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저한테 중요한 건 진실을 밝히는 게 아니라 진실을 지키는 거예요. 자기가 알아야 될 것과 몰라야 될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알 권리도 없고요.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나오미 공주의 폭탄 선언. 이후 제국은 나오미 공주의 연인에 대한 화제로 술렁이고, 그 사이 맬서스는 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한편 그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러 시내에 나간 지아는 유디트를 발견하고 그녀를 쫓다가 납치되고, 이안은 분노하는데…….

단정히 눈을 감은 얼굴 위로 엷은 그림자가 겹쳤다.

이제 두 사람 사이는 서로의 숨결이 얽힐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한쪽이 숨을 죽이는 바람에, 그가 내쉬는 숨소리만이 낮게 들려올 뿐이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내 웃음을 그에게 옮길 수 있을까……?’

2. 작가 소개

빈즈(Beans)

취향에 맞는 책을 찾고 찾다, 어느 날 아예 직접 글을 써버리기로 결심, 웹 연재게시판에 첫 글을 올린 후 3년간 꾸준히 집필한 소설이 ‘세인트 루이 기숙학원(Saint Louie Academy)’이다.

개인적인 욕심에 시작한 글이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개인지 제작과 eBook 발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글을 쓰는 것보다는 읽는 것을 여전히 좋아하지만, 쓰고 싶은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면 언제라도 글 쓰는 즐거움을 다시 누리고 싶다.

현재는 직장에 다니며 틈틈이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삶의 소소한 낙이다.

▣ 출간작

세인트 루이 기숙학원

3. 차례

22-2. 강한 자와 승리하는 자

#07.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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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4.

#15.

#16.

24. 처음이자 마지막

#01.

#02.

#03.

#04.

#05.

#06.

#07.

#08.

#09.

#10.

#11.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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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6.

#17.

#18.

#19.

#20.

4. 미리 보기

“며칠 전 공주님께서 행하신 일로 마음이 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요?”

나오미가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후작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일국의 황제가 되실 분께서 그토록 경솔한 언행으로 주위를 어지럽혀서야 되겠습니까. 그 때문에 나라가 안팎으로 어수선해졌지요.”

“저한테는 제 기분이 어떤지 말할 권리도 없나요?”

“소신은 누구나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된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 말씀은 후작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거겠지요?”

그녀의 반문에 후작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셨다. 그와 함께 인자해 보이는 잔주름도 사라졌다. 나오미는 그의 얼굴을 마주보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자기가 한 말을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작자에게까지 공주의 의무가 어쩌고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면 그깟 왕관 따위는 바다 속에 처넣어 버리는 편이 낫다.

폰 어윈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점잖지 못한 방송 때문에 누군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공주님이라면 보다 현명하게 처신했을 겁니다.”

“누가 누구 때문에 위험해진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러면 남의 약점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는 것이 후작님의 ‘현명한 처신’인가요?”

“애초에 현명하게 처신한다면 약점을 잡힐 일도 없겠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후작이 빈정거렸다. 나오미는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대로, 열정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기 전에 한 번이라도 신중하게 생각해 보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지금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폰 어윈은 말하고 있는 것일까? 소중한 사람들이 공주 자신의 일로 괴로워하는 것-그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하는 걸로도 모자라 아직도 받을 벌이 더 남았다는 말인가?

나오미는 눈물을 글썽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급히 눈을 깜빡여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은 공주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기에, 그녀의 목은 언제나 꼿꼿했다. 그리고 남들로부터는 뻔뻔스럽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그런 사진을 찍힌 것이 잘못이라고 인정하기도 싫었다. 자신이 잘못한 게 있다면-트로이를 너무 쉽사리 믿은 것, 폰 어윈 부자를 도발하기 위해 애꿎은 닥터 맬서스를 끌어들인 것, 그런 계획을 사전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어쨌든 실수는 누구라도 저지르는 법이었다.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이 그런 쓰레기였다고 해서, 자신이 수치와 모욕을 당해야 될 이유는 없었다.

평범한 소녀였다면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 작은 소동이 이는 것으로 끝났을 일도, 나오미의 경우는 제국과 쥬르문트 간 문제로까지 비약되었다. 그녀는 이와 연루되어 곤혹을 겪고 있을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로 책임 있는 자가 누구인지, 공주 자신이 그에게 도리어 협박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소리쳐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 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몸을 뒤틀어 후작의 비웃음을 피하는 게 다였다.

이렇게 무력할 수가.

