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아무리 순종적인 여자라도 아이가 있다면 무모하게 용기를 낼 수도, 혹은 독해질 수도 있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이지만 증오를 품은 시은은 약한 체력을 악으로 버텨가며 자신에게 한 번도 따뜻한 집인 적이 없던 곳으로 향했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시은의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해 보였지만, 열 명이 넘는 식구 중 누구 하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부축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같은 여자끼리 동정을 느낄 만도 하건만 집 안에 있는 여자들의 얼굴에는 오히려 진한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식구들의 차가운 시선에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를 느끼며 1층과 2층을 연결해 주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를 맞은 것은 남자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방 안의 공기로 그도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그랬어!”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장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상 갖고 가고 싶은 물건도 없었지만 이 집 안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고 싶지 않았다. 작은 가방을 꺼내 말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구겨 넣었다. 나가라는 말도, 나가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

남자는 변명이라도 해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증오로 번뜩이는 눈을 보면서도 시은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표정 없는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남편이란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최씨 집안의 사람이라면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만에 하나, 자신이 여기서 소리를 지르고 대든다면 이 자리에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힘겹게 참고 있었다. 부부란 이름으로 살을 맞대고 산 지 고작 2개월. 그 짧은 시간 동안 시은이 남자에게서 얻은 것이라고는 불신과 증오뿐이었다. 자신을 경멸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시선을 피했다. 그에게 질문을 해 보았자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도 내가 당신의 돈을 보고 유혹했다고 생각하나요?”

“아닌가?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시치미를 떼려 하다니 가증스러워.”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향해 비난의 말들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웃음 대신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흘러내렸다. 핏덩어리 자식이 이유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 순간부터 인간이 가졌던 뜨거운 가슴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게 잘못이 있다면 당신을 만난 죄밖에 없어요. 아이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몰라. 어머니와 당신의 제수씨들한테 직접 들어요. 없는 아이를 가졌다고 할 정도로 난 그렇게 뻔뻔한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 어머니에게 물어보았자 진실은 듣기 힘들겠지만…. 그리고 나 위자료 줘요. 그래야 당신과 나 깨끗이 끝낼 수 있으니까.”

위자료라는 말에 그의 눈매가 불쾌감으로 굳어지는 것을 보았지만 시은은 이를 악물고 겉으로는 태연한 듯 뱉어냈다.

“지독해.”

“아니, 지독한 것은 내가 아니죠.”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시은은 자신의 남편이었던 남자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언젠가 진실 앞에 서서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꼭 지켜보겠어. 그리고 한 가지 더! 내 나이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라는 것도 잊지 말고 기억하고 있어요.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내 나이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지 당신의 그 똑똑한 머리에 각인시켜놔요.”

남편 역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자신이 그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한 그는 거칠게 화를 냈다. 하지만 시은은 그런 그를 향해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통장을 집어던지고 밖으로 나가버리자 그제야 참고 있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내렸다. 그의 눈빛은 자신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부인해달라고…. 간절한 눈빛을 읽었지만 무시해버렸다. 자신이 버티는 것만큼 그가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 집안에서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을 거라 다짐하고 다짐했는데 어이없게도 눈물은 어떻게 해 볼 사이도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쌍한 내 아기, 엄마 오늘 딱 하루만 울게.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눈물 흘리지 않을 거야. 만약 다시 우는 일이 있다면 그들에게 빚을 갚고 난 뒤에, 그때 원 없이 울 거야.’

-2권-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죽여버리겠어.”

허튼소리가 아님을 알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을 보며,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느 한쪽도 지지 않으려는 듯 두 눈길은 서로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눈길을 피하기라도 하면 질 것 같았다. 그때였다. 선준의 입술이 시은의 입가에 세게 부딪쳐왔다. 저번과 달리 거칠었고 폭력적이었다. 그의 키스에 다리의 힘이 풀리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해 볼 사이도 없이 손이 몸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깊이 들어갈 사이도 없이 그의 팔이 세차게 자신을 밀어냈다.

“이러지 마. 네가 자꾸 이러면 널 잡고 싶어져. 나한테는 널 잡을 어떤 힘도 없어.”

힘들게 말을 토하며 그는 몸을 돌렸다. 어쩌다가 저 사람이 저렇게 약해졌는지, 그는 언제나 당당했고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 호흡을 고르는 동안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 거예요?”

시은의 질문에 조용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어떻게 살아갈까? 늘 자신에게 물어온 질문이었다. 지금처럼 산다면 평생을 살 수 있었다. 왜 이렇게 하나만 보이는지, 자신이 지독하게도 한심스럽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은을 사귀기 전에는 많은 여자를 알고 지냈다. 막상 결혼하고 나자 시은은 어떤 여자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럭저럭 살아가겠지.”

말 속에 담긴 아픔이 심장을 죄어왔다.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느낀 순간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최선준이라는 남자가 얼마나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남자인지 누구보다도 시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이 남자가 얼마나 좋은 남자인지 잘 아는 자신으로서는 더욱 힘들었다.

“그… 그 말은?”

고집스레 밖을 응시하는 그의 눈길을 쫓아 시은은 걸음을 옮겼다. 두 눈을 꼭 감은 모습에는 어떤 고통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 말이 맞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말아요!!”

날카롭게 소리지르는 시은을 보며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는 눈앞에 서 있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보며 선준이 웃으며 말했다

“오래 전에 한 여자에게 심장을 줘버려서 그 여자가 그 심장을 되돌려주지 않으면 내 심장은 제 기능을 못해. 그래서 혼자 살 수 있어. 내 걱정하지 마. 당신의 동정 같은 것 바라지 않아. 당신은 당신의 자리로, 난 내 자리로 돌아가면 돼. 마치 남남처럼 말이야.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야.”

달래는 듯하면서도 가시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그가 자신에게 주었던 사랑보다 훨씬 작은 사랑을 그에게 주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조금 전 그가 한 말이 사랑 고백이었음을 느낀 시은이었다.

“가라! 시은아. 네 자리로 가서 제프라는 사람하고 결혼해. 여기에서 있었던 모든 과거 다 떨쳐버리고 새로운 인생 살아. 아무도 너 원망하지 않아. 만약 내가 너처럼 당했다면, 6년 동안 참지 못했을 거야. 처음에 너를 향한 복수심으로 살았어.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의 말, 이해가 되지 않더라. 그래서 너에게 확인하고 싶었는데, 결과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참담했어. 네 자리로 돌아가. 그게 모두를 위한 방법이야.”

솔직히 선준은 모험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듣고 시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담담하게 보고 있었다.

“잊지 마. 언제나 내 사랑은 너뿐이라는 걸 말이야. 이 말이 아무 의미 없는 말이 될지도 모르지만 너에게는 꼭 해 주고 싶었어. 아이에게도 너에게도 좋은 아빠 남편 못해 주어서 정말 미안하다.”

그의 음성을 들으며 시은은 손잡이를 꼭 움켜잡았다. 마지막 기회였다. 아니, 그것보다도 그에게 알려야 했다. 사랑이라는 것, 참 지독했다. 오직 한 사랑밖에 못하는 그가 오늘은 너무 불쌍했다. 그를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선준 씨.”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꼭 말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할 것 같았다.

“나… 나… 엄마가 될 수 있대요.”

서미선
(필명 : 소나기)

사람들과 수다 떠는 것을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세 남자와 매일 싸우는 게 하루 일과.

-출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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