐 땐 언제고 결혼을 하자니. 선우는 기가 찼다. 예쁘게 불던 풍선을 누군가 빵 터트려서 제 손에 터진 풍선 꼭지만 남은 그런 기분이랄까.

“돈도 아끼고 결혼도 할 수 있으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몰라. 이거 없던 일로 해.”

지현은 입술에 주름을 잡고 삐친 표정으로 집 쪽으로 다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현의 엉뚱함에 삐칠 사람이 누군데! 하지만 이미 몸이 달아버린 선우가 영원한 패자였다.

“지현아. 나는 왜 번번이 너한테 선수를 뺏기지?”

사귀자고 할 때도, 진심을 고백할 때도, 거기에 프러포즈까지 덤으로 얹다니 이건 정말 남는 게 없는 장사였다.

“왠지 몰라?”

“응. 모르겠어.”

나도 서울대 나왔는데, 나도 MBA 갔는데. 나는 왜 모르지. 똑똑한 네가 좀 알려주라.

“바보야. 네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렇잖아.”

‘아니야?’라는 듯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지현의 눈에 달콤한 행복이 찰랑찰랑 가득 담겼다. 그 눈을 본 순간 선우의 가슴이 지잉 울렸다. 그렇구나. 지금 네가 행복하구나. 네가 내 옆에 있어서 그렇다면……. 나는…….

“그래. 하자.”

“뭘?”

“결혼. 네 맘대로 다 해.”

“진짜?”

“너 돈 한 푼 안 든다고 그냥 던져본 말 아니지? 진짜 나랑 결혼하고 싶은 거 맞지?”

“응. 선우야. 나도 이제 집에 가기 싫다.”

아우, 이쁘고 귀여운 것. 지현은 예뻤다. 고등학교 때도 참 예뻤지만, 성숙한 아가씨가 된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말 어린 신부 영화 개봉해서 지금은 대배우가 된 문근영을 봤을 때는 지현도 보쌈해서 당장 대딩 신부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었지만, 이 순간 선우는 긴 세월을 참은 보람을 찾고 있었다.

선우가 지현의 손을 잡아 가만히 손등에 입술을 대었다가, 손을 잡아끌자 지현이 품 안으로 폭 떨어지듯 안겨왔다. 프러포즈는 지현이 했지만, 약속의 키스만이라도 제가 먼저 하고 싶었다. 부드러운 입술을 더듬자 인적이 드문 거리를 슬쩍 한 번 더 살핀 지현이 살포시 자신을 허락해주었다. 한참을 붙어 있다가 겨우 떨어지자 선우가 지현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지현아. 너만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어.”

“다행이네.”

지현이 작은 몸을 통통 울리며 경쾌하게 웃었다. 지현을 품에 안고 지나쳐 걸어온 길을 보며 선우는 생각했다.

‘사유지였으면 내일 당장 사들일 텐데……. 아깝다.’

지현과의 프러포즈 추억이 어린 길이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못하게 딱 떼어 간직하고팠으나, 슬프게도 이 길은 보통 길이 아니요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된 특별한 곳이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다 썰렁하다며 제 품을 파고드는 지현을 내려다본 선우는 그제야 다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