나오미는 탄식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쩌면 어머니도 오랜 세월을 이런 무력감에 빠져 보냈으리라는 이해가 싹트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새를 사로잡기는 어렵지만 새장에 갇힌 새의 날개를 붙들어 꺾기란 얼마나 쉬운가. 또 한 번 날개를 꺾였던 새가 다시 자유로이 하늘을 날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생각을 할수록 소녀는 사랑하는 오라버니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생명의 위협도, 지위와 재산의 박탈도 이안에게서 본질적인 것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시련은 그를 더욱 강인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게 어제였던가, 그저께였던가……?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마르셀 경이 말없이 손에 쥐어 준 쪽지를 읽고서 나오미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괜찮아, 나오미. 잘하고 있어.」

그 짧은 메시지를 쓴 것이 누군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세인트 루이 학원의 거울 로고가 찍힌 메모지와 짙은 푸른색 잉크, 무엇보다 그 정연한 필체를 본 순간 나오미는 편지를 보낸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안이 어느 날 밤 홀연히 황궁을 떠난 다음 처음 받는 연락이었다. 거기에는 ‘얘기도 없이 떠나서 미안하다’라든지,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아라’라든지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쓰여 있지 않았으나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내용은 모두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쁜 동시에 한없이 슬펐다. 이안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자신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곁에 있는 후작의 존재는 그녀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공주님께서 앞으로는 부디 자신의 지위와 명예에 걸맞게 행동하시길 바랄 따름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주제를 아는 건 중요한 일이지요.”

나오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대꾸했다.

후작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피식거렸다.

참다못한 공주가 종을 울리려 할 때였다. 뒤늦게,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육중한 발놀림은 분명 안드레아스 황제의 것이었다. 그렇지만-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바마마께서는 저토록 급히 걸으시는 일이 좀처럼 없는데……? 접견이 있을 때면 으레 동행하는 비서관의 발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추측컨대 황제는 무언가 돌발 사태가 일어났다고 여기는 것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실까? 폰 어윈 또한 호기심을 느낀 듯 고개를 문 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쌩’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황궁의 주인이 들이닥쳤다.

나오미는 얼떨결에 눈을 내리깔았다. 엠페러 궁에서 이안의 모습이 사라진 다음부터, 부녀의 관계는 전처럼 살갑지 못했다. 부모님이 별거 상태에 들어간 지금 외동딸인 자신이 더 잘해야 된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녀는 아직 오빠가 당한 일을 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황제는 그런 가정사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문이 쾅 닫히자마자, 그는 이렇게 소리쳐 딸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나오미! 여기 있었구나! 내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그 쥬르문트 인이 하는 말이 사실인지-.”

그녀가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되물으려는데, 폰 어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작은 예를 표한 뒤 형식적으로나마 몇 마디 안부 인사를 건네려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시도는 인내심 없는 아버지에 의해 곧 분쇄되고 말았다.

“폰 어윈 후작, 나는 딸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좀 기다리시오. 나오미, 이렇게 중요한 때에 어째서 후작 같은 자를 상대하고 있는 게냐? 아니, 이럴 것이 아니라 얼른 텔레비전을…….”

“텔레비전이라고요? ……그렇지만 아바마마께서 그런 건 보지 말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안드레아스는 이를 못 들은 체했다. 리모컨을 찾아 온 방을 헤매는 그의 모습은 자못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나오미는 그저 눈만 굴렸고, 후작은 당황하여 멀거니 서 있었다. 황제가 그런 후작을 툭 쳤다.

“후작, 거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좀 비켜서시오. 어찌 이리도 도움이 안 되는지!”

“……황송하옵니다, 폐하.”

황제는 후작이 방금 전까지 깔고 앉아 있던 쿠션 밑에서 리모컨을 찾아냈다. 나오미는 신기해하며 그 물건을 바라보았다. 황궁의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공간’에 해당하는 접견실에도 텔레비전이 한 대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것이 틀어져 있는 광경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안드레아스가 ON 버튼을 누르자 조용하던 방 안이 갑자기 시끌시끌해졌다. 동시에 창문만큼 커다란 화면에 낯익은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공주가 그 남자를 가리켰다.

“저건 닥터 맬서스잖아요……?”

그제야 그녀는 아버지가 말한 ‘그 쥬르문트 인’이 누구를 뜻하는 건지 깨달았다. 황제가 대답인지 뭔지 모를 신음을 흘렸다. 폰 어윈 쪽을 건너다보니 눈에 띄게 굳은 얼굴로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자신이 며칠 전 사랑을 고백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레미 맬서스가 있는 곳은 급히 꾸며진 티가 나는 회견장이었다. 화면 한구석에는 생방송임을 알리는 붉은 표시가 떠 있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쥬르문트 억양이 섞여 있는 걸로 보아서는 그쪽에서 보내온 현장 방송인 모양이었다.

