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부러워하는 인생을 사는 거칠 것 없는 은하린.
하지만 그녀에게 인생이란 시시하고도 무료한 일투성이다. 그런 하린의 단 하나 약점이라면 낫지 않는 불면증이랄까.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던 그녀가 한 남자의 목소리에 단잠에 빠졌다. 흥미로운 장난감과 수면제로 여겼는데 그의 웃음이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환한 햇살 속에 있는 남자 지선우.
팍팍하고 고된 삶 속에서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정직한 그가 하린과 얽힌 것은 어찌 보면 불행일 수도 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여자인데 그녀의 눈물이 가슴에 남았다. 투명하게 떨어지는 눈물이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스트로베리 문은 달의 고도가 낮아져 대기의 굴절로 인해 달이 붉게 보이는 현상입니다.
달처럼 아름답지만 그만큼 변화무쌍하고 치명적인 여자와 햇살처럼 따뜻한 남자의 이야기 입니다.


- 본문 중에서 -

선우는 힘이 없는 자신이, 무력하기만 한 스스로가 갑갑했다. 얼마나 더 이런 취급을 당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고개를 숙인 선우의 눈이 아뜩하게 휘몰아쳤다.
“제가 할 일이 뭔가요.”
반쯤은 체념하고 말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에게는 더 좋은 일이긴 했다. 꼬박꼬박 빚을 갚기 위해 허덕이지 않아도 됐고 등록금을 마련하기도 쉬울 것이다. 그래 그게 전부다. 더는 나빠질 것도 없는 현실이지 않은가. 조만간에 이 모든 관심은 떨어져 나갈 것이고 자신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면 된다. 선우는 악 다문 턱에서 힘을 뺏다.
“신기하게도 말이지. 내가 네 목소리를 들으면 잠이 와. 이유도 불분명한 불면증이 약 없이 차도를 보이는 거지. 이건 어떤 정신과 의사도 심리치료사도 못한 일이야.”
“제 목소리가 잠을 부른다는 겁니까?”
“내 몸이 그렇게 반응해. 그러니까 너는 내가 피곤할 때 와서 책을 읽든지 네 일상을 떠들든지 목소리를 들려줘.”
“그럼 그 일을 언제까지 하면 됩니까?”
갑작스러운 선우의 말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다. 급소를 찔린 사람처럼 하린의 대답이 늦어지고 있었다.
‘내가 끝을 말하지 않는데 네가 먼저 결말을 논해?’
금방이라도 고약한 성질머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 눈썹을 치켜들었다. 몸 안으로 퍼지는 불길을 간신히 잠재우고 하린이 한쪽 입꼬리를 들었다.
“내일이라도 효과가 사라지면 넌 자유가 되는 거야. 그래도 즐거운 장난감이 되어 줬으니 돈은 받지 않을게.”
눈에 띄게 질려가는 선우의 표정을 보니 상했던 기분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치 너 따위는 장난감 이상은 될 수 없다는 듯이 상처를 줬다. 마음먹고 한 말인데 뒤끝이 씁쓸한 이유는 왜일까. 하린은 의자에서 일어나 현관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럼 이걸로 우리 거래가 성립됐다고 봐도 무방한 거지? 앞으로 전화하면 뛰어와.”
“……그러죠.”
거실에 남겨진 옷가지를 챙겨 들고 선우가 현관으로 향했다. 뚜벅뚜벅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었지만 하린은 주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선우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린은 혼자 남은 빌라를 보며 오랜만에 공허함을 느꼈다. 이런 구질구질한 감정은 어릴 때 이후로 처음 겪는 것이었다. 개운하게 잠을 잤음에도 하린의 머릿속은 망망대해를 유랑하는 돛단배처럼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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