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겁났어. 너도 나를 떠날까 봐. 그래서 자꾸만 숨었어. 자꾸만 피했어. 이미 인정한 마음인데도 그거 숨기고 싶었어. 알면, 떠나 버릴 것 같았어. 그래서 겁났어. 무서웠어.”

사랑임을 알면서도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었을 만큼 상처가 컸던 그녀, 은주연.
그녀가 다시금 사랑을 말한다.

“사람이…… 이상해져 버려. 정말 어이없잖아, 이러는 거. 근데 자꾸만 나도 모르게 그래. 앞뒤 잴 줄도 몰라. 그냥 막 달려. 멈추고 싶었던 적도 많았는데 그럴 수 없었어. 자꾸만 나를 밀어낼 때도 악착같이 끌어안고 싶었어. 놓으면 죽을 것 같았어, 내가. 온통 주연이야. 세상이 다 그 녀석이야. 이런 게…… 말이 돼?”

사랑이 뭔데? 하던 그, 이초황.
그가 사랑을 알아버렸다.



[본문 중에서]

그날은 눈이 왔다. 3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고,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었다며 TV에선 이젠 완연한 봄이라며 연일 떠들고 있을 때였다.
걷다가 갑자기 내린 눈에 괜스레 커피가 한 잔 마시고 싶어졌고, 그래서 걷다가 맨 처음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막 커피를 주문하는데 바로 앞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보였다. 은주연. 희연 누나의 이복동생. 중학교 때, 꽤 크게 났었던 교통사고로 청력을 잃었다는.
“어제, 본가에 갔었어. 정원에 꽃이 폈더라. 봄이 왔네, 그랬어. 그래서 오늘 옷도 되게 가볍게 입고 나왔는데…….”
상대에게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는 주연을 보며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날,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근데 승효야. 오늘은 눈이 오네. 그리고 춥다, 아주…….”
창밖을 향해 있던 고개가 돌아왔다. 투명한 눈물이 주연의 양 볼 위로 뚝 떨어졌다. 그리고 내 심장이 또 한 번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지금 생각하면 난 그 순간부터 주연을 사랑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주연은 그날, 정승효와 이별했다. 5년여를 그녀와 함께했던 주연의 남자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여자를 사랑한다며 고백했고, 그렇게 주연을 떠났다. 그리고 난,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이별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본 사람이 되었다.
“미안. 정말…… 미안.”
뒷모습만 보이던 남자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그렇게 말했다.
“눈발이 더 굵어지네. 우산을 안 가져왔는데.”
떨리는 입술을, 또 그만큼 떨리는 작은 턱을 하고서도 살포시 웃으며 그렇게 말한 주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 나갔다. 난 재빨리 그녀를 따라갔다. 나가면서 정승효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매섭게 쏘아보는 것 역시.
처음 카페를 나선 것과는 다르게 주연은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한 걸음 떨어진 뒤에서 거세지던 눈발을 맞고 있던 내가 손끝이 시리다는 생각을 한 순간, 주연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져 버렸다. 난 부리나케 주연을 안아들고는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의사는 과로라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느낀 건 그거였다.
이 여자가 이미 알고 있었구나.
자신의 남자와 가장 친한 자신의 친구의 배신을 진작 알았구나.
그걸 깨닫는 순간, 미칠 듯이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다. 당장에 가서 그 자식을 집어던져 버리고 싶을 만큼. 그리고는 곤죽이 되게 패주고 싶을 만큼.
그때, 내가 주연에 대해 알았던 거라곤 이름 석 자와, 희연 누나의 동생이란 것과 듣지 못한다는 것이 다였다.
“이젠, 나 혼자인 거야?”
천천히 눈을 뜬 그녀가 맨 처음 한 말은 그거였다.
“아니.”
곧바로 대꾸했지만, 그녀는 미동 없이 병실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난 주연의 손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그제야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를 보며 한참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보았던 걸까. 그 몇 번 동안 얼마를 보았을까.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초황이야. 이초황.”
난 여전히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녀에게 얘기했다. 그녀도 내게 잡힌 손을 빼내지 않았다. 난 안심했다. 그 찰나에도 그녀가 내게 잡힌 손을 빼내 버릴까 조바심이 들었었다.
“우리, 노래방 갈래?”
그녀가 말했다. 난 씩 웃으며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연은 노래하지 않았다. 처음, 꽤 시끄러운 곡 열 곡 정도를 예약해 놓고서 자리에 앉아 몸을 기댄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아 버렸다. 한 시간이 조금 못 되는 시간 동안 그녀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렇게 눈만 감고 있을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곁에서 가만히 앉아 그런 그녀를 쳐다보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배고프다.”
노래방을 나서면서 그녀가 말했다. 우린 가까운 분식집으로 들어가 순대와 떡볶이를 잔뜩 시켜 놓고, 앞에 있는 어묵꼬치와 함께 먹었다.
“기억났어. 세황 오빠 동생!”
주연은 그때야 내가 누군지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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