나오미는 흥미롭게 그 광경을 관찰했다. 닥터 맬서스의 휠체어는 테이블과 그 위에 놓인 마이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지만, 질문을 받는 닥터 본인의 태도는 자신만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그의 뚜렷한 얼굴선과 보석 빛깔 눈동자, 쓴웃음이 어린 창백한 입술을 차례로 훑었다. 언제고 저 남자에게는 자신의 경솔한 언행을 사과해야 할 날이 오리라. 그렇지만, 쳐다보기만 해도 이처럼 위축되는 상대에게는 어떤 식으로 사죄를 하면 좋단 말인가? 맬서스라는 존재가 주는 위화감은 황족들의 위엄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또 이는 하나뿐인 오라버니가 언짢아할 때 느끼는 것과도 다른 감정을 안겨 주었다.

처음에 그녀는 닥터 맬서스가 쥬르문트 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브라운관을 통해 보니 국적이 문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쥬르문트 인이었지만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딱 그 한 사람한테서만 나오고 있었으니까-.

맬서스가 헛기침을 했다.

“또 더 물어볼 것 있소?”

나오미는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 전 ‘뉴스토피아’의 지면을 통해 그가 밝혔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녀도 어느 정도 주워들은 바가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그는 공주의 난데없는 고백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펄펄 뛰거나 하지는 않았다. 제국인들에게 미움을 살 게 뻔한데도 다시 빅토르로 와 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교차했다. ‘나도 저렇게 대담해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녀는 혼자 라디오 방송에 나가 온 대륙을 놀라게 했던 자신의 무모함을 잊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웬 기자 회견이지……?’

궁금해진 공주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누군가 머뭇머뭇 던진 질문이 그 궁금증을 얼마간 풀어 주었다.

“어, 그러니까 그 사진이 공개된 것은 닥터의 고의가 아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신, 귀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소? 내가 말할 때 뭘 듣고 있었던 거요?”

맬서스가 호통을 쳤다. 어설프게 물었던 기자가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닥터는 그 자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낸 다음 이번에는 정면으로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자기 일보다 남의 일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내 이름과 정체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이 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거기 제국인들, 당신네들도 말이오. 특히 요 근래에 불미스러운 몇몇 사태와 관련해 나에 대한 얘기가 그쪽에서 몇 번 나왔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래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니오? 나는 사생활을 존중받을 권리도 없나?”

나오미는 자기도 모르게 후작을 곁눈질했다. 설마……. 그 사이 닥터 맬서스에게도 무슨 짓을 저질렀나? 그러나 폰 어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흉측하게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순간 후작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맬서스가 짓고 있는 미소에 비하면 너무도 보잘것없었다. 그녀는 다시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저, 그렇지만 데일리 쥬르문트에 실렸던 사진들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그 사진을 찍으셨다고 주장하시는 분께서, 사진을 보낸 것은 부정하신다면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뭐?”

나오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순간 공주로서 너무 품위 없게 행동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바로 옆에서 제국 황제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고 대귀족 폰 어윈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으니까-. 그 가운데 천연덕스러운 사람은 오로지 제레미 맬서스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이 마스터의 서랍에 손을 댈 수 있는 인간이 대륙에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당신들도 아시다시피, 나는 옛 은인과 맺은 친분이 의심을 사 한 차례 불쾌한 조사를 받은 적이 있소-바로 제국의 나이트라는 녀석들에게! 그 녀석들 입장에서야 당연히, 내 금고 안에 잠자고 있던 그 은밀한 사진들이 제국 황실의 전통과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좀도둑처럼 남의 필름을 훔쳐 갔으면 간수나 제대로 할 것이지, 어디다 정신을 빼놓고 다니기에 그 중요한 걸 잃어버리는 거요? 덕분에 나도, 그 사진에 찍힌 사람도 엄청나게 곤란해지지 않았소?”

“……저게 무슨 소리지요, 아바마마?”

“그건 내가 나오미, 네게 묻고 싶은 말이란다, 그러니까 너보다 열여덟 살은 많은 저놈이 그 사진을 찍었……?”

무엄하게도 다른 기자가 부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말씀은 즉, 닥터 맬서스께서는 나오미 공주의 동의하에 그 사진들을 촬영하셨다는 것이겠지요? 그럼 두 분께서는 ‘그런’ 사진을 찍어 공유해도 되는 사이라는……?”

맬서스가 또 다시 헛기침을 했다. 그는 당혹감-또는 어색함을 감추려는 것처럼 한 손으로 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그것을 무마하려는 듯 괜스레 성질을 냈다. 타고난 배우인 나오미는 그 모든 것이 교묘하게 계산된 행동임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연기의 일부라 하더라도, 그의 입가에 어린 미소는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그럼 내가 연인이 모르게 카메라를 설치해 뒀다가 그걸로 시답잖은 협박이나 일삼는 비열하고 저급한 인간 말종으로 보이오? 아니면 그 알량한 사진들을 하이에나 같은 놈들에게 팔아 한몫 챙겨 보려는 거지 근성의 소유자? 관음증 성도착자? 이보시오, 멀쩡한 사람을 그 따위 상변태로 몰고 가지 마시오. 나는 나오미 공주의 명예와 우리 두 사람의 추억을 위해서 그 사진들을 평생 비밀로 간직하기로 맹세했었소. 그 비밀을 건드린 것은 다음 아닌 제국 황제의 나이트들이었고, 하! 그러니 내가 지금 안 억울하게 생겼소?”

