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 소개

그리움에 가슴 앓던 시간

사랑으로 찬란했던 사람들

그 시간, 그 사람들의 이야기.

열네 살 동심이 핏빛으로 스러져간 날이 아직도 당신 안에 있나요? 그날의 악몽을 지울 수 없다면 이 밤도 함께 간직해요. 언젠가, 긴 세월 흐른 어느 날, 마음이 추워지면 오늘을 꼭 기억해요. 당신이 다시 태어나던 날, 우리 사랑 눈물 빛이었다고. 어둠 속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은 것 하나로 이 밤이 찬란했다고. 나의 옛날 이야기는 동화. 당신의 지난 이야기는 생존기. 우리가 함께 써갈 이야기는 서럽지 않기를. 행복으로만 가득하기를.

- 우혜린

2. 작가 소개

나자혜

느린 여행과 굽 낮은 신발과 승패가 가려지는 야구 경기를 좋아하며, 걷거나 뛰면서 글쓰기 노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기계가 발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홈페이지: www.lovenwisdom.com

트위터: www.twitter.com/lovenwisdom

▣ 출간작

아이스크림처럼, 레몬처럼

별의 바다

얼음불꽃

13월의 연인들

꿈꾸는 오아시스

우리들의 시간꽃

3. 차례

#16. 폭우 속에 서 있을지라도

#17. 버릴 수 있는 것과 버릴 수 없는 것

#18. 지킨 것과 지키지 못한 것

#19. 시간과의 게임

#20. 배운 것과 배우지 못한 것

#21. 내 인생의 주인은 나

#22. 살아남은 것과 살아남지 못한 것

#23. L.O.V.E.

#24. 나에게 너는

#25. 희생과 역습

#26. 영원을 믿는 순간 사랑은 추락하고

#27. 그대는 나의 세상입니다

#28. 13월의 연인들

#29. 꿈을 꾸던 그 자리에, 하나 되어

#30. 그들 모두 한자리에, 가족으로

#에필로그. 13월에서 날아온 편지

#작가 후기

4. 미리 보기

「석주 씨 때문에 가슴이 남아나질 않겠어요. 반성해요.」

혜린은 피가 엉긴 석주의 주먹을 소독약으로 닦으며 나무랐다. 알코올 기운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석주의 관절이 움찔했다.

「길들여준다는 말을 하질 말든가요. 공연히 사람을 설레게 해놓고선. 나보곤 다치지 말라면서 피를 보이질 않나. 나쁜 사람이야.」

붕대를 찾으려 약상자를 되작이는데 석주가 그녀의 얼굴을 잡아 돌렸다.

「아까 한 말 다시 해봐.」

「평생이라고 했어요.」

혜린은 눈을 새침하게 흘겼다가 고백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석주의 엄지가 입술을 쓸었다. 고개를 끄덕거리자 석주가 활짝 웃었다. 아, 눈부셔. 혜린은 마법에 홀린 듯 마주 웃었다. 어둠의 흔적 없이, 웃음만, 그저 웃음만 석주가 보여준 것은 처음이었다.

혜린은 목걸이를 풀었다. 미니마우스 펜던트 옆에서 반지를 빼자 석주가 놀란 듯 물었다.

「하고 있었어?」

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를 석주에게 건넸다. 석주는 혜린의 약지에 반지를 밀어 넣다가 망설였다. 너무 초라했다. 이렇게 예쁘고 고운 손에 끼워주기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반지였다.

「너랑 안 어울려.」

석주는 반지를 도로 뺐다.

「나는 이 반지가 마음에 꼭 드는데요.」

혜린이 고집을 부렸다.

「내가 싫어. 다시 사줄게. 근사한 걸로.」

「그럼 줘요. 걸고 있을래요.」

한사코 다시 찾아간 반지를 목걸이 줄에 넣으며 혜린은 다사롭게 웃었다.

「이제 이건 내 부적이거든요. 석주 씨가 이겨냈던 시간들의 흔적이고. 절대 버리지 않을래요.」

「25분이나 늦었어요. 기자들에게 사과부터 해요.」

붕대를 감고 난 혜린은 석주에게 일렀다.

「알았어.」

석주가 고분고분 고개를 까딱였다. 회견장에 먼저 가 있겠다며 일어서려는데 석주가 팔을 홱 붙들었다.

