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내가 왜 사는가 물으셨습니까? 매일 당신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당신이 내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아도, 그런 당신을 잠시라도 놓치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 두렵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잃은 고구려의 황녀 학아. 긍지 높고 아름다운 그녀는 백성을 위해, 나라를 위해 살아간다. 비록 그녀의 마음이 속으로는 문드러지고 고통에 비명을 지른다 하더라도.

혼란한 세상, 얽히는 이해관계 속 단아와 그런 그녀를 뒤에서 지키는 호위무사 무, 그녀와 자매처럼 자라온 미령, 장수 대무예의 마음도 엉켜드는데…….

“내가 무엇이건 너는 상관이 없겠지? 내 신분이 황녀이든 노비이든 나는 네 주인일 뿐이니.”

무는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것 같았다.

“명분 있는 네가 내 목숨보다 더 가치 있을 거야. 넌 다른 누구의 무엇이 될 수 있는 사람이고, 난……. 그러니 보잘것없는 날 위해 네 귀한 목숨을 버리진 마.”

그녀가 스르르 머리를 기댔다.

“날 위해서는…….”

2. 작가 소개

이선미

1971년 대구 출생.

성숙한 사람들의 사랑, 철부지들의 사랑, 자기애, 집착 등 사랑의 다양한 측면을 그리고 싶어 하는 작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담아내는 로맨스소설을 쓰는 것이 목적이라고.

▣ 출간작

아라사의 서우여

석빙화

광란의 귀공자

10일간의 계약

커피프린스 1호점

하록과 배태랑

달의 시 外

3. 차례

#서장

#01

#02

#03

#04

#05

#06

#07

#08

#09

4. 미리 보기

“황녀일 것이야.”

소스라치게 놀란 학아는 무의 목을 죄었다. 들키지 않고 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담을 넘었다. 병사들이 철저하게 지키고 선 땅 위보다는 지붕으로 움직이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그래서 무는 학아를 업고 지붕 위를 걷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진충의 처소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학아를 놀라게 했다.

무를 밀쳐 조심스럽게 기와를 밟고 내려서서는 몸을 낮추었다. 귀를 대고 엎드리자 무가 얼른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그녀가 자칫 잘못해서 미끄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학아는 그런 것에는 전혀 아랑곳없이 말소리에 집중했다.

“황녀가 분명해. 자네도 보지 않았나. 세상에 그리 특출한 미인은 보지 못했어. 어느 사내가 마다할까. 오랜 세월 한 지붕 아래 지냈다는데 혈기 넘치는 장수가 가만히 두고 보았겠나?”

“하지만 조문홰의 목을 도려낸 것이 누구입니까?”

“나도 그것이 놀랍단 말이야. 고 앙증맞은 손으로 조문홰의 목을 따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허나 그 많은 병사들이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난리들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은가. 병졸들의 칭송이 하늘을 찌르니 정녕 여걸일세.”

“맞습니다. 그 일로 인해 황녀의 정통성을 물어 민족의 수두(首頭)로 인정하지 않았던 옛 고구려 귀족들이 입도 떼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그 계산을 하고 저지른 일이라면 황녀는 여간 간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더욱 풍문에 솔깃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풍문이라니?”

“풍문에 따르면 황녀가 비록 경국지색이긴 하지만 표독하고 독살스런 여인이란 말이 있더이다.”

“가시 없이 화려한 나비보다야 톡 쏘는 꿀벌이 낫지.”

“제가 보기엔 황녀가 모란이라면 미령은 매화입니다. 어느 쪽도 놓치기 아까운 꽃이 아니겠습니까?”

“허면 어느 쪽이란 말인가?”

모란이니 매화니 꽃 타령을 하는 것은 손만영의 목소리였다. 무슨 작당을 꾸미려는 것이 분명했다. 학아는 더욱 귀를 곤두세우며 눈을 빛냈다. 귀를 바짝 들이대느라 자세는 신경 쓸 수도 없었다. 사지를 개구리처럼 굽혀 엎드렸다. 그런 그녀의 허리를 무가 붙잡아 버티고 있었다.

“고민할 것 없이 황녀를 데려가자니까. 설마 제 병사들이 우러르고 있는 황녀가 내 손에 있는데 배신을 할 수 있겠느냐.”

그제야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대화의 핵심을 알아챘다. 그들은 대조영이 배신을 하고 뒤를 칠까 두려워 인질을 잡아두려는 것이다. 덧붙여 학아는 이진충의 목소리에서 자신에 대한 음흉한 속셈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초리가 떠올라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대조영이 왕조를 창건할 뜻이 있다면 황녀는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일 뿐일 테니 인질로서 소용이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려고 든다면 힘없는 여자 하나 처치하는 것이야 문제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분명 대무예에게 여인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으면 그것이 누구인지까지 알아왔어야지. 무슨 일을 이리 허술하게 하는 건가?”

“대무예도 아직 마음을 못 정한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귀띔하는 자의 말로는 두 여자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양입니다.”

“어허, 고놈 참, 복이 터졌구나.”

이진충이 부러움을 담아 이죽거리는 소리에 학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어디에 쓰나. 속으로 혀를 찼다. 이진충의 속셈인즉, 대조영의 둘째 아들인 문예를 잡아두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이제 여자들까지 인질로 잡아두자는 것이다.

“알아내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내일 출정할 예정이니 필시 오늘 밤에는 자신이 마음에 둔 여인과 같이 보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밤 무예가 누구의 처소에 드는지 보면 확실히 알게 될 겁니다.”

