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에서-

희원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갈증과 누군가 울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이상한 소음 때문이었다.

“물…….”

누구한테 얻어맞았나. 머리가 붕붕 울리고 눈이 떠지지 않을 듯 무거웠다. 희원은 간신히 눈을 뜨고 잠시 멍하니 누워 있었다. 잠시 동안은 여기가 어디인지, 뭘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판단이 되지를 않았다. 방은 어두운데 저 위에서 뭔가 움직였다.

“누, 누구세요?”

움찔했던 그녀는 이내 그게 자신의 모습이란 걸 알았다. 도대체 천장에 거울이 왜 달려 있을까.

거울?

“헉!”

그녀는 등짝을 얻어맞은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희뿌연 어둠 속, 조잡한 기하학무늬의 벽지로 뒤덮인 방의 더블 침대엔 그녀 혼자 누워 있었다.

“뭐야, 이게 뭐야.”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도록 당기고 아파, 그대로 다시 드러누워 끙끙거리며 생각을 좀 정리해 보려 애썼다.

“도대체 몸은 왜 이렇게 아픈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너무 가물거렸다. 전통주 명인이신 송씨 할머니 댁에서 즐겁게 술을 마신 것은 확실히 기억이 났다. 할머니의 전통주는 그 향기만으로 취할 만큼 오묘했고, 각 잔마다 전부 향취가 달라 자꾸만 손을 치켜들게 되었다. 즐거운 기분으로 노래도 했고, 그러다 참새를 보고 귀엽다며 웃었던 게 생각났다.

-본부장님 그거 아세요? 원래 참새가 되게 맛있대요.

미친.

동물을 사랑하는 상냥하고 귀여운 여자처럼 굴고 싶었으면 끝까지 그 콘셉트나 고수할 것이지, 거기다 대고 군침을 흘려?

-저번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본부장님, 무슨 운동하세요? 어깨에 근육이 되게…… 찰 지게 실하세요.

“아흑!”

희원은 틀어쥔 주먹을 입에 물고 비명을 질렀다. 흐릿한 기억 속 서진의 뒷목이 깨물고 싶을 만큼 탐스러웠던 게 떠올랐다. 어깨는 또 왜 그리 만져 보고 싶던지. 사람이 미쳐도 곱게 미쳐야 하는 건데. 꽤 오래 남자친구가 없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회사 상사한테까지 침을 흘릴 정도로 욕구불만이었나?

“너 진짜 왜 그러니. 어흑흑.”

그녀는 원래 술자리에서 분위기만 맞춰 마시는 정도였다. 그러나 너도나도 권하는 마을 주민들의 술잔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던 데다, 향긋하고 달달하기까지 한 전통주에 이렇게까지 취하게 될 줄 생각도 못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초조하게 서성거리던 그녀는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또 한 번 경악했다. 겉옷은 어디로 가고 그녀는 얇은 슬립차림이었다. 꼴은 또 어떤가. 산발한 머리에는 지푸라기와 진흙이 묻어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었고, 얼굴은 화장이 번져 다크 나이트의 조커 같았다.

“차라리 여기서 먼지가 돼서 사라지고 싶다. 그게 아니면 쥐라도 돼서 진짜 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네.”

그녀는 비통하게 중얼거렸다. 내일 아침에 서진의 얼굴은 어떻게 보나.

“못 봐! 죽어도 못 봐!”

너무 창피하니 절로 눈물이 고였다. 겉옷은 어디로 간 걸까. 설마 길거리에서 혼자 벗었다거나…….

“아악!”

아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미친년은 아니겠지.

희원은 혼자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혀 보려 애썼다. 옆방에서 또 여자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얼씨구, 이번엔 벽도 치고 있다. 도대체 저 여자는 왜 저렇게 울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쾅쾅!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펄떡 뛰어 올랐다.

“이봐요. 우희원 씨!”

서진의 목소리였다.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허둥거리고 있는데, 밖에서 또 그가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입니까! 문 열어요! 대답 없으면 부수고 들어갑니다.”

“헉, 본, 본부장님!”

깜짝 놀란 그녀는 후다닥 뛰어가 문을 열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방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자다가 뛰어나왔는지, 흐트러진 머리에 샤워가운 차림이었다. 그는 방으로 들어오자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괜찮습니까?”

“뭐가요?”

“비명 소리 듣고 뛰어왔는데.”

“저 아닌데요. 자다가 꿈꾸셨어요? 아마 옆방 여자 우는 소리가 거기까지 들렸나 봐요. 여기 방음이 너무 형편없어서…….”

그녀는 시트를 필사적으로 몸에 둘둘 감으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딱 타이밍에 맞춰 흐느껴 울던 여자가 이젠 아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머리라도 박는지 쿵쿵거리는 울림도 더 심해졌다.

아흑, 아흑. 아흑. 자기야, 나 죽어. 아! 아! 아!

이건 좀…… 아무래도 이상하다.

팔에 소름이 돋고 갑자기 입안에 침이 말랐다. 저도 모르게 동그랗게 뜬 눈으로 서진을 쳐다보았고,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는 그녀와 그의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주변이 시야에 들어왔다. 욕실은 투명해서 안쪽이 다 들여다보이는데, 사방은 거울로 도배가 되어 있는 방. 하트 모양의 핑크색 침대. 번쩍거리는 공단의 시트. 그리고 그 앞에 마주 서 있는 반라의 여자와 남자. 그의 욕실가운 아래로 무릎과 검은 털이 난 정강이가 보였다. 다시 본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아! 아! 아! 자기, 자기! 나 미칠 것 같아! 아흑, 자기!

그녀의 얼굴도 미칠 것 같은 스피드로 확확 달아올랐다. 얼굴이 너무 뜨거워 고구마를 구워먹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