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와 함께 삶을 걸었다. 걷다보니

어느새, 온 세상이 황혼으로 물든 꽃밭이더라.

향취가 그윽하여,

지나온 길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제르 시나와.

데바람의 총비였다는 신분을 숨기고 원수국으로 도망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냉혹한 땅의 영주가 된 그녀의 앞에 놓인 끊이지 않는 불신, 거듭된 절망

그리고 잘라낼 수 없는 인연.

상처를 온몸에 휘감은 채 살아남은 그녀의 새로운 삶이, 역사가 시작된다!

“너는 내 젊음의 마지막 아픔을 함께 이겨내준 한 사람이다. 언젠가는 아픔 뒤에 성장이 아닌 아픔 뒤에 부서짐이 뒤따르는 시간이 우리에게도 찾아오겠지만 그 미래에도.”

“…….”

“네가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

그녀는 그와 함께 삶을 걸었다.

걷다보니 어느새, 온 세상이 황혼으로 물든 꽃밭이더라.

향취가 그윽하여,

지나온 길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2. 작가 소개

신여리

은위, 돌시아니 등의 필명으로 웹소설 작가 활동 중.

누군가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은, 그러나 게으른 아가씨.

무더운 7월의 첫째날 태어난 게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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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shinyeori@naver.com

kakaotalk▶shinyeori

▣ 출간작

물의 자흔을 쫓는다(구)

수라화

가시나무 우는 성 1부

바라연

▣ 출간 예정작

마리포사 mariposa

이매魑魅

미사

3. 차례

#첫 번째 에필로그 ： 말로리의 집

#두 번째 에필로그 ： 그루터기에도 꽃은 피어난다

#세 번째 에필로그 ： 다시, 그곳으로

#네 번째 에필로그 ： 이스털리 윈드, 동녘바람 - 앙상블로의 길

#외전 후기

4. 미리 보기

이 이야기는 왕위 계승이 마무리되고 난 후, 제르가 퀸시오로 떠나기 열흘 전의 이야기다.

레피스는 몹시도 화가 나 있었다. 그럴 수밖에. 레피스 역시 반생을 알렉시스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살아온 남자였다. 알렉시스의 최측근이었던 그가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을 때부터 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그는 대관식이 있은 후 거의 보름간 알렉시스를 피했다.

한 달쯤 지나고 나니 어느 정도 왕도의 혼란이 정리가 되었다. 주력은 역시 쇼하인의 수천 명의 군사들이었다. 일찌감치 발을 뺀 베이하크 가문의 사병들은 귀향을 결정했다. 레피스가 대관식 이후로 낙향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으므로 갑작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레피스는 깐깐하고 냉정해 아랫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로 유명한 상관이었지만 업무 능력만큼은 탁월했기 때문에 궁내부원들은 그의 귀향을 몹시 반대했다. 몇몇 이들이 나서서 그에게 큰 공을 세웠다 추어올리는 것으로 분노를 풀어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알렉시스가 작위 승작까지 추진해주었지만 그는 꿈쩍도 않았다.

처음에는 저러다 말 거야, 하고 속 편하게 웃던 알렉시스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던지 레피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알렉시스 역시 레피스를 왕도에 잡아두고 싶어 하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알렉시스가 그를 직접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여어.”

“누구십니까.”

저런 모르쇠는 애교였다.

“아직도 그렇게 내게 화가 났어? 너무 뒤끝이 심하다고 생각 안 해?”

“뒤끝? 그때 주먹질로 끝난 게 다행인 줄 아십시오, 각하.”

제르가 보기에 살살 달래는 정도로 레피스의 속이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덩달아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레피스는 막무가내로 영지로 돌아가겠다고 했으므로 상황은 더욱 험난해졌다.

결국 알렉시스는 레피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베이하크령, 세나뵈까지 따라가기로 마음먹을 수밖에 없었다.

“제르, 너도 돌아가는 길에 한번 들러볼래? 거기 재미있는 애도 있어.”

레피스가 수틀리면 칼부림이라도 할 것처럼 학을 떼는 와중에도 알렉시스는 재미 따위를 찾았다. 정말 큰일 날 사람이지 싶었다. 하지만 제르의 결정은 쉬웠다. 퀸시오로 가는 길목에서 인접한 옥토가 바로 베이하크의 거점이 있는 중소 규모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제르와 알렉시스는 함께 베이하크의 사저가 있는 세나뵈로 가서 이틀 정도 머문 후 헤어지기로 합의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레피스의 의사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닷새 후, 그들은 동부 세나뵈로 향했다.

그곳은 엘올라에서 닷새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죽자고 알렉시스를 떨쳐내려는 레피스와 그의 마음을 바꾸려는 알렉시스의 설전은 마차 안에서도 이어졌다. 대체 왜 굳이 따라오십니까. 누가 반긴다고. 레피스가 그렇게 핀잔을 놓으면 알렉시스는 말로리는 잘 지내고 있나? 하는 동문서답으로 속을 뒤집었다. 그 과정에서 제르가 알게 된 건 말로리가 레피스의 부인이라는 것 정도였을까. 알렉시스는 레피스를 달래러 온 건지, 화를 돋우러 온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제르는 죄책감보다는 불편함이 먼저였다. 굳이 좁은 마차 안에서 이렇게 옥신각신해야 하나.

그리고 세나뵈령으로 출발한 지 나흘째 되는 날 오전,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마차가 멈추었다. 제르는 뤼민느를 안고 마차에서 내렸다.

베이하크가의 고풍스러운 저택이 그들을 맞이했다.

내내 사납게 물고 뜯고 할 기세로 투덜거리던 레피스는 저택 앞에 서기 무섭게 꼬리를 내렸다.

“말로리가 보면 놀랄 테니 좀 기다리세요.”

“뭐야, 우리 온다고 말 안 했어?”

가뿐하게 마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는 알렉시스와는 달리, 그는 몹시도 착잡한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 지금 왜 제가 알렉시스 님이랑 저희 집 문 앞에 서서 승강이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말했겠습니까?”

“안에서 기다릴게.”

“그렇게 하세요.”

레피스가 신경질을 내며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 대접이 너무 야박했다. 꼬물거리는 뤼민느를 조심스레 다독이며 알렉시스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으니, 알렉시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