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난 당신 돈과 당신, 둘 다를 가지겠소.”

국회의원 중 최연소자이자 촉망받는 정치인 영순위 민태웅, 그를 매혹시킨 단 하나의 여자 장설하는 세명그룹의 조카이자 한국 최고의 무용가였으나 태웅에게 설하의 배경 같은 건 거의 의미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눈과 마음을 현혹시킨 단 하나의 여자가 장설하라는 사실뿐. 불안하게 시작한 정략결혼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영혼 설하는 점점 병들기 시작하고, 태웅은 설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어지는데…….

태웅과 설하, 두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고마워요.”

“뭐가?”

“사랑해줘서요.”

그가 고개를 돌렸다. 설하는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놀라는 눈길을 받았다.

“그래서 날 안지 않는 거죠?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걸 아니까, 그러고 싶어도 참는 거죠?”

“…….”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요? 어쩌면 나…… 당신을 사랑할 것 같아요.”

2. 작가 소개

이선미

1971년 대구 출생.

성숙한 사람들의 사랑, 철부지들의 사랑, 자기애, 집착 등 사랑의 다양한 측면을 그리고 싶어 하는 작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담아내는 로맨스소설을 쓰는 것이 목적이라고.

▣ 출간작

아라사의 서우여

석빙화

광란의 귀공자

10일간의 계약

커피프린스 1호점

하록과 배태랑

달의 시 外

3. 차례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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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리 보기

“결혼이라는 거, 누구의 아내가 된다는 거, 정말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설하는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막상 그의 가족을 대면하고 나니 실감이 조금씩 드는 모양이다. 태웅은 차의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걱정돼?”

“난 아직 어려요.”

“그래서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해. 넌 내 집에, 내 방에 그냥 있으면 돼. 나머진 내가 다 할 거야.”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난 나밖에 모르고, 다른 건 알고 싶지도 않아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어요. 변하고 싶지 않아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어둠에 싸인 저택이 보였다. 태웅은 그녀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겨울을 알리는 바람 소리가 요란하더니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난 당신에게 자꾸 떠밀려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들과 마주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난 멍텅구리같이 사기당하는 기분인데, 어떻게 해야 당신이 사기꾼임을 밝혀낼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요.”

“처음엔 철조망이라더니 이젠 사기꾼?”

그녀가 만약 성숙한 여자였다면, 그리고 이렇게 그를 매혹시키지만 않았다면 잔인하게 비아냥거리며 등 돌리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늘 자신에게 확고한 생각이 있는 당당한 여자만을 상대했다. 그래야 귀찮게 하지 않았고 뒤탈이 없었다. 그에게도 아직 무슨 색으로 필지 모르는 꽃봉오리 같은 여자는 처음이다. 하지만 그녀의 망설임과 불안이 십분 이해가 되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도인 같은 표정과 철학적인 말투로 제 고집을 내세울 때는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노인을 상대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운 일에 직면할 때마다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흥미를 느끼는 그녀를 보면 그 또래의 여자가 경험해야 할 많은 것을 놓치며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측은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서 가르쳐주고 채워주고 싶었다. 그건 그녀가 어려서라기보다는 천재적인 재능이 가져다준 그림자 때문이었다. 아득하고 망연한 그것은 평범한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이었다. 그는 이따금 번득이는 그 몽롱함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봐.”

태웅은 혼란스러운 표정의 설하와 마주 보았다. 지금껏 보아온 그녀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변화무쌍했다. 여린가 하면 독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순박한 여자인가 하면 그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네가 왜 결혼을 결심했는지 난 알고 있어.”

그녀의 입술이 고집스럽게 물렸다. 어깨를 움찔하더니 눈빛이 차가워졌다. 태웅은 설하의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 더욱 집중하도록 했다. 이쯤 해서 정리를 해줄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 깨닫기를 거부하고 있으니 알려줄 수밖에 없다.

