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종이책 출간작으로 첫 번째 ‘밀라노 시리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도덕적이지만 사생아 출신이며 아무 것도 없는 여자, 진수정.
세상에서 가장 오만하지만 명문가 출신이며 모든 것을 가진 남자, 칼리토 비스콘티.

수정은 주얼리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와서 하루하루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던 중, 아주 잘생기고 돈이 많지만 거만한 남자, 칼리토에게 저녁을 함께 하자는 명령같은 요청을 받는다. 돈이면 뭐든 다 된다고 생각하는 칼리토는 수정도 쉽게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더욱 접근하지만, 그녀는 계속 거부하기만 한다. 곧 칼리토는 수정이 특별한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아주, 아름답군.
그는 여자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흥미롭게 훑었다. 검은색의 단조로운 구두 위로 보이는 발목은 가늘었다. 종아리는 길고 매끈했으며, 단순한 디자인의 치마 아래로 살짝 엿보이는 무릎은 예뻤다. 허리는 한 손에 쥐어질 듯 잘록했고 하얀색의 순결한 셔츠 아래로 보이는 두 가슴은 크지는 않았으나 봉긋하게 솟은 모양이 탐스러웠다. 팔 또한 다리처럼 길고 가늘었으며 둥근 어깨선과 사슴처럼 우아한 목선은 단아했다.
그리고 얼굴.
갸름한 턱선은 공을 들여 핥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만큼 매혹적이었다. 살짝 벌어진 장미 꽃잎 같은 붉은 입술은 남자의 키스를 갈구하는 것 같았고, 매끈한 콧대와 더불어 흑갈색의 맑고 깊은 눈동자는 헤어날 수 없는 늪처럼 묘한 매력을 풍겼다.
만져 보고 싶군.
그는 눈으로 여자의 피부 결을 확인했다. 동양인임에도 여자의 피부는 도자기처럼 눈부시게 새하얗고 최고급 진주처럼 미세한 흠조차 없어 보였다.
손으로 만져 보고 싶었다. 입술을 대고 싶었고, 혀끝으로 맛을 보고 싶었다. 여자의 모든 부분을.
몸의 한 부분에 욕망의 불이 붙자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으나 평소 선호하던 취향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언제나 그의 선택은 세상의 이치에 밝은, 금발 소유자였다. 육감적인 몸매를 자랑하고 관계의 선을 명확히 아는 계산적인 여자들. 하지만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여자는 달랐다. 진주빛 피부와 까만 머리칼을 가진 동양인이었으며, 몸매는 탐스러웠으나 전체적으로 마른 편으로 글래머는 아니었다. 또한 눈동자는 지극히 순수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여자는, 웨이트리스였다.
메뉴 선택을 도와주고 서빙을 하는 존재. 그가 보통 상대하는 여자들은 같은 상류사회의 일원이거나 모델이나 배우 같은, 완벽한 외모가 하나의 재산인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화장조차 거의 하지 않은 얼굴에 투박한 원피스를 유니폼으로 입고 돈 몇 푼에 이 손님, 저 손님의 시중을 들어 주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와는 다른 계급의 존재.

“시뇨레(Signore : 미스터(Mr)의 이탈리아어).”

그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알았는지, 여자는 매끄러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포니테일로 묶은 긴 머리칼이 살짝 흔들리며 경쾌한 춤을 추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여자는 상냥한 웃음을 머금었으나 그는 여자의 얼굴에 뚜렷하게 자리 잡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피로의 그림자.

“피곤해 보이는군.”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자는 눈을 한 번 깜빡인 후 다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다고? 그럼…….”

그는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분명하게 제안, 아니 요구했다.

“저녁 식사, 같이 하지.”
“제안은 감사드립니다.”

여자의 미소는 그대로였다. 일하는 도중 데이트 신청을 자주 받는지, 외운 말을 내뱉듯이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하지만 이 레스토랑에는 손님과 데이트할 수 없다는 철칙이 있답니다. 제가 받을 수 있는 건 주문뿐입니다.”
“그런 철칙이 있다니 금시초문이군.”

그는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였다. 여자가 자신의 송곳니를 볼 수 있게.

“소유자인 내가 모르는데.”

그제야 여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럼…….”
“그래. 내가 이 레스토랑의 소유자, 칼리토 비스콘티지. 다시 제안하지.”

그는 욕망을 눈빛에 드러냈다. 그리고 여자가 승낙하리라는 확신을 갖고 이어 명령했다.

“저녁 식사, 같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