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뜻밖에 우리는. 조은수와 류지훈은 그렇게 사랑에 빠져 우리가 되었다.

일 잘하고 깔끔한 매너를 자랑하는 인텔리커피의 에이스 사원 류지훈 대리. 실력 있고 악착같이 일하지만 돌아오는 건 ‘독한 년’이라는 소리뿐인 신입사원 조은수. 사랑 때문에 무너진 어머니를 기다리느라 메말라버린 남자와, 진창 같은 삶에 자기 몫이라고는 없어 항상 전쟁처럼 살아온 여자에게 사랑은 미친 짓이고 사치다. 세상을 향해 선을 긋고 벽을 둘러치는 데 익숙한 두 사람. 사랑이라고는 할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누구보다 달달한 은밀한 연애.

“누가 옷을 벗어주면서 이렇게 팔을 꽁꽁 묶어요? 누가 보면 연행하는 줄 알겠어요.”

“그렇게라도 안 하면 또 ‘됐어요.’ 하고 거절할 테니까.”

“…….”

“잘해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잖아요, 조은수 씬 늘 도망치니까.”

은수가 문득 웃음을 그쳤다. 마주 선 남자에게서 나온 말의 숨은 의미를 찾느라 한참 눈을 깜박이는데,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던 지훈이 빙긋 웃었다.

“웃는 모습이 예쁘네요.”

2. 작가 소개

신민영

사소한 인생을 근사하게 살고 싶다.

촌스러운 낭만을 기억하면서.

블로그 : http://blog.naver.com/ajwannabe

▣ 출간작

불꽃

유혹의 기술

불가분의 연애

▣ 출간 예정작

친절한 여자

3. 차례

#프롤로그

#01. 소통의 오류

#02. 멈칫하던 순간

#03. 물들어

#04. 너에게만 반응해

#05. 마음의 주인

#06. 고백하는 겁니다

#07.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4. 미리 보기

“어딜 가요, 혼자.”

지훈이 성큼성큼, 거의 뛰다시피 걸어와 은수의 곁에 섰다. 숨이 고르지 못한 것을 보니 저만치까지는 뛰어온 모양이었다.

“아, 그냥 제가 좀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방해라니. 무슨 그런 말이 있어요?”

“유리 씨는 잘 들어갔어요?”

“혼자 위험하게. 그러다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그렇게 겁도 없이 다닙니까?”

“뭐, 전 괜찮습니다.”

은수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빙긋 웃었지만, 지훈은 따라 웃지 않았다. 찌푸린 미간이 조금 화가 난 듯도 했다. 아, 그래. 맞다, 참. 저 사람은 날 싫어하지. 새삼스레 잊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다.

은수는 뭐 어쩌겠냐는 듯 심드렁한 한숨을 쉬고 다시 걸었다. 남자도 더는 심통을 부릴 마음이 없는지 나란히 걷기 시작한다.

자꾸만 오한이 들어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 바람에 걸음이 조금씩 뒤처졌다. 은수의 눈에 지훈의 잘생긴 뒤통수와 맨질맨질한 귓바퀴가 눈에 들어왔다. 류지훈다운 뒷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와요.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얼른 가야 거기도 자리를 파하지.”

“네.”

“발 조심해요. 또 맨발로 걸을 생각 아니면. 오늘은 운동화도 없어요.”

발목에 힘 빠진 사람처럼 휘청휘청 걷던 은수는 속도를 늦춘 지훈 곁으로 빠르게 걸어가 나란히 섰다. 그리곤 살갑게 생긋 웃었다.

“류 대리님, 저 오늘 좀 놀랐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꽤 다정하시던데요.”

“네?”

“서유리 씨가 류 대리님 이야기 많이 해요. 배울 점도 많고, 좋은 분이라고.”

이왕 이렇게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남 좋을 일 한번 시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은수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치켜세운다. 순간 지훈의 표정이 민망하고 머쓱해지는 것을 본 은수는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이 남자, 쑥스러움을 타네.’

이렇게 되니 어쩐지 좀 더 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술기운도 좀 올랐겠다, 약간은 넘어선 장난을 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받아주지 않으면 모든 게 술 때문이라고 변명해버리면 된다는 고약한 마음도 들었다.

‘당신 생각처럼 내가 그렇게 별로인 것만은 아니에요. 피도 눈물도 없어 보여도 나 그렇게 멋없는 사람 아냐. 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싫어하면 내가 좀 억울하잖아.’

그 멋이라는 게 뚜쟁이 역할로 확인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다. 더 정확하게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게 맞다. 그리고 서유리에 대한 류지훈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다는 게 가장 내밀하고 은밀한 욕구이기도 했다. 스스로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웬일인지 참지 못하고 입이 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유리 씨 눈에는 대리님이 제일 멋있대요. 얼마나 이야기한다구요.”

“그만하죠. 좀 듣기 민망하네요.”

좀 전의 다정함과는 상반되게 무뚝뚝한 목소리였지만 그것도 류지훈답다. 냉정해 보이는 겉모습 속에 꽃잎같이 부드러운 마음결을 숨기고 있나 보다고 여겼다.