“넌 네가 있는 이곳, 매일같이 반복되는 생활, 똑같은 얼굴들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야. 네 나이의 여자는 충분히 그래야 하거든.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네 또래의 여자들이 뭘 입고, 무슨 얘기를 하고, 어떤 놀이를 즐기는지 알고 싶겠지. 넌 결혼이 또 다른 구속이 될 것을 걱정하면서도, 적어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실이 될 걸 안 거야.”

태웅은 반항하는 아이처럼 매섭게 노려보는 설하를 단호한 눈빛으로 제압했다.

“대학, 가고 싶댔지? 그건 변화 아닌가? 뭐가 나올까 무서운데 궁금해서 자꾸만 열어보고 싶은 상자가 있지. 하지만 열쇠는 내게 있어.”

설하는 어깨에 올린 그의 손을 뿌리치며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진실은 때로 꽤 아프게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다. 태웅은 더욱 강한 힘으로 그녀를 잡았다.

“난 사기꾼이 아니야.”

그의 단호한 음성에 설하의 움직임이 멎었다. 검은 머리가 앞으로 쏠려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혼란스럽다는 거 알아. 말했잖아. 날 믿어봐.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 그 신부의 말대로 자유롭게 날개를 펼 수 있도록 해줄게. 기꺼이 그 상자를 열어주겠어.”

“그런 달콤한 말로 당신이 얻으려는 게 뭘까, 정말 궁금하군요.”

태웅은 냉랭한 설하의 목소리에 두 눈을 부릅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비틀린 얼음 같은 얼굴이다. 조금만 마음을 열면 그의 진심을 볼 수 있을 텐데도, 그녀는 철부지 아이같이 떼만 쓰려 하는 것이다. 그를 화나게 하는 부분, 무조건 그에게 마음을 닫는 그녀의 냉랭함이었다. 화가 났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나와 내 돈이라고 말했었죠.”

“그런 표정은 너와 어울리지 않아.”

태웅은 하얀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녀는 비난이 담긴 쌀쌀한 얼굴이었다.

“너와 돈은 별개가 될 수 없어. 하지만 부인하진 않겠어. 솔직히 말할게. 너와 결혼하면 달라질 거야. 먼저 아버진 병원을 신축하시게 되겠지. 불우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 병원을 설립하는 게 꿈이신 분이야. 나쁜 일 아니잖아.”

“그럴 줄 알았어!”

설하는 얼굴이 차갑게 굳어 그의 손을 뿌리쳤다. 태웅은 더욱 화가 나서 그녀의 팔을 사납게 움켜쥐었다.

“속물 취급하지 마! 병원을 수십 개 지어준대도, 너 아니면 결혼 결심 안 했어!”

“흥, 그렇지만 난 당신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누구든 상관없어요!”

설하는 세차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러다 숨이 멎지나 않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어차피 결혼은 내 뜻이 아니니까요. 난 요한 신부님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사랑해요. 영원히! 그러니 누구든 상관없다고요!”

“그건 사랑이 아니야! 넌 아직 사랑을 몰라.”

겉으론 비웃었지만 속은 따끔거렸다. 그녀가 순수한 만큼 그 감정도 깨끗하고 맑은 결정체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다시 오지 않는 풋사랑의 감정은 그래서 더욱 애틋하다. 세월이 지나 그 유치하고 순결한 감정의 아름다움을 아는 그로서는 질투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풋사랑의 자리마저도 누구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나와 신부님의 사랑은 숭고한 거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저질스러운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우린 영혼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신부님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신자와 영혼으로 연결되어 있을걸.”

태웅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차갑게 비웃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당신이 진정한 사랑을 알아요?”

분노에 들떠 흥분한 설하는 얼굴을 치켜들며 대들었다. 태웅은 화가 나 파르르 떨고 있는 그녀의 입술을 보며 앙증맞은 턱을 잡았다.

“물론 알아, 널 사랑하고 있으니까. 진심으로.”

