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아나이스 여신이시여. 이것은 당신의 안배입니까.

마왕의 제물이 된 공주 세레니안.

마법진 위에서 눈을 뜬 그녀 앞에 펼쳐진 세상은

300년 후, 대륙의 북쪽 끝이었다.

“엄마, 예쁜 언니가 깨어났어요!”

“아유, 사흘 동안 꼼짝없이 숨만 쉬더니 드디어 눈을 떴네. 어디 정신이 좀 들어요?”

왕국의 자랑이던 공주의 존재는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혔고,

설상가상 그녀의 상징인 은발과 은빛 눈동자까지 까맣게 변해버렸다.

빈털터리가 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뿐.

“나…… 이곳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요.”

이제 공주, 아니 수습하녀 세레나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발루아 공작이 다스리는 잿빛 겨울성에서!

2. 작가 소개

소리엔

이야기를 사랑하는 공상가.

친한 친구처럼 편안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2015 카카오페이지X도서출판 가하 공모전’특별상 수상.

3. 차례

1부

#01. 돌아온 공주

#02. 입성

#03. 수습 하녀 세레나

#04. 동쪽 방의 주인

#05. 시녀의 품격

#06. 빛을 삼킨 밤

#07. 솔즈베리 백작부인

4. 미리 보기

신탁을 확인한 사람들은 왕궁으로 달려가 그토록 경외하고 칭송했던 공주를 끌어냈습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의 심장에 아홉 개의 봉인을 새기고 마법진 위에 세웠지요. 마법진이 빛남과 동시에 은빛의 공주와 왕궁 근처까지 도달했던 마왕은 사라졌습니다.

마왕이 사라져 힘을 잃은 마물들을 몰아낸 왕이 폐허가 된 세 개의 왕국과 열일곱 개의 도시 국가를 통일하고 새로운 제국을 세우니, 그 제국의 이름을 ‘루이네리아’라 합니다.

- ‘한눈에 보는 제국사 제1장 건국 편’ 中

「아바마마…… 부디 강녕하셔요.」

「잠시만, 기다려보아라. 아직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느냐.」

「폐하, 서두르셔야 합니다. 마물 떼가 들이닥치기 전에 주문을 완성하지 않으면……!」

「가겠습니다. 저 하나가 희생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열 번이라도 좋아요. 저는 불구덩이 속에 뛰어드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이것은 악몽이다. 깨어나면 잊힐 악몽에 불과하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 죽음을 재촉하는 누군가의 거친 음성. 아바마마의 눈물. 악귀의 입처럼 자신을 빨아들이며 빛을 뿜던 마법진까지.

공주는 괴로움에 신음했다.

‘제발. 견딜 수가 없어. 누가 여기서 나를 좀, 해방시켜줘!’

그 순간, 기억의 편린들이 모여 검은 회오리바람이 되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회오리바람은 곧 기억의 저편으로 떠밀리듯 사라졌다. 어디선가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것은 호기심이 잔뜩 어린 한 쌍의 검은 눈동자였다.

“엄마, 예쁜 언니가 깨어났어요!”

“아유, 사흘 동안 꼼짝없이 숨만 쉬더니 드디어 눈을 떴네. 어디 정신이 좀 들어요?”

뿌옇던 시야가 걷히자 비쩍 마른 여자아이와 마찬가지로 깡마른 중년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머리와 눈동자는 그녀들이 귀족이 아닌 평민이라는 표식. 남루한 옷차림의 두 모녀는 저마다 동정심과 호기심을 가득 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군. 저들이 자신을 구한 것인가. 마법은 결국 실패한 것인가.

공주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애써 일으켰다.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의 안전이 보장된 장소인지 미처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벽에 몸을 기댄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돌을 둥글게 쌓은 화덕, 얼기설기 겹친 나무판자 위로 흙을 바른 벽에 지나치게 높은 천장은 아무리 자신이 평민의 생활을 모른다 해도 낯설기 짝이 없는 건축 양식이었다. 공주는 결국 이런 상황에서 할 법한 전형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어디인가요?”

“북령이에요. 북령의 북쪽 끝, 그란데 산맥 밑이죠.”

중년 여성이 대답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소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엄마가 언니를 구해줬어요. 달빛 호수에서 꽁꽁 얼어 있는 언니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그냥 시체인 줄만 알았대요. 언닌 정말 고마운 줄 알아야 해요. 외부인을 싫어하는 월터 아저씨나 다른 사람들만 같았으면 아마 그대로 죽게 내버려뒀을걸요.”

“레니. 쓸데없는 소리 마라.”

중년 여성이 아이의 입을 막는 시늉을 했지만 곱게 접은 눈초리로 보아 듣기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고마움이라. 그래, 보상을 해주어야지. 왕족의 생명을 구한 보상을 어찌 말로 끝낼 수 있을까. 공주는 궁으로 돌아가는 대로 그녀들에게 몸무게만큼의 금화와 평생 본 적도 없을 진귀한 보석을 하사할 충분한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충분한 파악이 먼저였다.

“그대들의 걱정은 덧없습니다. 나는 세레니안 라 엘베른, 엘베른 왕국의 공주이니까요. 그보다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전쟁은 어떻게 됐나요? 마왕은? 폐하께선 무사하신가요?”

“예? 그게 무슨 소리래요?”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물의 침략에 의해 왕국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겁에 질린 시민들은 무작정 왕궁으로 밀려들었다.

광기와 혼란 속에서 마물이 아닌 시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애꿎은 기사들의 피는 또 얼마나 많이 흘려야 했던가. 신탁대로 정말 내가 대륙의 멸망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짧은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며 궁정 마법사가 그린 마법진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눈부시게 하얀 빛에 휩싸여 눈을 감았다. 분명 그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