폰 어윈이 혀를 찼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몇 번이나 “허, 참! 기가 막혀서!”라는 말을 내뱉었다. 안드레아스는 다 큰 딸을 차마 어쩌지는 못하고 이만 부득부득 갈았다. 나오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러다간 나오미 심장이 버티지 못하겠어. 근데 왜 이렇게 안이 덥지? 지금은 겨울 아닌가? 그녀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그러시다면, 나오미 공주가 라디오 방송에서 그, 고백을 했을 때 어째서 그것을 무시하는 것처럼 행동하셨던 겁니까?”

이번 질문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공주의 은밀한 사진을 찍은 자나 보낸 자의 정체가 대륙 어디에서도 밝혀진 바 없으므로, 맬서스의 지금 발언은 100퍼센트 사실 또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둔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자의 농간에 놀아날 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그 기자를 마주보았다.

“……당신 같으면, 이런 몸을 해 갖고 스스로 어린 공주의 연인이라고 나설 수 있을 것 같소? 아까도 말한 것 같지만, 그 사진은 내가 사고를 당하기 전에 찍었던 거요. 그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 전-아직은 떳떳하게 공주의 연인 행세를 할 수 있었을 때 말이오.”

“……그게 정말이냐, 나오미?”

황제가 딸을 다그쳤다. 나오미는 즉시 이를 부정했다.

“아뇨.”

이에 아버지는 적잖이 안도하는 기색이었으나, 이어진 딸의 대답에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물론 그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다리를 못 쓰게 됐다고 해서 누군가를 좋아하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아닌가요?”

“공주님, 경솔한 행동은 삼가시라고 아까도 말씀을 올렸는데…….”

그 방에 있는 누구도-심지어는 조언이랍시고 같잖은 말을 주워섬긴 폰 어윈 자신조차도 이쯤 되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사진을 빼돌린 것이 자신의 나이트들일 리는 죽어도 없다고 믿고 있는 안드레아스는 닥터 맬서스의 말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인지 종잡을 수 없어 했다. 그게 전부 날조임을 알고 있는 후작은 자신이 아는 것을 입 밖에 내지 않으려 얼마 남지 않은 자제심을 짜내고 있었다. 나오미는 벅찬 가슴을 끌어안고 텔레비전에 집중했다. 마스터의 속셈? 그런 거야 아무려면 어떻겠는가-어쨌든 그가 공주 자신의 이름을 거론했다는 것은, 그녀가 얼마 전 했던 시도들을 허사로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무안해진 기자들이 입을 다물자 맬서스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련히 카메라를 응시하는 두 눈 너머에서는 ‘대륙 최고의 지성’이 펼치는 잔머리가 풀가동되고 있었다. 그는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몸을 낮추고 기회를 기다렸다. 기자들은 꼼짝없이 이에 걸려들었다. 하긴, 바로 그러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던 것이 아닐까? 나오미는 자꾸만 웃음이 나와서 입을 틀어막았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닥터. 사진 유출 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입니까?”

“제국 행을 결정하신 데는 나오미 공주의 일도 작용을 했나요?”

맬서스는 등을 쭉 폈다.

“사진 문제는 상식적인 선에서 처리할 거요. 데일리 쥬르문트를 명예 훼손으로 고발하는 건 제국 황실의 몫이겠지. 나는 나를 조사했던 나이트들을 불법 주거 침입죄와 절도죄로 고소할 것이고, 그들을 고용했던 안드레아스 3세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을 생각이오. 그리고 내 제국 행은 나오미 공주와는 관련이 없지만, 싫어도 황실의 누군가와는 얼굴을 마주해야 할 것 같소.”

“저 시건방진 놈이 누구를 어떻게 하겠다고!”

안드레아스가 화면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나오미는 민망해 낯이 붉어졌지만, 내심으로는 아바마마가 그런 반응을 보여 주시는 게 기뻤다. ‘제국놈들’과 언론을 지극히 싫어하는 제레미 맬서스가 이렇게까지 해서 노리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그는 최대한 안전하고 신속한 방법으로 제국에 오기 위해 이 말도 안 되는 연극을 꾸며낸 것이었다. 그것도 양국 언론과 제국 황실, 보이지 않는 적들을 상대로 해서! 공주는 며칠 전 자신이 방송을 했을 때, 세인트 루이에 있는 소녀 하나가 그랬던 것처럼 몹시도 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