「왜요?」

「셔츠 갈아입어야 해. 입혀줘.」

부끄러움도 모르는 어리광이었다. 혜린은 고개를 돌리며 배시시 웃다가 석주를 흘겨봤다.

「그러게 누가 손을 다치래요?」

「그러게 누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청혼을 허락하래? 무릎까지 꿇었을 때는 겁먹고 빼더니.」

석주는 짐짓 인상을 썼다가 혜린을 옷걸이 앞으로 밀었다.

혜린은 석주의 셔츠를 벌리고 다친 손이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소매를 잡아당겼다. 석주의 맨가슴이 드러났다. 탄탄한 가슴은 크고 작은 상흔으로 서러웠다. 내 남자가 이겨낸 시간의 흔적. 가슴이 서걱거렸다.

「왜?」

석주의 깊은 음성이 떨어졌다.

「몸이 멋있어서요.」

혜린은 재빨리 생긋 웃고 옷걸이에서 연파란 셔츠를 들어 보였다. 석주가 고개를 까딱했다.

혜린은 석주에게 셔츠를 걸쳐주고 단추를 하나씩 잠갔다. 일요 장터에서 석주와 부딪쳐 잼을 흘렸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셔츠 자락 하나 들어 올리는 사소한 일에 손이 후들거렸는데. 셔츠를 마저 여미는데 서툴러서 더 설레었던 첫날밤의 기억이 되살아나 후후 웃음이 나왔다.

「뭐야?」

석주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맞췄다.

「지난번엔 단추 끄르면서 연인 되는 연습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단추 잠가주고 있으니까 아내 연습하는 기분이에요.」

혜린은 수줍게 고백했다.

석주는 혜린의 발그레한 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내. 썩 근사한 말이었다. 가슴 벅찬 말이었다. 이 여자가, 오랜 시간 그리던 단 하나의 여자가 내 아내가 된다. 나만 바라봐주겠다고 한다. 평생.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석주는 충동적으로 혜린의 볼에 입맞춤했다. 혜린의 입가에 고운 미소가 번졌다. 웃음을 머금은 입술이 예뻐 또 입을 맞췄다.

「다 됐어요.」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 혜린이 물러섰다.

「마저 해줘. 이렇게 하고 나갈 수는 없잖아.」

허리춤을 덮은 셔츠 자락을 툭툭 치면서 석주는 능청을 부렸다. 혜린이 문 쪽을 힐긋거렸다. 당황한 혜린의 모습이 재미있어 석주는 얼른, 하며 인상을 썼다.

혜린은 벨트를 풀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석주의 등을 타고 늘어진 셔츠 자락을 잡으려고 보니 석주의 허리를 포옹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돌아서 봐요.」

부탁했지만 석주는 꼼짝하지 않았다. 눈을 흘겨봐도, 입술을 앙다물어 봐도 석주는 능글맞게 웃기만 했다. 할 수 없이 석주 뒤로 가려는데 억센 팔이 허리를 홱 휘감았다.

「석주 씨!」

「오늘 약혼 발표할까?」

「그러기만 해봐요.」

제법 매섭게 쏘아붙였더니 석주가 허허 웃으며 그녀의 머리에 턱을 얹었다.

「아직 부모님께 인사도 안 드렸잖아요.」

혜린은 석주의 가슴팍에 대고 웅얼거렸다.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오늘은 딴 생각 말고 기자들 질문에 대답이나 잘해요.」

혜린은 석주의 품에서 빠져나와 셔츠 자락을 마저 집어넣었다. 벨트를 매주고 셔츠에 주름이 지지 않았는지 살피고 나달거리는 셔츠 소매를 세 번 접었다. 다른 쪽도 같은 길이만큼 접어 올리자 석주가 놀란 듯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인터뷰할 때는 늘 이 정도 걷고 있던걸요. TV에서 석주 씨 볼 때마다 팔뚝이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긋 웃자 석주가 그녀를 껴안았다. 가슴에 꼭 품고서, 아무 말도 없이, 숨통을 조일 듯 안았다가, 또 그녀가 바스러지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럽게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나가봐야 하는데.」

혜린은 석주의 가슴팍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알아. 그냥. 좋아서. 너무 좋아서.」

뜨거운 입술이 이마에 내려앉았다. 석주가 행복하다는 말을 흘려내며 그녀의 뺨에, 입술에,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동안 몇 분이 더 흘러갔다.