“사실이잖아요. 솔직히 인기도 많으시고. 그때 인사팀장님이 다른 대리님들 다 제치고 유독 류 대리님한테만 소개팅 주선하신 것도 그렇고.”

은수의 목소리에서 짓궂은 놀림의 기운을 느꼈는지 지훈은 약간 어이없다는 얼굴로 너털웃음을 짓는다. 은수는 봉인 해제한 그의 웃음에 불쑥 친밀감이 느껴져 따라서 배시시 웃었다.

“웃으시니까 보기 좋은데요? 유리 씨 말이 맞네요. 웃으시니까 훨씬 나아요. 멋있어요.”

“조은수 씨 취했습니까?”

지훈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더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은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순식간에 바뀐 지훈의 표정에 은수는 멈칫 당황한다.

‘그래……. 내가 좀 넘쳤지.’

은수는 어정쩡하게 웃음을 지우며 시선을 떨어트린다. 역시 좀 오버였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취했어요?”

“네. 조금 그런 것 같네요.”

은수는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이 난처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를 어떻게 모면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술기운 때문이라면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

“취한 거면, 취한 김에 서유리 씨 말 빌려서 말고 조은수 씨 생각을 좀 이야기해보는 건 어때요?”

은수는 뜻밖의 말에 번쩍 고개를 들어 지훈의 얼굴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찬바람 쌩쌩 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입꼬리에 한 자락 웃음을 건 다정한 얼굴의 그가 은수를 보고 있었다.

“난 그게 궁금하거든요, 조은수 씨 생각이.”

“저……요?”

“유리 씨 생각은 별로 안 궁금해요. 더구나 조은수 씨 통해 듣는 건 더.”

“…….”

“내가 궁금한 건 오직 조은수지. 그러니까 당신 생각을 이야기해줘요, 취한 김에.”

“아……. 태, 택시 잡아야죠? 크, 큰길로…… 나갈까요?”

묻는 말에는 대답 않고 엉뚱한 소리를 한 것도 모자라 저도 모르게 말을 좀 더듬었다.

“입이 얼어서 말이 잘 안 나오네요.”

당황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괜히 날씨 핑계를 댔다.

대충 그렇게 좀 둘러대며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했다.

싸늘하게 식은 뺨을 본 남자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은수의 어깨에 걸치듯 덮어준다.

‘이러면 분위기를 바꿀 수 없잖아.’

조금 전보다 더 당황했다.

지훈은 여자가 뒤로 물러나며 그 손길을 피하려는 것도 아랑곳 않고 심지어는 팔을 앞으로 묶어 풀 수 없게 만들었다. 황당한 얼굴로 절 쳐다보는 은수에게 지훈이 어깨를 으쓱한다.

“나 멋있는 척하는 거 아닙니다. 그냥 조은수 씨 취한 모습 재미있는데, 추우면 빨리 깰까 봐.”

가만 듣고 있던 은수가 풉, 웃음이 터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걷던 지훈의 입술도 조금 씰룩이더니 곧 피식 웃음이 걸렸다. 숨죽였던 웃음이 곧 큰 소리로 변하고, 은수는 주책없게 멈출 줄 모르는 웃음 때문에 더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섰다. 은수가 겨우 손등으로 입을 막아 웃음을 참았다.

“아, 죄송해요. 대리님. 대리님 말이 너무 뜬금없어서…….”

“솔직히 그런 생각 했잖아요. 어디서 본 건 있는 모양이라고. 안 그래요? 난 그런 표정을 본 것 같은데.”

은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픽 웃음이 났다.

“그런데 별로 안 멋있어서 그게 더 우습네요. 누가 옷을 벗어주면서 이렇게 팔을 꽁꽁 묶어요? 누가 보면 연행하는 줄 알겠어요.”

“그렇게라도 안 하면 또 ‘됐어요.’ 하고 거절할 테니까.”

“…….”

“잘해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잖아요, 조은수 씬 늘 도망치니까.”

은수가 문득 웃음을 그쳤다. 마주 선 남자에게서 나온 말의 숨은 의미를 찾느라 한참 눈을 깜박이는데,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던 지훈이 빙긋 웃었다.

“웃는 모습이 예쁘네요.”

벼락 맞은 사람처럼 말을 잊은 은수를 보며 남자가 더 큰 웃음을 터트렸다. 고르게 드러난 치아와, 예쁘게 올라가는 입꼬리, 살포시 감기는 눈꼬리가 차례차례 시선에 잡혔다.

“취했냐고 묻고 싶죠?”

“…….”

“예뻐요, 은수 씨는. 웃을 때 더. 전부터 생각했어요.”

순간 목덜미부터 손끝까지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솜털이 빳빳하게 치솟고 심장이 4기통 엔진처럼 폭발적으로 뛰었다.

눈이 아프게 쏟아지는 가로등의 불빛과, 아직 채 깨지 못한 술의 여운, 귀가 떨어져나갈 만큼 시리던 꽃샘추위, 그 쌀랑한 바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때, 조은수의 심장이 달음박질치고 눈앞이 잠깐 어지러웠던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