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현

균열과 절망으로 가득했던 시절을 딛고 다시 돌아온 날
운명처럼 그녀를 만났다. 

“당신, 뺑소니야?”

김의진

하루하루 버티는 것만이 전부인 의미 없는 순간에,
운명처럼 그를 만났다.

“제, 제가요? 전혀, 네버 아닙니다!”

<본문 중에서> 

사람들의 그런 표정들을 하나하나 지나치며 의진의 방으로 들어온 진현은, 그녀를 침대에 고이 앉혔다. 의진은 여전히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의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진현은, 팔을 뻗어 그녀의 볼을 감쌌다. 차갑기도 하고 뜨겁기도 한 감촉에 목이 탔다. 
“내일부터는 너도 바쁠 거야. 푹 자둬. 점퍼를 펼쳐서 말리는 것 잊지 말고.”
“본부장님.”
볼에서 떨어져나간 그의 체온에 갑자기 오한이 느껴진 의진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에게 안겨 오는 내내 망설이고 갈등하던 것들이 있었다. 그는 알지 못하는, 그녀만 알고 있는, 그런 것들이 있었다.
“말해.”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보고 싶어서라고 했었지.”
“네. 보고 싶어서요. 그런데 보고 싶은 것들을 보게 될수록 두렵고 겁이 나요.”
여전히 젖어 있는 머리칼. 이젠 온기가 들기 시작하는 얼굴. 진현은 그런 의진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의진이 말하는 ‘보고 싶은 것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빠르게 이해하고 파악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과거를 비워야 미래가 오는 거야. 미래에게도 자리를 줘. 넌 너무 오래 그것을 방치했어.”
의진은 시선을 내리 깔며 쓰게 웃었다. 그녀가 듣고 싶었던 말을, 그가 해주어서 다행이다. 누군가가 그녀를 채찍질하고 때리고 욕을 해주길 바랐는데 그게 그여서 다행이었다. 가슴에 무겁게 얹힌 것들이 아주 조금은 떠내려 간 것 같다. 체증처럼 막힌 것들이 아주 조금 풀린 것 같다. 
그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의진은 그가 지금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앞에 두고 당연히 일어나는 본능 같은 욕망을 스스럼없이 내보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팔을 뻗어 그녀의 고개를 끌어당긴 그가, 입을 맞추어왔다. 짙은 욕망이 밴 키스는 무척 저돌적이고 깊었다. 목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혀 때문에 숨결이 엉켜버렸다. 젖은 잇새로 흐르는 타액을 끊임없이 삼키며 뜨겁고 진득한 늪 속 같은 입술에, 의진은 사정없이 빨려 들어갔다.

목차

2002년 1월 4일 pm 5시. 남극 킹조지 섬 세종기지 Ⅰ
2002년 1월 7일 am 9시. 남극 킹조지 섬 세종기지 Ⅱ
제1장. The memory
제2장. The door
제3장. The loneliness
제4장. The walking
제5장. The island
제6장. The touch
제7장. The snow
제8장. The way
제9장. The page
제10장. The blue ice
제11장. The flower
제12장. The moment
제13장. The passion
2015년 5월 서울 인사동 Ⅰ
2016년 10월 서울 인사동 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