설하는 화를 잊고 찔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믿지 않는다는 얼굴로 또박또박 내뱉었다.

“거짓말! 어쩜 그런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어요?”

“차차 알게 되겠지.”

“진심이라면 증명해봐요!”

“증명을 하라고?”

“원한다는 게 나라면 병원을 포기할 수 있을 거예요.”

“정말 어리군. 넌 세상을 몰라.”

“병원을 얻으려면 어리고 답답한 신부도 참아야겠죠. 그게 세상이잖아요? 그러면서 잘도 사랑을 팔아먹는군요.”

그녀의 입술에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승리의 미소였다. 태웅은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런 설득력으로 어떻게 국회 밥을 먹고살았나 싶을 정도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오해를 한 채로 놔둘 수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사랑을 증명하라니…….

“사랑을 할 만큼 당신은 날 몰라요.”

설하는 최종결론을 내리듯 단정지었다. 그 말은 민태웅을 비열한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투도 매우 마음에 안 들었다.

“잘 들어둬, 이 철부지 아가씨야.”

태웅은 도망치는 설하의 머리를 한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때로 사랑은 말이야, 그 사람을 얼마만큼 아는지도, 그 사람을 만난 지 얼마가 되었는지도 전혀 상관이 없을 때가 있어.”

두 사람의 입술은 서로의 숨결을 전해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 그의 몸이 가까이 다가오거나 부딪칠 때면 늘 그렇듯이 설하는 놀라고 당황한 표정이 되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 당신이 지금 그렇다는 말인가요?”

“금방 알아듣는군, 좋아. 마음에 들었어.”

태웅은 혀끝으로 그녀의 윗입술을 핥았다. 그녀의 비난과 투정 어린 입을 닫는 데 이보다 빠른 처방전은 없다. 살짝 입술을 떼고 그녀의 눈을 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새삼 쑥스럽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말로 해선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

태웅은 입술을 옮겨 그녀의 눈꺼풀에 대었다. 왼쪽, 그리고 오른쪽. 그녀의 눈이 감긴 순간을 이용해 다시 입술을 맛보았다. 그녀는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그리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시퍼렇게 화를 내다가도 이렇게 다가가면 언제나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녀는 아직 욕정을 모르는 아이에 불과한데, 어째서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었다. 그러고는 최면을 걸듯 나직한 목소리로 주문을 했다.

“눈을 떠.”

태웅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물기 오른 입술을 쓰다듬었다.

“당신을 막을 수가 없어요.”

열린 설하의 눈에는 놀람과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태웅은 자신의 손을 거두며 차분하게 물었다.

“왜 막으려고 하지?”

“키스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하는 거니까요.”

“그럼, 신부와도 키스를 했나?”

“아뇨!”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그가 마치 사탄이라도 되는 듯 쳐다보았다. 그런 생각조차 죄스럽다는 듯 경악하는 그녀의 표정에 그는 웃고 말았다.

“신부님은 순결하고 숭고한 분이세요.”

“서로 사랑하는데도 키스를 못하다니, 그것참 안됐군.”

“놀리지 말아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당신도 알 거예요.”

“아니, 모르겠어. 다만 키스도 못하는 그런 남녀관계는 사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건 알지. 하지만 당신 생각은 기특하군.”

“기특하다고요?”

그녀의 춤에는 혼이 깃들어 있다. 평론가들은 어린 나이에 한의 정서를 깊이 있게 표현한다고 극찬을 한다. 그녀의 춤에는 슬픔과 고독과 허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벗어난 자유로움이 묻어 있단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춤에는 애욕이 묻어날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할 것이다. 그것이 그는 뿌듯했다.

태웅은 다시 설하의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길고 검은 머리를 따스하게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 생각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키스는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한다는 거…….”

그리고 그는 키스를 했다. 민태웅이 장설하를 향한 사랑을 증명하는 첫 번째 의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