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안 그래도 된다는데, 차가 떠나는 순간까지 지켜보던 은혜의 모습이 차창 밖으로 멀어져갔다. 저녁까지 든든하게 먹은 후라 남양주로 돌아가는 시간은 예상보다 많이 늦어졌다. 채원은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고, 오랜만에 움직여 뭉쳐버린 배를 손으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아가야! 힘들지?’
태명도 채 짓지 못한 아이를 속으로 부르자, 마치 대답을 하듯 태동을 시작했다. 채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바로 스러졌다. 마음을 비우자고 그토록 애를 썼지만 은혜의 입에서 거론된 남자의 이름을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최건휘.
사랑을 했지만, 버렸다.
잊어버렸다고 장담했다. 그렇기에 갈등 끝에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고, 은혜를 만날 생각도 가질 수 있었다. 누구나 하는 사랑이었고, 시간이 더 흐르면 옅어질 것이라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제 사랑만 특별하다는 것은 유치한 착각이라며 제 감정을 비하했다. 잊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처음보다 지금, 지금보다 앞으로의 어느 날에는 그를 떠올리며 추억으로 기억하는 날이 올 것이라 억지로라도 믿어야 했다.
물론 그의 이름을 들으면 가슴 언저리가 씀벅거리며 화끈한 통증을 수반하지만 일시적인 흉통일 뿐이라고 자위했다. 신이 주신 망각이라는 축복을 받아들이고 살다보면 언젠가는 최건휘라는 남자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지도…….
서울을 벗어나자 버스의 속력이 빨라졌다. 그녀가 자리를 잡고 있는 남양주라는 표지판이 어둠속에서도 용케 보였고 새롭게 입주를 시작한 아파트 단지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채원의 눈동자에 반가움이 스몄다.
“다 왔다.”
그녀는 배에 손을 얹고 아기에게 알려주었다. 아직 엄마 뱃속에서 태동을 하는 것 외에 제 의견을 내지 못하는 아이에게 하나 둘 설명을 하며 혼잣말을 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다. 내려야 하는 정류장이 가까워지자 채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을 누르고, 버스 손잡이에 손을 뻗으려고 가방을 추켜세우는 순간이었다.
끼익!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를 채 잡지 못하고 있던 채원의 몸이 한쪽으로 크게 쏠렸다. 휘청거리며 애써 균형을 잡으려고 바동거렸지만, 한 순간 버스 바닥에 몸이 뒹굴었다.
“어머나!”
“이를 어째!”
“기사님!”
승객들이 제각기 내는 소리에 브레이크 소리는 묻혀버렸고, 채원은 바닥에 나뒹굴며 배부터 감쌌다. 어딘가에 부딪쳤는지 어깨에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고, 애써 감싼 보람도 없이 배가 아파왔다. 그녀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윽!”
채원은 신음소리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밀려오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휘청거리다 균형을 잃고 넘어진 것은 한 순간이었고, 차 바닥에 쓰러져 이리 저리 뒹굴다가 겨우 차가 멈춰서야 채원은 몸을 구부린 채 통증의 신음을 삼키고 있었다.
“새댁, 괜찮아요?”
중년의 아줌마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아니, 통증에 눈조차 떠지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경망스러운 생각이 들었고,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식은땀이 흘렀다.
“아아…….”
채원은 배를 잡고 간헐적인 신음을 내뱉었다. 허리를 곧게 펼 수 없어 다리를 모았지만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저씨, 빨리 병원으로 가요. 사람 죽겠네.”
승객 중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자, 급브레이크를 밟았던 기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앞에 끼어든 오토바이 때문이라고 항변을 했지만 웅성거리는 승객들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는 심상치 않게 들렸다. 이러다 잘못되는 게 아닌가 싶어 핸들을 잡은 손이 눈에 보일 듯이 떨렸다.
“뭐해요, 이러다 사람 잡겠다니까!”
“조금…… 만 참으라고 하세요. 지금 출발할 테니까. 그리고 바쁘신 손님들은 죄송하지만 여기서 빨리 내려주세요!”
기사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했다. 내릴 손님을 위해 열어놓은 문 사이로 11월의 찬바람의 한기가 몰아쳤다. 몇 명은 항의를 하며 내렸고, 몸을 구부린 채 누워 있는 채원이 더 다칠까봐 쉽게 몸을 일으키게 만들지도 못한 채, 몇 몇 승객은 걱정스럽게 그녀의 몸이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꽉 잡았다.
“으으윽!”
채원은 점점 심해지는 고통에 허망한 신음만 내놓을 뿐이었다. 무릎을 모아 몸을 말았다. 여전히 배를 보호하듯 손으로 감쌌지만, 무심한 하반신에서는 뭔가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불길한 느낌에 무릎을 붙이며 힘을 주었다. 혹시나 제 잘못으로 아이를 놓칠까봐 통증보다 무섬증이 더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기사님, 얼른! 산모가 하혈을 해요!”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승객의 말에 버스는 쏜살같이 병원을 향해 내달렸다. 덜컹거리는 버스 바닥에 누워 있었지만 누구도 그녀를 섣불리 건드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들의 신발들이 힘겹게 올린 눈썹 위로 얼비쳤다.
‘아가야…….’
채원은 스러져가는 정신 속에서도 뱃속에 있는 아이를 걱정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함께 통증을 겪고 있을 아이에게 미안했다. 눈꼬리를 타고 내려온 물기가 지저분한 버스 바닥을 축축하게 적셔갔다.

프로필

정情

호랑이띠, 게자리.
그리고 소심한 O형.
해피엔딩 마니아.

작가연합 깨으른 여자들(romancemoon.com)에 거주 중.


출간작
「천생연분」
「사랑를 빌려드립니다」
「오! 황자」
「입맞춤」
「밀어」
「디케의 심장」
「선수 입장」
「로비스트」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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