“그럼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무예의 뒤를 밟아라. 그러면 그 계집을 데려가는 것이다. 대조영도 며느리가 내 손에 있는데 뒤통수를 치지는 못할 테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내 첩실로 들이면 되겠구나.”

학아는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대조영을 수족으로 쓰려 하면서도 온전히 믿고 있지는 못하는 것이다. 물론, 대조영이 그에게 맹세한 충성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일 뿐이라는 걸 모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진충의 머리도 그만한 머리는 있을 터다. 그렇다고 인질로서 예비를 해두려는 것은 졸장부의 짓이 아닌가. 그것도 전략 중 하나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눈에는 한심해 보이기만 했다.

여전히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는 무에게 돌아섰다. 그러자 그가 등을 돌렸다. 학아는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는 업힐 자세를 취했다. 그의 넓은 등에 가슴이 닿고 그의 두 팔이 무릎 안쪽을 받쳐 들었다. 무는 늘 그랬듯이 숨 한번 몰아쉬는 일 없이 그녀를 업고 지붕을 넘나들었다. 학아는 단단한 어깨를 잡고 있는 자신의 손등을 쳐다보았다. 손등의 뼈마디가 하얗게 눈에 뜨일 정도로 세게 힘을 주고 있었다.

“때가 온 것 같아.”

학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무예를 보내야 할 때가 왔다. 처음부터 그는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싫어 더욱 매달렸었다. 그 사실을 몰랐다면 그토록 집착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게 되었다. 그만 그를 놓아주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녀가 골똘한 생각에 빠진 사이 그들은 처소에 다다랐다. 무는 지붕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뒤뜰에 안착했다. 그의 목을 꼭 죄던 팔을 풀고는 그의 등에서 미끄러지며 내려섰다.

“어느 쪽일 것 같으니? 그가 갈팡질팡한다고? 천만의 말씀이야.”

학아는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처소로 들어갔다. 아비를 불러 목욕물을 내오라 일렀다. 그러는 동안 무는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금을 챙겨 숨겨둔 후에 옷을 벗었다. 오늘 밤 무예가 찾아올 것이다. 그녀는 확신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의 마음을 확인받고 싶은 심술궂은 충동이 일었다.

학아는 마지막 옷을 벗고 목욕통 안에 들어갔다. 향그러운 꽃잎이 동동 띄워져 피곤을 식혀주었다. 어렸을 적, 오라비처럼 다정했던 대무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미령과 함께 자신을 누이동생처럼 아끼고 귀여워해주었었다. 그런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의 마음이 누구에게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미령에게, 대조영에게, 그리고 운명을 향해 보란 듯이 외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보아라, 너희가 허락하지 않은 것을 나는 가졌노라!

목욕통에서 나와 두 겹으로 된 비단겉옷을 입었다. 은은한 황금빛이 도는 비단은 잠자리 날개처럼 얇아서 한 겹만으로는 속살이 훤히 내비칠 정도다. 자줏빛 허리띠로 저고리를 묶고는 머리를 곱게 빗었다.

“예까지 들어오기는 처음이군.”

대무예가 오면 자신의 처소로 안내하라 일렀더니 아비는 그녀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를 들여보낸 모양이다. 학아는 소리를 듣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느긋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올리는 데 열중하는 척했다. 무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머리를 매만졌다. 호박 장식을 꽂아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다소 조심스런 태도로 서 있는 무예가 보였다. 눈길이 부딪히자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은근한 빛을 뿜으며 깊어졌다. 빗을 내려놓고는 휘장을 젖혔다.

“앉으셔요.”

학아는 나긋한 목소리로 자리를 권했다. 탁자에는 이미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무예는 다소 어리둥절한 빛을 띠었다. 그런 무예의 표정을 무시하고 조용히 다가갔다. 그의 팔에 사뿐 손을 얹고는 앉는 것을 거들었다. 그리고는 얌전한 태도로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내가 올 줄 알고 있었소?”

“나를 보지 않고 출정을 하실 생각이셨나요?”

학아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주 보는 무예의 눈길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왜 그러셔요?”

“이건 또 무슨 음모요?”

“음모?”

“나를 또 혼란스럽게 하는군.”

“혼란스럽게 하다니요?”

학아는 턱을 당겨 두 눈을 살짝 치켜뜨고는 그의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나 무예는 미심쩍은 기색을 벗지 않았다. 무언가 못마땅한 것처럼 벌컥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더욱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순진한 척하며 어린아이처럼 똥그랗게 뜬 눈망울을 굴렸다.

“그렇게 나를 볼 때는 더할 수 없이 여리고 순수해 보이는군. 당신도 그걸 잘 알겠지. 나는 당신의 수많은 얼굴이 점점 혼란스럽소. 적응이 안 돼. 판단이 서지 않소. 어렸을 때는 여자아이가 참 영리하고 대범하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학아는 그의 고백을 들으며 빈 잔을 다시 채웠다. 길게 늘어지는 소매를 다른 손으로 잡고는 차분히 술을 따랐다. 은은한 등불을 받은 하얀 손등 위에서 노란 빛이 춤을 추었다. 주전자를 내려놓고 그 손을 거두려는데 빛에 그을린 황갈색 손이 뻗쳐왔다. 커다란 손에 감싸인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안전함, 부드러움, 따스함이 느껴졌다. 학아는 문득 생각했다.

내 것으로 운명 지어졌다면 오라비의 다정함보다 더한 것을 느낄 수 있었을까?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될 거란 걸 몰랐다면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