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파혼, 하고 싶어요.”

이름뿐인 몰락 귀족 로사 엔테인. 그녀에게는 델바인 왕국 최고의 신랑감이라는 약혼자, 수도 치안대장 헨리 에카르트가 있지만 어린 시절 약혼한 이후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시간이 흘러 파혼을 생각하는 그녀 앞에 나타난 헨리는 완벽한 약혼자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언제나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주는 치안대의 마법사 아실 로건과 약혼자 헨리, 두 사람 사이에서 로사는 고민에 빠지는데…….

“그리고 가장 하고 싶었던 것도 떠올랐고.”

“그게 뭔데요?”

로사가 물었다. 그러자 헨리가 웃었다.

“연애.”

2. 작가 소개

김유린

물병자리, A형

나만 고양이 없어!

트위터 : @yurin0925

▣ 출간작

용의 꽃

다이아몬드의 신부

3. 차례

#13

#14

#15

#16

#17

#18

#에필로그 - 개구리 왕자와 마녀

#외전 1 - 막대기와 빵과 초코

#외전 2 - 비밀편지 프로젝트

4. 미리 보기

로사는 그날 울고 또 울었다. 마침내 돌아온 고용인들이 아가씨의 울음에 놀라 달려올 때까지.

레나는 헨리와 로사가 드디어 헤어졌음을 직감하고, 넌지시 미스 노턴과 사이먼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자세한 것은 모르나 에카르트 백작이 약혼을 깼으며, 그리하여 두 사람은 헤어졌노라고. 미스 노턴과 사이먼은 무척 아쉬워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할 수는 없어서 그저 알았다고만 하고 말았다.

그들이 보기에도 엔테인 가와 에카르트 가의 차이가 극명했기 때문에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속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엔테인 남작과 브래들리 때문에 집안 분위기는 무척 어두웠다. 파혼서에 놀라 집으로 달려온 남작과, 헨리에게 언질을 받은 브래들리가 급하게 저택으로 돌아온 것이다.

로사는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도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냈다. 에카르트 백작이 파혼을 결정했고,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벌써 새 약혼처를 찾았으며, 그래서 로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면서도 그녀는 헨리를 두둔했다. 헨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며,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음을 강조하며, 로사는 눈물을 다시 한 방울씩 흘렸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아버지와 오빠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은 물론이요, 몰락해가는 처지에 권세 높은 백작가에 항의조차 할 수 없다는 것에 분노했다.

“어떻게 그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무례할 수 있어? 백작부인은 뭐 하시고?”

엔테인 남작이 화를 냈다.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져서 터질 것 같았다.

“백작부인은 친정에 계세요……. 아마 모르실 거예요. 그리고 어차피 아시게 된다고 해도, 이미 늦었어요. 다 끝났어요, 아버지.”

엔테인 남작은 울먹이는 딸을 안아주었다. 오랜만에 안아본 딸은 많이 말라 있었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남작은 죽은 아내를 떠올리자 가슴이 너무 아팠다.

잘 키우겠다고 약속했는데,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며 키우겠다고 맹세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로사는 저 혼자 큰 것이나 다름없었다. 약속이나 맹세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것이 미안해 남작은 울지도 못하고 쓰린 속을 부여잡았다. 아내의 인연으로 에카르트 가와 혼약을 맺고 나서, 자신이 소홀한 것을 딸은 성혼하면 아주 부유하고 편히 살 테니 괜찮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빚을 져서라도 아카데미에 보낼 것을. 그랬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막막하지는 않았을 텐데.

엔테인 남작이 후회를 하는 동안, 브래들리는 동생의 불행이 더없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괜히 약혼을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을 해서 불운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미안하기까지 했다. 어이없는 생각인 것은 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찜찜함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헨리의 괴로운 얼굴과 일이 이렇게 되어 미안하다,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말을 기억했다. 헨리 에카르트는 치안대의 대장이자, 브래들리의 우상이었다. 아카데미에서의 활약상을 보았고, 그가 절대로 허튼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런 것이다.

하지만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 대가는 꼭 받아낼 참이었다. 어렸을 때를 빼면, 로사는 여태껏 가족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애가 엉엉 아이처럼 울었다. 아이처럼.

문득 브래들리는 로사가 겨우 이제 성인의 문턱에 다다랐을 뿐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너무도 의젓하게 가문의 안주인 역할을 해서 가끔 잊곤 했지만, 로사는 성인이었던 적이 없었다. 이제야, 겨우, 어른이 될 참이었던 것이다.

브래들리는 주먹을 꽉 쥐고 화를 참아냈다. 지금 화를 내봐야 로사의 마음만 더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에카르트 백작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전혀 몰랐다. 백작씩이나 되는 자가 어린애를 데리고 무슨 말을 한 걸까. 헨리도 모르고 있던 것을 로사가 미리 알고 있었던 거라면…….

그래서 로사가 앓았던 걸까? 그의 뒤통수를 누가 내리친 것 같은 충격이 왔다. 브래들리는 로사가 그저 몸살감기로 앓았다고만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다.

파혼의 충격으로 앓아누운 것이리라. 필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다가 약혼자와 담판을 짓고 나서야 겨우 가족에게 입을 연 것이었다.

미련한 것.

브래들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향했다. 이미 거리는 어두워져 하나둘씩 등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지만, 그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로사는 뭐든 참아내기만 한다. 가족인데,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주면 좋을 텐데……. 바보같이 착해빠지기만 한 동생은 뭐든 혼자 감내하려고 했다. 브래들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너무 미안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로사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탓해야 했다. 동생이 그렇게 키워진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가문을 이을 남자아이라는 것 때문에 받기만 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후회가 섞인 한숨이 브래들리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 ◆ ◇

소원을 이루어주지. 달콤한 꿈, 원한다면 언제든 원하는 대로.

노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여자는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푹신한 침대와 부드러운 시트의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아, 그래…….

그녀는 하녀 일을 그만두었다. 집사가 만류했지만, 모시고 있던 마님도 잠시 자리를 비운 데다 기다리자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버티고 있기엔 하녀 일은 너무 지긋지긋했다. 거기에 조금 켕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하녀로서는 건방진 행동이었다. 평소였다면 그녀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연인이 있었다. 연인은 남작이 될 것이고, 그녀 덕분에 엘피스 가의 연줄을 잡아 성공할 것이었다. 그래서 평민의 신분에도 귀족의 아내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일을 그만두자마자 연인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두 사람만의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성대하게 치르고 싶었지만 그녀의 신분이 발목을 잡았다. 결혼식을 올린다고 해서 초대할 사람도 없었거니와, 평민의 신분 때문에 다른 귀족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차라리 결혼 후, 시어머니의 지원 아래 귀족의 예법을 배워 사교계에 진출하는 것이 모양새도 좋을 것이었다. 신분이야 적당히 얼버무리면 된다. 이미 남작의 아내가 된 자신을 누가 의심할 것인가.

그녀, 수잔 브라운은 좋은 호텔을 잡아 연인, 아니 이젠 남편이 된 남자와 머물렀다. 소박한 결혼식에 차마 사제조차 초대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무척 행복했다.

부모님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며 결혼식부터 올리자던 연인 덕분에, 이제 그녀는 남작부인이 될 것이었다. 결혼식의 증인으로 호텔 지배인이 기꺼이 참석해주었다. 호텔에서 이런 종류의 결혼이 종종 있어왔던 탓에, 지배인들은 결혼식의 증인이 되는 것을 무척 기껍게 여겼다. 만약 잘 풀리게 된다면 종종 후에 손님이 뒷배가 되어주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수잔은 검은 머리카락을 곱게 틀어 올리고 옅은 화장을 했다. 고상하게 보이고 싶었다. 하녀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옷도 여러 벌 샀다. 남작부인의 자리에 어울리는 옷차림이 필요했다. 특히 결혼식에 쓸 진한 크림빛의 드레스에 수를 놓으면서 그녀는 행복의 절정을 느꼈다.

마침내 지배인이 지켜보는 자리에 수잔은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연인인 존 베이커의 손을 잡고 사랑을 맹세했다.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그 다음은 맹세의 키스와 축하를 위해 지배인이 내놓은 붉은 포도주를 들이켜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

수잔은 몽롱한 머릿속으로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하얀 시트는 보드라웠지만 그녀는 자신이 겨우 와인 한 잔에 쓰러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와인의 도수도 무척 낮은 데다, 수잔은 맥주를 물처럼 마실 정도로 말술이었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옆에 남편이 된 존이 없었다. 이렇게 어두운데,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자신을 이렇게 내버려두는 남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면 당장 사제니 의원이니 불러다가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춥지…….

“소원은 이루어졌다.”

누군가 속삭였다. 수잔은 확 끼쳐오는 소름에 눈을 부릅떴다. 분명 누군가가 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소원은 이루어졌으니 이번엔 내 차례야.”

그 순간, 수잔의 등 뒤에서 차가운 손가락이 목을 잡았다. ‘그것’은 수잔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는 그의 영원하고 유일한 아내가 될 것이다.”

바람이 불었다. 조용한 바람은 점차 날카롭고 잔혹하게 바뀌었다. 바람은 수잔의 온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핏방울이 여기저기 튀었다. 하지만 튄 핏방울보다도 가슴께로 모이는 것이 더 많았다. 수잔은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목이 막힌 듯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원하는 대로 수잔의 가슴에서 장미가 피었다. 붉은 장미는 보라색을 띠는 빛 덩어리에 감싸인 채, 천천히 만개했다. 그리고 그것을 무자비하게 꺾는 손이 있었다. 우드득, 콰득. 장미가 뽑혀나간 자리에 피가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